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예기사를 보면 연예인이 ‘망언’을 하는 경우를 접할 수 있다. 여기에서 말하는 망언이란 연예인의 무개념 발언이 아니다. 일반인보다 우월한 스펙을 갖고 있음에도 그 우월함을 비하하는 차원의 망언이다. 아름다운 외모를 갖고 있음에도 자신의 외모가 보잘 것 없다고 비하하는 여자 연예인의 발언이나, 자타가 공인하는 노래 실력을 가진 가수가 자신의 노래 실력이 하찮다고 자학하는 발언이 이에 해당한다.
<더 울버린>의 주인공인 울버린도 이러한 망연 대열에 동참한다. 화가 날 때 손에서 뿜어 나오는 아다만티움 발톱도 모자라 불로불사의 자기치유능력을 갖는 울버린은 자신의 ‘불로불사’를 고맙게 생각하기는커녕 불로불사의 육체에 대해 고민하고 번민한다.
기존 시리즈에서 울버린이 가졌던 의문, 자신의 정체성에 관한 회의도 모자라 이제는 진시황도 부러워할 불로불사의 육체마저 고민하는 울버린의 모습은 연예인의 외모 망언에 버금가는 자기 번민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죽지 않는 육체에 관한 고민은 옛 애인이던 엑스맨 진 그레이를 자신의 손으로 없애야만 했던 트라우마로부터 비롯한다. <엘리자벳>에서 주인공에게 끊임없이 죽음을 노래하는 토트 마냥 진 그레이는 죽어서도 끊임없이 울버린 곁을 맴돌며 자신에게 돌아오라고 손짓한다. 진 그레이라는 사이렌이 울버린 곁에서 타나토스의 노래를 불러대는 셈이다.
죽지 않고 늙지도 않는 울버린의 능력을 탐하는 이가 있었으니 2차대전 당시 울버린이 목숨을 구해준 야시다다. 울버린이 아니었다면 원폭 앞에서 속수무책으로 목숨을 잃을 수밖에 없었지만 울버린 덕에 목숨을 구한 야시다는 꺼져가는 그의 생명을 대신하여 울버린에게 평온한 죽음에 이를 수 있게 해주겠노라는 제안을 한다. 자신의 목숨을 구해준 은인 울버린의 불로불사의 능력을 탐하는 일본판 진시황에 다름 아니다.
<더 울버린>의 시나리오는 독창적인 시나리오가 아니다. 울버린의 코믹북 시리즈인 ‘일본 사가’의 이야기를 바탕으로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그렇다보니 <더 울버린>의 전반적인 이야기는 일본을 무대로 진행된다. 일본을 무대로 이야기가 진행된다고 해서 <더 울버린>이 <라스트 사무라이>처럼 할리우드의 자포니즘 성향을 반영하는 것일까.
그 해답은 일본 개봉일에 있을 듯하다. 일본에서 <더 울버린>은 대목인 여름 시즌이 지난 9월에나 개봉한다. <더 울버린>의 서사가 일본에서 전개된다면 한국과 엇비슷한 빠른 시기에 개봉할 법도 한데 왜 굳이 초가을 무렵에나 개봉을 하는 걸까. 일본을 배경으로 다룬다고 해서 일본을 미화하는 자포니즘을 반영하는 것이 아니라 일본 영화팬의 정서를 감안한 개봉일 선택이 아닐까 싶다.
야시다는 자신의 생명을 구해준 울버린에게 일본도로 보답을 하는 듯하면서도 울버린의 불로불사의 능력을 탐낸다. 겉으로는 죽는 방법을 일러주겠다고는 하지만 야시다의 속내엔 꺼져가는 자신의 생명을 울버린을 이용해서 연장하려는 욕망이 담겨 있다.
울버린을 향한 야시다의 속내만 엉큼한 게 아니다. 야시다가 세상을 뜨자 야시다 가문의 후계자로 야시다의 아들 신겐이 아닌 마리코가 지명된다. 친아들이 아닌 손녀가 가문의 상속자로 지명되자 야쿠자가 동원되면서 재벌 가문의 집안싸움이 시작되고 울버린은 마리코의 생명을 보호하는 경호원 역할을 수행한다.
일본의 재벌 가문을 막장 가문으로 묘사하고, 생명의 은인인 울버린에게 엉뚱한 방법으로 보답하려 드는 재벌 총수의 생명 연장 프로젝트 이야기인 <더 울버린>을 보노라면 왜 이 영화가 정작 일본에서는 초가을에 개봉되는지를 알 법하다. 일본을 배경으로 하기에 자포니즘을 이야기하려는 것 같지만 그 안을 들여다보면 일본인 캐릭터를 막장드라마의 주인공으로 몰고 가는 이야기 구조를 갖고 있는 영화다.

늘 이성과 감성의 공존을 꿈꾸고자 혹은 디오니시즘을 바라며 우뇌의 쿠데타를 꿈꾸지만 항상 좌뇌에 진압당하는 아폴로니즘의 역설을 겪는 비평가. http://blog.daum.net/js7kei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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