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달 전에 어린 여중고생들이 촛불을 들고 나왔다. 먹고 잘 시간도 뺏는 교육정책에 대한 반발심으로 치부될 듯했다. 그 촛불이 삽시간에 미친 소 반대로 옮겨 붙어 거대한 물결을 이루며 밤마다 국민의 분노를 태운다. 수만, 수십만, 백만의 함성에도 권부는 귀를 틀어막고 있다. 그 메아리가 물대포, 방패, 곤봉, 군홧발, 체포조란 유혈진압으로 돌아왔다. 5공 말기 6월 항쟁 당시 서울의 모습을 방불케 한다.

경제를 살린다니까 ‘노무현 심판론’에 편승해 이명박 후보에게 표를 몰아줬다. 대선-총선 압승에 도취한 나머지 국민을 국가의 주체로서 존중하지 않는다. ‘강부자’, ‘고소영’ 내각이 그것을 말한다. 물가폭등, 경기침체는 뒷전에 둔 채 국가체제를 시장으로 편입시키는 데만 혈안이다. 미국산 쇠고기 무차별수입, 공교육 자율화, 한반도 대운하, 공적영역 사유화, 언론통제 등등 말이다. 그것도 군말 말고 시키는 대로 따르라며 밀어붙인다.

▲ 지난 6월 10일 저녁 세종로 네거리에서부터 시청 앞 태평로, 남대문 넘어까지 50만 시민이 함께 촛불을 들었다. ⓒ서정은
광우병은 생명의 문제다. 그 까닭에 젊은 엄마가 유모차를 끌고나온다. 국정운영 전반에 대한 불만이 팽배한데 미친 소를 미국 축산업자보다 더 두둔한다. 그 떠벌임이 국민적 자존심을 짓밟아 분노를 안겨줬다. 대응자세가 군사독재의 공안정국을 닮았다. 미국에는 굴욕적이면서 국민에게는 폭압적인 행태다. 한 세대가 지났건만 사회변화를 감지조차 못한 채 국민 위에 군림할 줄만 안다.

그 시절에는 시위 지도부가 있었다. 명동성당에 피신한 민주인사들과 대학학생회의 연대조직 말이다. 한총련, 전대협 깃발이 앞장섰고 그 아래로 뭉쳤다. 대학생이 주축이었다. 나중에 넥타이 부대가 참여해 시민항쟁으로 승화됐다. 지금은 그런 조직도 주체도 없다. 광우병대책위는 그런 결사체가 아니다. 아고라 깃발이 나부끼나 누구도 지시할 수 없는 자발적-개인적 참여자들이다. 그럼에도 놀랍게 정연한 질서가 유지되는 메커니즘이 작동한다.

그 시절에는 대학가에 대자보가 나붙고 유인물이 지하에서 유통됐다. 군벌독재의 폭압은 주로 구전으로 전파됐다. 개인의사는 존재하지 않은 채 집단행동이 진행됐다. 지금은 인터넷이 사회적 공론장으로 등장했다. 다음의 아고라에는 1시간에 수백 개의 게시물이 올라온다. 채팅수준에서 토론이 이뤄지고 행동방향이 설정된다. 고대 그리스의 사상적-정치적 토론장이었던 아고라(agora)가 21세기 대한민국에서 여론의 광장으로 환생한 것이다.

군사정권은 체제저항운동을 우매한 군중으로 보고 여론조작을 통한 조종대상으로 알았다. 이명박 정부는 박제된 듯이 그 시각이 그대로 고착되어 있다. 아날로그가 디지털을 보는 착시현상이다. 그들은 중우(衆愚)가 아닌 중현(衆賢-smart mob)이다. 그들의 민주-참여의식은 집권세력을 뛰어넘는다. 그들은 인터넷과 휴대전화로 네트워크를 형성한 공동체다. 휴대전화도 1:1의 음성이 아닌 문자를 무한복제해서 전달한다. 그런데 배후세력을 척결한다며 몽둥이를 높이 쳐들었다. “나를 잡아가라”가 무슨 소리인지 모른다는 뜻이다.

전통매체는 뉴스를 편집이란 가공을 거쳐서 전달한다. 현장성도 모자라지만 왜곡-변질이 가능하다. 첨단기술은 거대자본의 전유물이었다. 그런데 디지털 기술의 발달이 1인 미디어 시대를 열었다. 거리의 매체가 현장을 실시간으로 여과 없이 생중계한다. 인터넷을 통해 참여군중과 동시에 동일한 현장에 접속된다. 아프리카는 동시접속자가 최대 10만명이나 된다. 화면을 잡아 재전송하는 확대재생산까지 한다. 쌍방향 교신에는 일방적으로 뉴스를 전달받는 수용자란 개념이 없다. 기성매체에 대한 불신이 조중동 절독운동을 벌인다.

촛불은 비폭력적 시민불복종운동이다. 그런데 기다렸다는 듯이 극소수의 과격을 핑계 삼아 야만적인 국가폭력을 휘두른다. 거리의 촛불만 보니까 곧 꺼질 듯이 보인다. 그 수십 배, 수백 배가 사이버시위를 벌인다는 사실을 모르니까 말이다. 지금 촛불저항은 주권재민을 합창하며 인류가 겪지 못한 디지털 민주주의 첫 장을 쓰고 있다. 한국적 간접민주주의가 직접민주주의의 요소를 흡수해야 하는 기로에 처한 것이다. 공안정국으로 회귀해 관변세력이나 규합하는 집권세력은 그 의미를 알 리 없다. 동시대에 사나 20세기에 갇혀 소통을 모르는 ‘아날로그’와 쌍방향 교신을 통해 21세기를 사는 ‘디지털’의 대충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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