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년은 ‘범생이’었다. 제도교육을 누구보다 착실히 받았다. 코 밑 잔털이 굵고 뻣세지기 시작할 무렵에도, 교육받은 내용을 털끝만큼도 의심하지 않았다. 소년은 국가가 표상하는 반듯한 청년으로 자랐다. 대학 시절 막걸리를 마실 때도 가장 선망하는 국가는 미국이었다. 청년은 그 나라 이름에서 이성과 합리성, 자유 같은 이미지를 떠올렸다. 돈을 벌면 반드시 그 나라로 유학을 가겠다는 꿈을 키웠다. 열심히 영어를 공부했다. 기자라는 직업이 멋있어 보였다. 원서를 넣어봤다. 한 번에 붙었다. 청년은 그렇게 대한민국의 기자가 되었다.

삼십대 중반의 기자는 폭탄주가 몇 순배 돌자 초저녁부터 얼굴이 불콰해졌다. 그가 회고하는 10대와 20대의 삶은 자를 대고 그은 듯한 궤적을 그리고 있었다. 삶의 지침(指針)을 돌려놓을 사건은 멀고도 친숙한 곳에서, 뜻밖에 찾아왔다. 성층권 밖까지 날아갔다 각도를 꺾어 돌아온 전파는 꿈에도 상상하지 못했던 스펙터클을 화면 가득 사출하고 있었다. 항공기 두 대가 잇따라 마천루로 향했고, 이윽고 분수가 꺼지듯 마천루는 쏟아져 내렸다. 미국을 바라보는 다른 한쪽의 시선은 적대적이었고, 무시무시했다. 2001년 9월11일이었다.

초년 기자에게 미국은 차츰 다른 모습으로 다가왔다. 미국은 아프가니스탄을 침공했다. 테러리스트가 그 나라에 은신한 것으로 추정된다는 이유로 무구한 어린이들이 죽어나갔다. 다시 이라크를 침공했다. 테러리스트 비호 의혹을 사는 독재자가 통치하는 나라에 산다는 이유로 단란한 일가족이 일쑤로 폭사했다. 미국은 이성과 합리성, 자유의 이미지와는 한참 거리가 멀었고, 외부의 적대적 시선을 강화하는 쪽으로만 멀어져갔다. 한국이 마침내 자이툰 부대를 파병하면서, 기자에게 미국은 관찰 대상이 아니라 하나의 실체가 되었다.

미국이 어디를 침공하든, 한국이 뒤쫓아가든, 신문을 통한 발언권이 그에겐 없었다. 그는 경제 담당 기자였다. 론스타의 외환카드 주가조작 의혹 사건이 터졌다. 취재를 하면 할수록, 주권이 있는 나라 안에서 벌어져서는 안 되는 일이 해외자본의 이름으로 버젓이 자행됐다. 열심히 기사를 썼다. 그러나 인쇄되어 나오는 기사는 자신이 처음 썼던 기사와 자주 달랐다. 가판에 들어간 기사가 시내판(최종판)에서 사라지는 일도 잦았다. 한-미 FTA를 취재하고 쓸 때도 사정은 달라지지 않았다. 하지만 그는 속으로만 삭였다. 기자란 무엇인가를 생각했다.

그러다 청와대를 출입하게 됐다. 노무현 정부 후반이었다. 한-미 FTA나 쇠고기 협상 문제에 있어서, 청와대는 하고 싶은 말만 하고 하고 싶지 않은 말은 정부 부처 소관으로 떠넘겼다. 정권이 바뀌었다. 출입기자들도 많이 바뀌었다. 정권에게 ‘프레스 프렌들리’는 기자와 취재원 사이가 형님-동생, 선배-후배가 되는 걸 뜻하는 것 같았다. 엠바고 요청이 남발되고, 대변인은 자신에 대해 ‘청와대 핵심 관계자’라는 이름의 정치적 의인화를 요구했다. 요구는 대부분 받아들여졌다. 독자와 시청자들은 이런 사실을 알 리 없었다.

대통령의 미국 순방에 동행했다. 대통령이 현지 상공회의소 관계자들과 간담회를 하는 자리에 공동취재 기자로 들어갔다. 대통령은 기쁘게 웃으며 쇠고기 협상 타결 소식을 전했다. 한국에서 발표되기 전이었다. 간담회가 끝나고, 청와대 관계자는 대통령의 쇠고기 관련 발언을 모두 빼도록 요구했다. 기자들이 반발하자, ‘청와대 핵심 관계자’인 대변인이 찾아와 “쇠고기 관련해서 대통령께서 웃으시면서 박수치고 이런 것들을 국민들이 TV를 통해서 보면 기분이 좋겠느냐”며 거듭 빼달라고 요구했다. 요구는 또 받아들여졌다.

귀국했을 때, 한국사회는 서서히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기자로서 심한 자괴감이 들었다. 민심은 촛불로 들끓었다. 국무총리가 민심을 달래기 위한 대국민 담화를 발표한다고 했다. 대통령 회견 때는 기자들이 순번을 정해서 질문을 하지만, 총리 회견 때는 그때 그때 질문이 가능했다. 담화는 전국으로 생중계된다고 했다. 담화문 발표장으로 가면서 그는 결심을 굳혔다. 자로 그은 듯한 삶의 궤적이 꺾이는, 생의 첫 스타카토가 될 거라고까지는 생각지 못했다. 손을 들었다. 마이크가 넘어왔다. 미국에서 있었던 일들을 하나하나 말로 옮겼다. 그 순간 그는 기자였다.

폭탄주가 얼마나 더 돌았을까. 혀가 조금씩 말려들어갈 때, 미디어스의 늙은 기자 신학림과 익명의 외부 필자 산사람이 술자리를 찾았다. 어느 범생이의 기자 생활 이야기는 더 이어지지 못했다. 신학림 기자가 30대 중반의 기자를 격려했다. 잔들이 부딪쳤다. 그의 이름은 김연세. 세는 나이로 서른다섯. 그날(7월 1일)은 그가 생애 첫 직장에 사표를 낸 날이었다. 신학림과 산사람이 먼저 일어나고, 얼마 뒤 우리도 일어났다. 김연세가 말했다. "선배. 한 잔만 더 하고 갑시다." 2차에서는 내가 훨씬 많은 얘기를 했다.

▲ 김연세 <코리아 타임스>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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