‘너의 목소리가 들려’가 다른 드라마보다 더욱 기특하게 여겨지는 이유 중의 하나는 등장인물 한 사람 한 사람 모두를 주인공으로 삼고 있다는 것이다. 이 드라마 역시 주연과 조연이 명확하게 구분되어 있기는 하다. 이보영과 이종석, 윤상현이 주연 배우들이고 김해숙, 정웅인, 이다희, 정동환 등 그들의 주변 인물들은 조연 배우들이다.
하지만 ‘너의 목소리가 들려’는 뼈대를 이루는 주연들과 살을 붙이는 조연들의 연기 조합으로 이야기를 완성해가는 여느 드라마들과는 달리, 매 회마다 각각의 에피소드를 심어 놓고 이에 따라 조연들을 주인공으로 내세우는 플롯을 보여주고 있다. 극 초반 어춘심(김해숙 분)의 죽음으로 그녀가 비극의 주인공이 되고, 한 동안 경악할 만한 살인 사건을 저지른 민준국(정웅인 분)에게 모든 포커스가 맞춰졌던 경우처럼 말이다.
어제 방송된 15회도 잠시 여주인공이 바뀌는 듯했다. 친부인 황달중(김병옥 분)과 길러준 아버지 서대석(정동환 분) 사이에서 혼란과 슬픔을 동시에 겪어야만 했던 서도연. 한 아버지의 과오와 또 다른 아버지의 누명 앞에서 심판의 추를 들고 벌벌 떨어야만 했던 서도연. 15회의 여주인공은 장혜성을 연기한 이보영이 아니라 서도연을 연기한 배우 이다희였다.
장혜성은 서도연을 찾아가 황달중이 친아버지라는 사실을 알린다. 서도연은 헛소리라며 윽박지르지만 결국 유전자 감식을 받음으로써 황달중과의 부녀관계임을 확인하게 된다. 저지르지도 않은 살인죄로 26년이나 복역하고, 죽어있는 것으로 된 부인을 또 다시 살인하려 했다는 이유로 피고석에 있는 황달중이 자신의 친부라는 사실에 맞닥뜨리게 된 것이다.
살인미수로 기소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이 바로 자신을 낳아준 친아버지였다는 사실. 그 사실을 알고서도 서도연은 법정에서 황달중의 죄를 물었다. 눈 하나 꿈쩍하지 않은 듯했다. 그녀의 말처럼 그녀에게 아버지는 서대식 한 사람인 것 같았다. 그녀의 거침없는 심문을 보면서 장혜성은 어쩌면 저렇게 매몰차고 냉정할 수가 있을까라고 생각했고, 친아버지의 억울함 따위는 안중에도 없나보다라고 여겼다.
그런데 화장실에서 서도연이 운다. 그것도 바닥에 주저앉아 목메어 오열을 한다. 잠시 휴정을 하는 사이, 서도연은 자신의 잔인함을 끝내 이기지 못하고, 친부 황달중의 억울함을 외면하지 못하고 넋을 잃은 채 허물어지고 만다. ‘나 좀 살려줘 우리 아빠 좀 구해줘!’ 장혜성을 바라보며 절규하듯 외친 이 외마디는 보는 이들의 심금을 울렸고 가슴 속에서 무언가를 치밀어 오르게 했다. 누구도 갈라놓을 수 없는 피붙이 관계의 의미를 다시금 떠올리게 하면서.
서도연이 무너진 것은 재판 과정에서 벌어진 황달중의 진심 어린 고백 때문이었다. 황달중은 법정에서 누군지 모르는 딸에게 참 고맙다는 말, 나를 위해 유전자 감식을 받아줘서 정말 감사하다는 말, 계속 그렇게 예쁘게 행복하게 살아달라는 말을 남겼다. 서도연이 자신의 딸인 줄을 알면서도, 딸을 바라보지 않고 내색도 하지 않았다. 가벼운 눈물조차 보이지 않았으며 그저 무덤덤하게 고백한 것이 전부였다. 그의 고백에 서도연은 더 이상의 심문을 할 수가 없었다. 아버지의 마음이란 것이 자신의 목숨을 돌보지 않기까지 자식을 사랑하는 것이구나를 이제야 알아버렸기 때문이다.
‘너의 목소리가 들려’ 15회에서 서도연이 흘린 눈물은 빛났다. 유난히 우는 장면이 많았고, 장면마다 눈물의 수위에 높고 낮음이 갈렸는데도 이다희는 서도연의 감정을 완벽하게 이끌어내면서 그 수위 조절을 성공적으로 마쳤다. 장혜성에게 진실을 듣고 난 후, 유전자 감식 결과를 통보 받은 후, 황달중의 고백을 들은 이후의 눈물의 완급은 달라야 했다. 그 때마다 마음 속 감정이 제각각 이었을 테니까. 그런데 그걸 해낸다. 한 방울과 두 방울, 조용한 눈물과 절규의 눈물, 무호흡의 눈물과 급한 호흡의 눈물. 그 양분된 차이점을 완숙된 연기로 기가 막히게 표현해 내고야 만다.
사실 이다희는 ‘너의 목소리가 들려’에서 가장 불안감을 느끼게 하는 배우였다. 제대로 검증이 안 된 배우, 몇 편의 드라마에 출연을 했어도 딱히 기억나는 캐릭터가 없는 배우, 정도를 걸은 것이 아닌 슈퍼모델로 데뷔하여 연기자의 길로 들어선 배우. 그런 배우에게 이보영과 대결구도를 펼칠 정도의 비중이 주어졌다는 것이 영 찜찜할 수가 없었다.
그런데 이제는 그녀를 주인공으로 한 에피소드가 없었으면 어쩔 뻔 했나 하는 생각이 든다. 그랬다면 이다희가 얼마나 배우로서의 가능성이 충만한 배우인지 몰랐을 것 아닌가. 15회에서 보여준 그녀의 눈물연기는 별 볼일 없던 중고신인 배우에게서는 도저히 나올 수 없는 연기였다. 그저 얼마나 빨리 예쁘게 잘 우는가가 아니라, 감정에 따라 점진적으로 강해지는 눈물을 세밀하게 표현해야만 했으니까.
게다가 서도연이라는 캐릭터는 언제나 딱딱하고 도도했으며 건조하기만 했었다. 장혜성이 이끄는 코믹한 분위기에 유일하게 찬물을 끼얹을 수 있는 캐릭터였다. 그런 그녀가 15회에서는 하염없이 절절해졌다. 부러질지언정 구부러지지는 않을 듯했던 그녀의 감정선이 이마에 힘줄이 서게 하면서 와르르 무너지고 만 것이다. 이는 이다희라는 연기자를 재발견하게 된 극적인 순간이기도 하다.
‘조연의 주연화’에 이다희도 멋지게 합류했다. 적어도 15회에서만큼은 그녀가 여주인공이었고 또 주연의 몫을 잘 소화해냈다. 이보영의 연기는 언제나 훌륭하다. 그녀의 연기력에 대한 칭찬은 아무리 해도 모자라지 않다. 그런데 이번만은 이다희의 손도 들어주어야 할 듯싶다. 이보영과의 연기대결에서 전혀 밀리지 않는 모습을 보란 듯이 보여주었으니 말이다. 그녀의 진가가 반갑다. 그녀가 보여준 시간차 눈물연기. 실로 이보영과 견줄만한 수준이 아니었나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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