쓰쿠루는 거의 무의식적으로 일어나 테이블 반대편으로 돌아가 가만히 에리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그녀는 아직도 두 손으로 얼굴을 꼭 감싸고 있었다. 손을 대자 그 몸이 가늘게 떨린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눈에는 보이지 않는 떨림이었다.
“있지, 쓰쿠루.” 에리의 목소리가 두 손가락 사이로 새어나왔다. “너한테 한 가지 부탁이 있어.”
“응, 말해 봐.”
“괜찮다면, 나를 안아 주지 않을래?”
쓰쿠루는 에리를 의자에서 일으켜 세워 앞에서 안았다. 한 쌍의 풍만한 유방이 무슨 증거처럼 그의 가슴에 꼭 달라붙었다. 그녀의 따뜻하고 두툼한 손이 등에 닿았다. 부드럽게 젖은 볼이 그의 목덜미에 닿았다.
(<색채가 없는 다자키 쓰쿠루와 그가 순례를 떠난 해> 365p)

▲ 무라카미 하루키 신작 (사진=예스24)
드디어 올 것이 왔다. 365p이라니, 늦어도 너무 늦었다. 불평할 건 없다. 하루키가 즐겨 말하는 대로 “일어나지 않은 일은 일어나지 않은 일이고, 일어난 일은 이미 일어난 일이다.” 그리고 물론, 일어날 일은 일어나는 것이다. 말하자면 남편이 잠깐 자리를 피해준 사이에(언제), 머나먼 핀란드에서(어디서), 이미 다른 남자의 아내가 된 고등학교 동창을(무엇을/누구를), ‘안는’(어떻게) 것과 같은 일들이. “섹스가 산불처럼 공짜였던 시절”(‘비 피하기’)은 이미 지나버렸지만, 그래도 여전히 세상 어딘가에는(이를테면 북유럽의 한적한 시골 별장에는) 공짜 섹스가 남아 있는 것이다. 적어도 무라카미 하루키의 세계에서는. ‘왜’는 없어도 섹스는 언제나 있다.

하지만 그들은 더 이상 진도를 나갈 생각이 없는 것처럼 보인다. 이봐, 사람을 이렇게 기다리게 해놓고 지금… 이라며 항의해도 소용없다. 그들은 어떤 틈도 없이 서로를 꼭 안은 채, 목덜미에 닿는 따스한 숨결과 심장이 새기는 소리를 느끼며, “움직임을 멈춰 버린 무용수들처럼” 과거와 현재, 아마도 미래가 어느 정도 뒤섞인 시간의 흐름에 몸을 실을 뿐이다. 그토록 사랑했던 나오코의 죽음을 (그녀의 요양원 룸메이트이자 열아홉 살 연상인) 레이코와의 섹스로 ‘치유’하던 스무 살의 와타나베는 더는 존재하지 않는다. 한 쌍의 풍만한 유방이 무언가에 대한 증거가 된다면, 바로 그것이다.

물론 이런 대화도 없다.

“으음, 와타나베”라고 그녀는 내 귓가에서 속삭였다.
“거기가 아니야, 거긴 그냥 주름살이라구.”

“이럴 때도 농담밖에 못해요?”하고 나는 어이가 없어 말했다.
(<상실의 시대> 437p)

* * *

▲ 무라카미 하루키 <상실의 시대> (사진=예스24)
하루키의 장편소설은 크게 세 부류로 나눌 수 있다. 먼저 데뷔작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에서 <1973년의 풋볼>, <양을 둘러싼 모험>으로 이어지는 ‘쥐 3부작’(‘쥐’가 등장하는 <댄스, 댄스, 댄스>까지 포함해 초기 4부작)이 있다. 커트 보네거트의 영향을 받은 미국식 포스트모던(<바람>과 <핀볼>) 혹은 레이먼드 챈들러식의 문체와 플롯에 일종의 오컬티즘을 가미한(<양>과 <댄스>) 청춘소설들이다.

다음으로는 <세계의 끝과 하드보일드 원더랜드>와 <태엽감는 새>, <해변의 카프카>와 <1Q84>로 이어지는 ‘하루키 표’ 소설이다. 현실과 환상(무시간적인 가상의 공간), 현재와 과거(환상적인 시공간으로서의 과거), 서로 다른 평행우주 사이를 넘나들며 이야기를 꾸려나가는 대작 지향의 작품들이라고 할까. 실제로 하루키는 10년 단위로 발표한 이 소설들을 통해 초기작을 지배했던 두 미국 작가에게 결별을 선언했고(<세계의 끝>), 평단의 지지를 얻었으며(<태엽>, <카프카>), 자신의 복귀를 화려하게 알렸다(<1Q84>).

마지막으로 <노르웨이의 숲>, <국경의 남쪽, 태양의 서쪽>, <스푸트니크의 연인>으로 이어지는 연애소설이 있다. 그것들을 각각 서른여덟의 ‘나’가 파란만장했던 스무 살 무렵의 연애를 돌아보는 회고담(<노르웨이>), 삼십대의 유부남인 ‘나’가 초등학교 동창을 만나 격정적인 사랑에 빠지는 ‘아이러브스쿨’ 류의 불륜담(<국경>), 자꾸만 사라지는 여자아이를 쫓는 이십대의 ‘나’와 삼십대 후반의 여성이 얽힌 기묘한 삼각관계를 그린 청춘연애담(<스푸트니크>)이라고 해두자. 뭐, 중요한 건 아니지만.

잠깐, 그럼 <어둠의 저편>은? 글쎄, 분명한 건 누구도 그 소설을 신경 쓰진 않을 거라는 사실이다. 그러니 그대로 두도록 하자. 기억의 밑바닥에. 어둠의 저편… 같은 곳에.

신작 <색채가 없는 다자키 쓰쿠루와 그가 순례를 떠난 해>는 연애소설이다. 회고담은 아니다. 불륜담도, 청춘연애담도 아니다. 서른여섯 살의 다자키 쓰쿠루가 서른여덟 살의 기모토 사라를 사랑하는, 말하자면 어른의 연애.

어른의 연애에는 몇 가지 조건이 필요하다. 돈이라거나 돈, 그리고 또 돈 같은 것들. 하지만 그 전에 전제되어야 할 것이 있다. 연애의 당사자 모두가(보통은 둘, 어쩌면 셋, 넷까지는 잘 모르겠다) 어른일 것. 그런데 나이만 먹는다고 어른일까? <색채가 없는 다자키 쓰쿠루와 그가 순례를 떠난 해>는 바로 거기에서 출발한다.

* * *

대학교 2학년 7월부터 다음 해 1월에 걸쳐 거의 죽음만을 생각하며 살았다는 다자키 쓰쿠루는 전형적인 하루키 소설의 주인공처럼 보인다.

십오 년에 걸쳐서 정말로 나는 여러 가지 것들을 버려 왔다. 엔진이 고장난 비행기가 중량을 줄이기 위해서 화물을 내던지고, 좌석을 내던지고, 그리고 마지막에는 가엾은 스튜어드를 내던지듯이, 십오 년간 나는 모든 것을 내던져 왔고, 그 대신에 거의 아무것도 몸에 붙이지 않았다.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김춘미 옮김, 한양출판 펴냄) 15p)

라고 말하던 ‘나’가 나이를 먹었다고 할까. “내가 해야 할 일은 한 가지밖에 없었다. 모든 사물을 너무 심각하게 생각하지 말 것, 모든 사물과 나 사이에 적당한 거리를 둘 것 – 그것뿐이었다”(<노르웨이의 숲>)라고 말하던 ‘나’가 나이를 먹었다고 할까.

쓰쿠루가 꽃다운 청춘을 죽음에 대한 생각으로 보내게 된 것은 고등학교 시절에 어울렸던 친구들 때문이다. 서로를 만나자마자 제각기 “‘나는 지금 올바른 장소에서 올바른 친구를 만났다’고 느꼈”던 그들은, “자신이 네 명을 필요로 하고 다른 네 명 또한 자신을 필요로 한다는 조화로운 어울림의 감각” 속에서 고등학교 시절을 보낸다. 하지만 어느 날 다른 네 명이 쓰쿠루에게 절교를 선언한다. “우리는 앞으로 널 만나고 싶지 않아, 말도 하기 싫어”라며 단호하게, 타협의 여지도 없이 갑작스럽게. 그들은 아무런 설명도 하지 않고, 쓰쿠루 또한 이유를 묻지 않는다.

그러니 성장할 리가 있나. 하루키의 주인공들은 삶의 공허를 알아챌 수 있을 만큼은 영리하고, 그것을 한 발짝 물러서서 관조할 수 있을 만큼은 ‘쿨’하다. 관계 속에서 받는 상처는 불가피하지만, 그것은 순전히 그 자신의 몫이다. 적당히 아파한 후 마음 속 깊은 곳에 묻어버리면 그만이다. 그 일로 인해 그는 예전과 같은 사람은 될 수 없겠지만, 그것은 그것 나름대로 별 수 없는 일이다. 그러니까 수많은 ‘하루키 키드’들이 그런(그렇다고 믿고 있는) 것처럼.

때때로 그들은 잃어버린 것을 찾아 모험을 떠나기도 하지만 그들은 그것이 돌이킬 수 없이 변해버렸다는 사실만을 깨달을 뿐이고, 종종 흔들리고 또 방황하기도 하지만 종국에는 다시금 제자리로 돌아올 뿐이다. 병약하고 창백한 여자친구와 유쾌하고 명랑한 여자친구와 엄마처럼 다정하지만 여전히 아름다운 연상의 여인들의 도움을 통해서. 물론 그 관계 또한 오래 유지되지는 않는데, 전문직에 돈도 있고 단정하며 운동을 즐기고 적당히 다정한데다 나름의 유머감각까지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성장하지 않기 때문이다. (솔직히 성장이 무엇인지는 나도 잘 모르겠지만) 하루키 또한 그 사실을 얼마간 의식하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

물론 각각의 결말에 다다른 그들이 조금쯤 변했을 거라는 추측은 가능하다. 그렇지만 그것은 언제나 모호한 암시(사이토 미나코의 주장에 따르면 ‘억지’)에 그치고 만다.

지금까지의 무라카미 하루키 문학과는 달리, <해변의 카프카>는 주인공이 열다섯 살 소년이다. 다무라 소년도 나카타 씨도 결국은 ‘어린이’ 그것도 ‘망가진 어린이’인 만큼 주위에서 전부 밥상을 차려준다. 여러 사람이 불쑥 나와서 맘대로 이야기를 진행시켜준다는 뜻이다. 결국 다무라 소년은 시코쿠까지 와서도 끝내 성장하지 못한다. 그런데도 소설은 주인공이 성장한 걸로 억지로 마무리 짓는다. 마지막 문장은 다음과 같다.
“이윽고 너는 잠이 든다. 그리고 눈을 떴을 때, 너는 새로운 세계의 일부가 되어 있다.”
(사이토 미나코 지음 <취미는 독서>(김성민 옮김, 한국출판마케팅연구소 펴냄) 247p)

▲ 무라카미 하루키 <해변의 카프카> (사진=예스24)
스스로 채워야 할, 적어도 채우려는 노력은 해야 할 존재의 근원적인 결핍을 ‘기계 장치의 여신’을 통해 해결한다고 해야 하나. 채워지지 않는다면, 그대로 두면 된다. 세상에, 우리고 살고 있는 고도자본주의사회에서 누가 성장 따위를 상관한단 말인가? Let it be, let it be.

하지만 이 친구는 조금 다르다. 비록 첫 네 페이지에 걸쳐 죽음에 대한 뜬구름 잡는 이야기를 늘어놓고 있긴 하지만, 그는 자신의 결핍을 철저하게 의식하는 인물이다. 철도역을 설계하고 관리하는 전문직에 돈도 있고 단정하며 운동을 즐기고 적당히 다정한데다 나름의 유머감각까지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때가 되면 누구에게도 상처 주지 않은 채 자연스레 헤어질 여자들을 만나 ‘건강한 성욕’을 불만 없이 해소해왔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좀처럼 절교 선언의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자신에게는 색채가 없다는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 * *

다자키 쓰쿠르를 제외한 다른 넷에게는 아주 사소하고 우연한 공통점이 있었다. 이름에 색깔이 들어 있었던 것이다. 남자 둘은 성이 아카마쓰(赤松)와 오우미(靑海)이고 여자 둘은 성이 시라네(白根)와 구로노(黑埜)였다. 다자키만이 색깔과 인연이 없었다. 물론 이름에 색깔이 있건 없건 그 사람의 인격과는 아무런 상관도 없다. 그건 잘 안다. 그러나 그는 그것을 애석하게 생각했고, 스스로도 놀란 일이지만 꽤 상처를 받기도 했다. 다른 넷은 당연한 것처럼 곧바로 서로를 색깔로 부르게 되었다. ‘아카(赤)’ ‘아오(靑)’ ‘시로(白)’ ‘구로(黑)’라고. 그는 그냥 그대로 ‘쓰쿠루’라 불렸다. 만일 내게도 색깔이 있는 이름이 있었더라면 얼마나 좋을까. 그는 수도 없이 진지하게 그런 생각을 하곤 했다. 그랬더라면 모든 것이 완벽했을 텐데, 하고. (14쪽)

지금까지 하루키의 주인공들은 자신들을 그저 평범한 사람이라고 생각하는(그래서 여자친구들이 “넌 역시 좀 이상해” 같은 말을 하면 깜짝 놀라고 마는) 인물, 다만 자신에게 무언가 근본적으로 잘못된 부분이 있지는 않을까 홀로 생각하며 그래도 별 수 없다고 체념하는 인물이었다. 하지만 쓰쿠루에게는 열등감이 있다. 색채가 없다는, 단순히 이름뿐 아니라 색채도 개성도 없이 그저 배경처럼 존재하는 건 아닐까, 하는 열등감이다.

그런 그에게 (세 번째 만났을 때 섹스를 했고 이제 고작 네 번째 데이트를 하고 있는) 연상의 연인 사라가 묻는다. “진상을 알고 싶었던 마음도 없었던 거야?” 쓰쿠루는 말한다.

“원인을 따지고 들면 거기서 어떤 사실이 드러날지, 그것을 두 눈으로 확인하는 것이 두려웠던 거였겠지. 진상이야 어떤 것이든 그게 나를 구해주리라는 생각은 안 들었어. 왜 그랬는지 이유는 모르겠지만, 확신 비슷한 것이 있었어.” (49p)

짝짝짝. 적어도 그는 무엇이 문제인지는 알고 있었던 모양이다. 한 인간으로서는 작은 발걸음이지만 하루키의 세상에서는 위대한 도약이다. 현명한 연상의 여인 사라는 그에게 과거와 대면할 것을 요구한다. 그에게는 뭐라고 설명할 순 없지만 마음의 문제가 있다고, 그와 쓰쿠루 사이에 정체 모를 무엇이 있다고, 그러니까 그것부터 해결하고 오라고. 그녀는 쓰쿠루의 지난 연애에 대해서도 완벽한 진단을 내린다. 바로 이렇게.

“그러니까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늘 상대하고 적당한 거리를 두려고 했어. 또는 적당히 거리를 둘 수 있는 여자를 골랐어. 상처를 입지 않아도 되게끔. 그런 거지?” (133p)

빙고. 그리하여 쓰쿠루는 옛 친구들을 만나 잃어버린 과거를 확인하기 위한 순례를 떠나게 되니, 그것이 바로 <색채 없는 다자키 쓰쿠루와 그가 순례를 떠난 해>라는 장황한 제목의 의미다. 참으로 정직한 제목이 아닐 수 없다.

<색채 없는 다자키 쓰쿠루와 옛 친구들의 강제 동창회>라는 쪽이 조금 더 정확하겠지만.

* * *

▲ 무라카미 하루키 <1Q84> (사진=예스24)
다소 밋밋할 수 있는 동창회 이야기를 한 권의 소설로 완성하기 위해 하루키는 여러 소설적 장치를 준비한다. 대학 시절의 유일한 친구였던, 그러나 역시 알 수 없는 이유로 그를 떠난 하이다와 그가 들려주는 기묘한 이야기가 있고 과거에 얽힌 오컬트적인, 그리고 다분히 사춘기적인 심상으로 가득한 미스터리가 있다. 그것은 <양을 둘러싼 모험>에서 그랬던 것처럼 탐색의 플롯을 통해 파헤쳐진다. 자동차 대리점에서 일하는 아오를 통해 렉서스의 훌륭함을 선전하기도 하고(그러고 보니 <1Q84>에는 도요타의 음향 시스템을 칭찬하는 택시 기사가 등장한다. 혹시 PPL?), 자기계발 구루가 된 아카를 통해 자본주의에 대한 약간의 고찰(80년대의 하루키를 그토록 매력적으로 보이게 했던)을 늘어놓기도 한다. 전작 <1Q84>의 ‘리틀 피플’을 연상시키는 ‘나쁜 난쟁이들’이라는 단어가 난데없이 등장하기도 한다. 명절이 지난 후 제사 음식을 모아 끊인 탕국처럼, 하루키 월드의 총화인 셈이다.

하지만 가장 주목해야할 것은 네 친구와 영문 모를 결별 선언으로 구성된 과거와 쓰쿠루가 처음으로 진지한 만남을 꿈꾸는 사라가 있는 현재를 분리한 부분이다. 쓰쿠루는 (다른 하루키의 주인공들이 그런 것처럼) 내면의 문제를 안고 있는 인물이다. 사라는 그가 과거와 대면하도록 내몰지만, 그뿐이다. 그녀는 그의 과거를 치유해줄 수 없고, 과거가 해결된다고 해서 그녀가 쓰쿠루의 것이 되는 것도 아니다(여기에는 복잡하고 또 뻔한 사정이 있다). 그는 과거와 대면해야 하고, 그 속에서 무언가를 배우고 성장해서, 그녀에게 그것을 증명해야만 하는 것이다. 배움과 성장, 그리고 증명이라고? 분명 하루키에게 어울리는 단어는 아니다. 하지만 바로 그것이 노년의 하루키가 자신의 주인공을 통해 우리에게 하고 있는 이야기다.

내 인생은 스무 살 시점에서 실질적으로 발걸음을 멈춰버린 것 같다고 다자키 쓰쿠루는 신주쿠 역의 벤치에 앉아 생각했다. 그 이후 찾아온 나날들은 거의 무게가 없었다. 시간은 잔잔한 바람처럼 그의 주위를 조용히 불어 지나갔다. 상처도 남기지 않고 슬픔도 남기지 않고 강렬한 감정을 불러일으키지도 않고 이렇다 할 기쁨도 추억도 남기지 않고. 그리고 이제 그는 중년의 영역으로 접어들려 했다. 아니, 중년이 되기까지는 아직 조금 시간이 있다. 그러나 적어도 더는 젊다고 말할 수 있다. (422p)

한 마디로, 하루키의 주인공들 역시 영원한 청춘은 아니다. 독자들이 나이를 먹는 것만큼(실은 그보다 훨씬 더디긴 하지만) 그들 또한 나이를 먹는다. 실제로 쓰쿠루는 하루키의 남자 주인공들 중 최초로 발기 부전(!)을 겪는다. 비록 단 한 번뿐이지만. 친절하게도 여자와 헤어져 홀로 남은 상황이 되자 눈치도 없이 세차게 발기했다고 부연하긴 하지만. 하루키의 의도는 분명하다. 더 이상 페니스는 ‘당신의 레종 데트르(raison d'être)가 될 수 없으니(야, 그땐 너도 나도 어렸잖아) 다른 것을 찾아라. 설령 그것이 젊은 날의 페니스에 맞먹을 정도로 우스꽝스러운 무엇이라 할지라도 상관없다. 우리 모두에게는 계란이 필요한 법이니까.

그런 의미에서 <색채가 없는 다자키 쓰쿠루와 그가 순례를 떠난 해>는 하루키의 오랜 팬들에게 들려주는 노작가의 때늦은 충고처럼 들린다. 언젠가 안노 히데아키가 [에반게리온] 오타쿠들을 향해 일갈을 가했던 것처럼, 그러나 조금 부드러운 방식으로. 자신이 만들어낸 ‘하루키 키드’에게 행하는 일종의 애프터서비스라고 할까. 혹은 이렇게 말하는 게 어떨까. 하루키가 직접 자신의 아이들을 불러 모은 동창회라고. 결국엔 같은 말이다.

분명한 사실은 “모든 사물을 너무 심각하게 생각하지 말 것, 모든 사물과 나 사이에 적당한 거리를 둘 것”이 청춘의 정언명령이던 시절은 지났다는 거다. 설령 그것이 여전히 유효할지라도, ‘하루키 키드’들은 더는 청춘이 아니다. 네 친구들을 소개할 때 그들 아버지의 직업을 함께 말하고 있는 점이나 결말 직전에 쓰쿠루가 아버지에 대한 회상을 하는 장면 또한 다분히 의도적이다. 아버지에게 반항할 나이는 지났다는 것이다. 실은 스스로 아버지가 되고도 남을 시간이라는 말이기도 할 것이다(이것은 내 의견이 아님을 밝혀둔다).

하지만 과연 그것으로 충분한가? 과연 순례의 끝에서 쓰쿠루는 많은 것을 느끼고, 화해하고, 치유되었고, 깨달았지만, 그게 전부인가? 글쎄, 그건 읽는 이들이 판단할 몫이다. 사실 나는 잘 모르겠다. 그저 참으로 영악한 영감님이라는 생각 밖에는.

혹시라도 이 책을 끝까지 읽은 당신 또한 나와 마찬가지라면 그의 단편 ‘벌꿀 파이’를 읽을 것을 권한다. 하루키의 모든 소설 중에서 가장 감동적인 성장의 선언이 그곳에 있다.

이제까지와는 다른 소설을 쓰자고 쥰페이는 생각한다. 날이 새어 주위가 밝아지고, 그 빛 가운데서 사랑하는 사람들을 꼬옥 껴안고, 누군가가 꿈꾸며 애타게 기다리고 있는 것 같은 그런 소설을. 하지만 지금은 우선 여기에 머물러 있으면서 두 여자를 지키지 않으면 안 된다. 상대가 누구든, 정체 모를 상자 속에 처넣어지게 해선 안 된다. 설사 하늘이 무너져 내린다고 해도, 대지(大地)가 소리를 내며 갈라진다고 해도.
(<신의 아이들은 모두 춤춘다> 212p)

금정연

이런저런 매체에 책에 관한 글(90%)과 책에 관한 글이 아닌 글(10%)을 납품하는 소규모 자영업자이자 LG 트윈스 팬.
지은 책으로 <서서비행>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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