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테일의 반가운 귀환이 아닐 수 없다. 할리우드에 진출한 감독이 저지르기 쉬운 타협이란, 자신만의 색깔을 할리우드 상업주의 안에서 발현하지 못하는 타협이기 쉽다. 하지만 봉준호 감독은 할리우드라는 시스템 안에서도 자신만의 고유한 색깔을 고수하는 현명함을 발휘할 줄 알았다.

설국열차의 뒷칸은 무산층이 탑승하는 칸이다. 가진 게 없기에 식량을 배급받아야만 하고 수시로 군인들에게 검열을 받는다. 반면 열차 앞칸에 탑승한 유산계층은 온갖 호사를 누리며 풍요롭게 살아간다. 무채색에 가까울 정도의 어둠은 열차 뒤편에서 우울하게 살아가는 무산계급의 물질적 그리고 정신적 비루함을 강조한다.

열차 뒷칸 사람들이 앞칸을 접수하기 위해 한 칸 한 칸 앞으로 나아가면서 영화는 밝은 색을 갖기 시작한다. 형형색색의 다양한 컬러 옷을 입는 앞칸 사람들의 화려함은 유산계급의 경제적인 여유로움을 반영한다. 영화 속에서 배급을 받느냐 안 받느냐의 차이, 화려한 디자인의 의상이냐 단순한 의상이냐 하는 점뿐만 아니라 무채색이냐 유채색이냐에 따라 경제적인 계급이 구분된다. 봉 감독은 조명 디자인을 통해서도 계급을 구분한다.

무산계층의 뒷칸 사람들이 유산계층이 거주하는 앞칸으로 이동하길 바란다는 건 비루한 신분에서 벗어나는 신분 상승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유산계층을 대변하는 군인들에게 당한 억압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자유의 의미도 갖는다. 그런데 뒷칸에 탑승한 무산계층을 억압하는 군인들을 향해 총리 메이슨(틸다 스윈튼 분)은 이상한 명령을 내린다.

거기 있는 사람들 가운데 3/4에 해당하는 사람을 살상하라는 명령이다. 군인의 진압이라는 건 ‘모’ 아니면 ‘도’다. 완전히 진압하든가 아니면 반란군이나 폭도에게 진압을 당하든가 하는 둘 중 하나의 상황 가운데서 택일해야 한다. 그런데도 총리는 퍼센트 수치를 정확하게 제시하면서까지 열차 뒷칸 사람을 진압하라는 명령을 내린다. 정신이 살짝 이상해서일까?

분자를 형성코자 하면 원소가 적정 비율로 결합해야 한다는 건 화학시간에 배운 바 있다. 바닷물은 일정한 염분을 유지하며, 대기 중에 있는 산소는 20% 안팎으로 존재하는 식으로 모든 물질은 일정한 비율을 따른다. 마치 <노잉>처럼, <설국열차>의 세계관은 결정론적 세계관을 따르고 있다. 열차에 탑승한 승객은 나름 ‘존재의 의미’가 있다. 설사 열차 앞칸에 탑승한 부르주아 계층 사람들에게 하찮아 보이는 뒷칸 프롤레타리아 계층의 사람이라 하더라도 말이다.

총리가 열차 앞칸 진입을 시도하는 열차 뒷칸 사람들을 3/4만 진압하라고 명령하는 건 봉테일, 봉준호 감독의 섬세함을 보여주는 연출이자 복선이다. 설국열차를 디자인하고 설계한 창조주 윌포드가 설국열차에 거주하는 거주민을 결정론적 시각에서 바라본다는 암시 말이다. 어떤 사람은 이 분야에 적합한 반면에 또 다른 어떤 사람은 저런 분야에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윌포드의 결정론적 사고관은, 일 년에 1월과 7월 딱 두 번만 스시를 먹을 수 있다는 총리의 대사를 통해서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그런데 윌포드의 이러한 결정론적 시각이 위험한 이유는 물질의 유무로 사람을 차별 대우한다는 설정 이외에도 사람을 부속품 취급하는 사고이기 때문이다. 설국열차에 탑승한 탑승객이 혹독한 빙하기에서 살아남은 최후의 인간이기에 설국열차에 탑승하는 것이 아니라, 설국열차에 탑승해야 할 ‘존재의 이유’가 있기 때문에 탑승할 수 있다는 인간소외가 발생하기에 그렇다. 인간이 인간 그 자체로 말미암아 존중받는 것이 아니라 존재의 의미 때문에 탑승할 자격이 있다고 보는 윌포드의 결정론적 사고관은 맬서스의 인구론을 디스토피아로 환원한 우울한 설원의 악몽임에 틀림없다.

늘 이성과 감성의 공존을 꿈꾸고자 혹은 디오니시즘을 바라며 우뇌의 쿠데타를 꿈꾸지만 항상 좌뇌에 진압당하는 아폴로니즘의 역설을 겪는 비평가. http://blog.daum.net/js7kei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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