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연 배우들은 물론이거니와 비중이 약한 조연 배우들의 입에서조차 허튼 말이 나오는 법이 없다. 대사 몇 마디를 놓치면 이야기의 흐름을 따라잡기가 힘들어진다. 각각의 캐릭터들이 던지는 한 마디 한 마디는 무척이나 복합적이고 함축적이다. 게다가 정갈하고 세련된 맛까지 더해 기품을 느끼게 한다. SBS 월화드라마 ‘황금의 제국’ 이야기다.
빠져들수록 편두통을 일으키게 하는 드라마다. 캐릭터들이 짓는 미소 하나, 동작 하나, 말투 하나에 숨겨진 크고 작은 의미들을 면밀히 살피고, 스토리를 이해하기 위해 그 의미들을 연결시키다 보면 머리가 살짝 지끈거려온다. 허나 막장 드라마가 주는 탁하고 너저분한 통증과는 차원이 다르다. ‘황금의 제국’이 주는 자극은 불쾌함 없는 긴장감이다.
캐릭터들을 극과 극의 상황에 몰아넣어 울분과 전율을 경험하게 만드는 재주는 가히 놀랍다. 아내가 병들어 죽은 날, 최민재(손현주 분)는 자신의 성공을 위해 정유진(진서연 분)과 결혼을 한다. 죽은 아내의 위패를 바라보며 눈시울을 붉히던 그의 귀에 들려오는 정유진의 나지막한 한 마디 ‘보고싶다’. 최민재의 대답 또한 ‘보고싶다’였지만, 그의 눈은 죽은 아내의 사진과 이름에 처연하게 걸려있다. 축복과 애도, 환희와 눈물의 순간을 한 데 묶어 극적인 충격을 극대화시킨 것이다.
한정희(김미숙 분)의 두 얼굴도 뛰어난 극과 극 설정 중 하나다. 성진그룹 사람들 앞에서는 더없이 따사롭고 온화하며 순종적인 여인이었다가, 자신이 낳은 유일한 아들 최성재(이현진 분)와 단둘이 있을 때면 몇 십 년 동안 원한을 가슴에 품고 그 원한을 복수와 야욕으로 채우려는 독종으로 바뀌는 것이 말이다. 그녀가 왜 미소 뒤에 칼을 숨겨 놓고 있는지 그 사연이 밝혀지면서 한정희라는 캐릭터 역시 반전에 반전을 일으킬 주요 인물로 떠오르게 됐다.
어느 드라마든 극과 극의 상황이나 복병의 캐릭터가 숨어있기 마련이다. 이는 ‘황금의 제국’ 에서만 등장하는 것이 아니다. 스릴러, 혹은 추리물의 범주 안에 속해있는 작품들 중에는 이보다 더 뛰어난 설정으로 간담을 서늘하게 하는 경우도 많다. 그런데 그 중에서도 ‘황금의 제국’의 반전은 유난히 멋있는 듯하다. 영화가 아닌 드라마에서도 이런 트릭을 뽐낼 수 있구나! 어제 ‘황금의 제국’에서 보여준 최서윤(이요원 분)의 지략은 이런 감탄을 자아내게 했다.
최서윤은 재건축 사업건으로 장태주(고수 분)과 전쟁을 치르고 있는 중이었다. 최서윤도 장태주도 이번 재건축 사업을 따내지 못하면 엄청난 데미지를 입게 된다. 서로가 목숨을 걸고 달려든 재건축 사업. 관건은 각각이 밀고 있는 조합장 후보 중 누가 조합장으로 당선되는가였다. 공격적인 선거운동 덕택에 장태주가 내세운 조필두(류승수 분)가 승기를 잡자 최서윤은 위기에 몰리기 시작한다.
박진태(최용민 분)와 함께 이런 저런 대안을 모색하다가 결국 그녀는 아버지가 그랬던 것처럼 ‘위태로운 때에는 사람을 사라’는 철칙에 따른다. 장태주의 측근 중에 누군가를 자신의 편으로 끌어들이겠다는 지략이었다. 그 타겟은 바로 윤설희(장신영 분). 꽤 까다롭고 가능성이 희박한 타겟이기는 했지만 최서윤은 일단 그녀를 만나 구워 삶아보기로 작정한다.
여기서도 ‘황금의 제국’은 기품을 잃지 않는다. 사람을 돈으로 매수하는 그저 그런 장면에 멋지고 고급스럽게 포장하는 솜씨를 발휘한다. 최서윤은 장태주를 팔러 나온 윤설희를 예수님을 은닢 30개로 팔았던 가룟 유다로 비유했고, 테이블 위에 놓인 주전자를 알라딘의 램프로 비유하며 ‘돈으로 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이든 다 이루어지게 해주겠노라’하면서 윤설희의 마음을 흔들었다. 적절한 비유로 극적 효과가 증폭된 장면이었으며, 식상할 수 있는 장면이 예리하게 다듬어진 순간이었다.
그런데 ‘황금의 제국’의 트릭은 이것으로 멈추지 않았다. 허를 찌르는 장면은 그 후가 진짜였다. 시청자들에게 최서윤과 윤설희의 딜이 성사되었는지 안 되었는지, 윤설희가 장태주를 배신했는지 안 했는지에 열을 올리게 만들어 놓고는, 또 다른 제 3의 인물을 덜컥 등장시켜 가차 없이 뒤통수를 가격하고 만 것이다. 최서윤이 자신의 편으로 끌어들이려 찔러본 사람은 윤설희, 그리고 조필두의 부하직원, 이렇게 한 명이 아닌 둘이었다.
결국 조필두의 부하가 최서윤이 내민 손을 잡게 된다. 자신과 조필두 밑에서 일했던 많은 부하들이 성진그룹에서 일하는 조건으로, 조필두 당선에 치명적일 수 있는 과거기록을 최서윤에게 모조리 넘기고 만다. 이렇게 해서 장태주와 조필두는 한순간에 무너지게 되고, 최서윤은 장태주에게로 기울어졌던 승리를 더블 타겟이라는 지략을 이용하여 다시 빼앗아버리게 된다.
이런 것을 반전의 묘미라 부른다. 뛰는 놈 위에 나는 놈이 있고, 자신이 파 놓은 구덩이에 도리어 자신이 빠지게 되는 아이러니. 하지만 이번에 최서윤이 보여준 반전은 영화에서나 어울릴 법한 독특하면서도 고급스러운 트릭이었다. 드라마에서는 시도되지 않았던 편집의 승리고 연출의 능력이며 대본의 기발함이다. ‘황금의 제국’은 이 트릭을 아주 적극적으로 사용하고 또한 매력적으로 표현하는 데 성공했다.
반전을 단순히 깜짝 놀래키는 정도로만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허를 찌르는 충격을 통해서 결국 작품의 완성도를 높이는 것으로 발전시킨다. 이것이 ‘황금의 제국’이 여느 드라마와 다른 점이다. 이로써 반전의 차별화가 시작됐고, 반전의 고급화라는 신호탄이 쏘아 올려졌다. ‘나와 함께 황금의 제국으로 들어가자!’ 5회의 마지막 장면에서 최민재가 장태주에게 한 마지막 대사다. 자! 준비되었는가. 이제는 시청자들이 그들과 함께 ‘황금의 제국’이 펼치는 반전의 소용돌이 속으로 빨려 들어갈 차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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