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소설 '블라인드 사이트' 번역본 표지

지금도 후회하고 있다. 왜 이 책을 소개한다고 했을까. 하드SF 소설을 소개하기에는 스스로의 성향과 배경지식이 턱없다는 것을 통감하면서도 감히 이 소설 <블라인드 사이트>를 선택한 이유는 다음과 같다. 첫 번째는 최근에 가장 흥미롭게 읽은 책이고, 두 번째는 하드SF를 읽기에 더 준비된 독자지만 이 책의 존재를 아직 모르는 독자들이 더 많이 읽어 주기를 바라는 마음이 있기 때문이다. 낯선 단어와 개념들에 의해 만신창이가 된 기분이지만, 이책을 수월히 읽어낼 수 있는 어떤 독자에게 “함부로 얕볼 상대가 아닙니다. 무척 강합니다”라고 앓으면서 보고하는 심정으로, 스스로 이해한 범위 내에서 왜 이 책이 흥미로웠는가를 전달하고자 노력하려 한다.

개인적인 독서 경험에 근거해 보면 SF/판타지 장르 소설은 요즘 들어 과거 어떤 시점에 비해서는 상대적으로 친근한 장르가 되었다. 특히 과거의 고전 걸작에 비해 최근에 쓰여진 소설이 더욱 그렇다. SF/판타지 소설이 묘사하는 장면이나 개념들이 너무 생소하여 쉽게 머릿속에서 떠올려내기 힘든 시절이 있었는데 이제는 SF/판타지 영화와 드라마가 제시하는 시각적 정보를 재료삼아 SF/판타지 소설 속 장면과 개념을 머릿속에서 재구성해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블라인드 사이트>가 무척 어려운 하드SF소설이라는 소문을 처음에는 무시했다. SF장르에 익숙하지 않은 독자들에겐 진입장벽이 좀 있는 모양이지만 스스로 SF에 아주 낯선 독자는 아니라고 자부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결과는 앞서 이야기한 대로 하드SF 소설을 소개하기에는 스스로의 성향과 배경지식이 턱없다는 것을 통감한 것으로 마무리 되었다.

길어질 것 같은 우는 소리는 이쯤 하고. 전체 줄거리를 거칠게 압축하면 이렇다. 어느 날, 정확히는 2082년 2월 13일, 지구에 외계인의 인공위성으로 추측되는 수천 개의 발광체들이 등장한다. 지구인들이 개똥벌레(Fireflies)라고 부르는 이것들은 지구의 통신위성들을 전멸시키고 지구의 방방곳곳을 속속들이 사진을 찍고 사라진다. 지구인들이 이 사건에 경악한 가운데 과학자들은 이 개똥벌레들의 근원지를 추적해내는 데 성공한다.

그곳은 바로 카이퍼 벨트(태양계의 해왕성 궤도(태양으로부터 약 30 AU)보다 바깥쪽의 황도면 부근에 있는, 천체가 밀집한, 구멍이 뚫린 원반형의 영역). 우선 인류는 무인탐사체를 보내지만 만족할 만한 결과를 얻지 못한다. 그래서 인류는 유인탐사체를 보낸다. 태양에너지를 전송받아 움직이는 우주선 테세우스는 1800일간의 긴 항해 끝에 개똥벌레를 보내온 외계인의 우주선 로르샤흐(Rorschach)와 태양계 외곽의 오르트 성운에서 조우한다.

-우주선 테세우스의 승무원들

1800일, 5년 동안의 긴 항해를 동면으로 견뎌내고 인류 최초로 외계인과 조우하게 될 테세우스 승무원들의 면모는 외계인만큼이나 이 소설의 강력한 소재다. 이들은 현재 우리 주변에서 보기 힘든 미래의 신인류들이다. 어린 시절 간질발작 때문에 “좌뇌와 우뇌의 연결을 끊고 반쪽 뇌로만 살아가는 시술”을 받아 인간성 일부를 상실한 뒤 ‘종합가’가 된 주인공(이자 소설상 화자 역할을 하는) 시리 키튼을 비롯해 뇌에 삽입한 기계장치를 통해 여러 기계손들을 진짜 자신의 손처럼 다루는 생물학자이자 외과의사 아이작 스핀델, 네 명의 인격이 한 몸에 공존하는 언어학자 “사인방(The Gang are four)” 수전 제임스 외 세 명, 우주선 테세우스에서 조립해내는 로봇병사들을 지휘하는 전투 전문가인 어맨더 베이츠 그리고 이들의 지휘자로 현생인류가 되살려 낸 고대인류인 흡혈귀(vampire) 주카 사스라티가 그들이다.

테세우스 호에는 이들 다섯 명 외에도 네 명이 더 동면 중이다. 주카를 제외한 네 명의 백업들로 누군가 사망하면 그 자리를 대체할 인력들이다. 그리고 테세우스 호 자체의 인공지능 “선장(Captain)”이 있다. 이들 모두 외계인과의 조우를 상정한 인력이다. “사인방” 수전 제임스는 외계인과의 소통을 맡고 어맨더는 전투, 아이작은 외계인의 신체적 특징 파악이나 생포 시 해부를 담당하는 셈이다. 주카는 이들을 지휘하고 시리는 이들의 활동을 인간적인 개입을 배제하고(인간성이 결여되었으니까) 객관적으로 관찰 기록한다.

나름 SF소설/영화를 챙겨보았다는 생각은 이 테세우스 승무원들 앞에서 산산조각이 났다. 이들에 대한 <블라인드 사이트>의 묘사는 외계인만큼이나 낯설었던 것이다. 가령 네명의 인격이 공존하는 수전 제임스의 경우, 현대의학에서는 ‘해리성 정체감 장애’(解離性 正體感 障碍, Dissociative Identity Disorder)라고 불리는 자신의 다중인격은 이제 장애가 아니라고 단언한다.

-다중지각복합체

수전은 관자놀이를 두드렸다. “여긴 자리가 아주 많아. 현대식 두뇌는 지각을 열 개 정도 운영해도 남는 자리가 있지. 게다가 지각을 동시에 여러 개 작동시키면 생존이라는 면에서 아주 유리해.” 202p

“요즘과 같은 식은 아니었어. 그때의 사람들은 엄청나게 야만적이었거든. 그런 현상을 장애라고 불렀지. 질병처럼 취급한 거야. 치료법이랍시고 생각한 게 여러 지각 중에 하나만 남겨두고 나머지를 죽이는 식이었어. 물론 살인이라고 부르지는 않았지. 자아통합이라든가 그런 헛소리를 했을 거야. 그땐 그랬어. 온갖 학대와 고문을 집어 삼킬 인격을 만들었다가 더 이상 필요가 없으면 제거해버렸지.” 203p

수전의 말에 따르면 그렇다. <블라인드 사이트> 속의 요즘인 2082년에는 다중인격이 더 이상 장애가 아닌 것이다. 그래서 수전의 몸을 공유하는 미셸, 샤샤 그리고 한 남자는 서로를 ‘다른 자아’(alter ego)라고 부르지 않고 남이 그렇게 부르는 것에도 격렬히 반대한다. 다중인격을 장애 취급하던 시절의 용어라는 이유로.

‘다른 자아’라는 말은 1백 년이 넘도록 앙금이 남아 있는 용어였다. ‘교감’을 검색해보니 그랬다. ‘다중지각복합체’를 ‘다중인격장애’라고 부르던 시절이 있었다. 복합체가 아니라 장애였다는 얘기다. 당시의 전문가들에 따르면 다중 인격은 상상하기 힘든 학대의 가마솥 속에서 자발적으로 탄생한다. 부분적인 인격이 생겨나서 성폭력과 구타를 받아내는 동안 진짜 어린애는 뇌주름 사이에 있는 미지의 성역에 숨는 것이다. 생존 전략인 동시에 자신을 희생하는 의식이었다. 힘없는 영혼이 스스로를 파헤쳐 조각내고는, 어머니나 아버지라는 이름의 복수의 신이 아직도 만족하지 못했기를 간절하게 희망하면서 덜덜 떨고 있는 자기 자신의 일부를 바쳤다는 것이다. 204p

다중인격이 ‘다중인격장애’ 혹은 ‘해리성 정체감 장애’로 지칭되는 2013년에 2082년의 ‘다중지각복합체’는 정말 낯선 개념이다. 하지만 <블라인드 사이트>의 2082년에는 다중인격이 치료해야할 장애가 아니라 하나의 현상이자 외계인과의 소통을 기대할 수 있는 유용한 능력이다. 이 분야에 어떤 배경지식도 갖고 있지 않은 입장에서는 해양생물학자라는 작가의 배경을 일단 신뢰하고 “그래, 이 소설은 ‘다중지각복합체’를 일단 받아들여야 읽어나갈 수 있는 거야”라고 스스로를 납득시키는 수밖에 없다. ‘다중지각복합체’인 “사인방”과 시리가 나누는 대화. 그리고 시리가 풀어내는 ‘다중지각 복합체’에 대한 ‘썰’이 상당히 그럴 듯하다.

그리고 그 ‘썰’의 재료들로 사용된 여러 연구내용이 담긴 저서와 논문들이 작품 뒤에 붙은 부록인 “부연 설명 및 참고 문헌”에 503페이지부터 528페이지에 걸쳐 총 133건 언급되어있다. “이 소설에서 묘사한 정신병증과 증후군과 환각은 거의 대부분 실재하는 것이다”라니 반박은 커녕 의문을 제기할 여유가 없다. 이런 참고 문헌의 향연은 작품이 다루는 다른 분야에도 동일하게 적용된다.

-흡혈귀

무인전투로봇 지휘자 어맨더와 외부의 기계팔을 뇌신경접합을 통해 자신의 실제 팔처럼 다루는 외과의 아이작은 다른 SF 작품에서도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는 미래 인류 캐릭터지만 원활한 독서를 가로막는 또 다른 관문은 흡혈귀 주카 사스라티와 종합가 시리 키튼이다. 우선 흡혈귀부터 처리하자. 흡혈귀라니. 하드SF 소설에 흡혈귀라니. 스테파니 메이어의 소설을 원작으로 한 영화 <트와일라잇>이 떠오른다. 하지만 해양생물학자이자 하드SF 소설가답게 피터 와츠는 2082년의 미래에 흡혈귀를 반박할 수 없는 존재로 덜컥 끼워 넣는다.

부록인 “부연 설명 및 참고 문헌”의 “흡혈귀 생물학 개요”(503~505p)에 의하면 “호모 사피엔스 뱀피리스는 단명한 인간 변종이다. 이 변종은 지금으로부터 70만년 전경에 선조에게서 분화했다. 이들은 네안데르탄인이나 사피엔스보다 더 가냘펐지만 그런 차이점은 상대적으로 사소할 따름이다. 하지만 생화학, 신경학, 면역학의 시각에서 보자면 뱀피리스 변종은 사피엔스와 근본적으로 다르다. 예를 들자면 흡혈귀는 광우병에 대한 저항력이 훨씬 높다(식인 습관이 있으면 광우병 감염에 노출될 확률이 높다).”

피터 와츠의 전공에 기반한 상상력은 초자연적인 존재인 흡혈귀를 우리 인간을 먹잇감으로 삼았다가 역사시대 이전에 멸종한 인류의 아종(亞種)으로 되살린다. 그리고 우리가 브램 스토커의 소설을 비롯한 여러 소설/영화에서 학습한 흡혈귀의 여러 특징을 여러 생물학적 근거를 동원하여 변종 인류의 특징으로 탈바꿈시켰다. 오랜 시간 관 속에서 잠들어 있다가 다시 깨어나는 특징은 아래처럼 설명된다.

흡혈귀는 이렇게 중요한 단백질을 스스로 합성할 수 없기 때문에 음식에서 보충해야 했다. 따라서 흡혈귀의 식단에서 인간 먹잇감을 빼놓을 수가 없었다. 그리고 인간은 비교적 번식률이 낮았다. 일반적으로 이런 형태의 역학관계는 유지될 수 없다. 흡혈귀는 인간이 멸종할 때까지 약탈했을 테고, 필수 영양소가 부족해서 사라져갔을 것이다. 그에 대한 대처 방법으로 폐어와 유사한 휴지 기간이(흔히 '가사(假死)' 상태라고 부른다) 생겼으며 기간도 늘어났다. 흡혈귀의 에너지 수요를 줄이기 위한 방법이었다. 흡혈귀는 내생적 알라-D류 엔케팔린과(포유류에게 동면을 유도하는 펩티드를 말한다) 도부타민의 수준을 상승시켰다. 그 결과 활동하지 않는 기간 동안에 심근의 강도가 늘어났다. 503p

십자가를 두려워하는 흡혈귀의 특징 역시 설명이 된다. (알아들을 수 없어 유감이지만)

유해한 효과는 그뿐이 아니었다. 이른바 '십자가 결함'이 있었다. 보통 때는 분리되어 있던 시각령 내 수용체 배열이 교차하는 현상이다. 그 결과 해당 수용체 배열이 일정 수준 이상의 큰 시야 범위 안에서 수평 자극과 수직 자극을 동시에 감지하면 대발작과 같은 반응이 반드시 일어난다. 자연적인 환경에는 직각이 거의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자연 선택은 특정 시기 H가 도래할 때까지 그 결함을 배제하지 않았다. 사피엔스 사피엔스는 유클리드 기하학에 기반을 둔 건축 기술을 개발했다. 흡혈귀는 유전적 부동을 통해 그런 특성을 고쳐나갔다. 그리고 어느 순간부터 갑자기 먹잇감과 접촉하기를 거부했다. 역사 시대가 밝아오자 흡혈귀 변종 전체가 금세 멸종했다.

거칠게 요약하자면, 과거 인간을 잡아먹던 흡혈귀들은 똑똑해진 인간이 직각이 가득한 네모반듯한 건물들을 짓기 시작하자 특유의 신체적 결함 때문에 건물의 직각을 보고 발작을 일으켰고 인간 잡아먹기를 멀리하다가 굶어죽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처럼 멸종되는 게 잘 되었다 싶은 고대의 변종 인류를 미래의 인류는 유전학 기술을 통해 되살려내었다. 왜 되살려내었을까?

작품 속에서 흡혈귀 전문가이자 주인공의 친구인 로버트가 언급되는 흡혈귀의 장점은 이렇다. “인간이 신경학적인 제약 때문에 못하는 일”을 할 수 있고 인간은 “단계를 밟아야 가능한 일을 걔네는 그냥 봐”버린다는 것, 이를테면 “표준형 인간은 아무리 노력한다고 해도 1과 10억 사이에 있는 소수를 앉은 자리에서 모조리 말할 수 없어. 옛날에는 몇몇 자폐증 환자들만 그럴 수 있었지.” 흡혈귀들에게는 이것이 기본이라는 것이다. 또 이들은 말하면서 과거시제를 절대 쓰지 않는데 그 이유는 “과거시제를 경험하지 않으니까. 흡혈귀에게 과거란 건 그냥 또 다른 분기인거야. 기억하는 게 아니라 다시 한번 사는 거지.”(73p)

인간에게 위협이 되는 식인이란 특성만 통제한다면 이들 흡혈귀들은 탁월한 지능을 갖춘 동시에 인간 특유의 감정에 휘둘리지 않는, 그야말로 살아있는 컴퓨터로써 유용한 인적자원이 될 수 있다. 전쟁에서는 희생자에 대한 양심의 가책 없이 승리를 위해 전략을 수립하는 탁월한 전략가가 될 수 있을 것이고 주식투자에서는 곡선에 일희일비 흔들림없이 투자하는 전문 투자자도 될 수 있을 것이다. 경영에서도 마찬가지. 상상할수록 용처가 무궁무진해진다. 게다가 흡혈귀 특유의 가사상태는 우주여행에도 꽤 도움이 될 것이다. 그래서 인류는 이 멸종한 고대 인류를 부활시켰다.

부활한 흡혈귀 중 한 명인 주카 사스라티는 다른 테세우스 승무원들을 신경학적 제약을 갖춘 열등한 인류 취급을 하면서 쉽게 이해하기 힘든 명령들을 벌컥벌컥 내린다. 명령의 이유를 요구하면 ‘너희 인간들은 〇〇이 안된다. 〇〇이 아니다. 〇〇을 모른다’는 이유로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 그렇다고 다른 승무원들도 주카에게 명령의 이유를 더 따져묻지도 않는다. 어떤 목표를 성취하기 위해서는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왜’라는 질문을 할 필요도 없이 ‘그냥 아는’ 천재이자 압도적인 신체적 능력으로 인간을 주식으로 삼던 식인종이기 때문이다.

다른 승무원들은 비록 주카 뒤에서 ‘말을 서너 살 먹은 아이처럼 한다’고 뒷담화를 할지언정 직급상으로나 업무 처리 면에서나 그리고 먹이사슬에서 우주선 내 최상위에 있는 주카의 명령에 복종할 수밖에 없다. 주카 역시 하등 종족인 인간 승무원들을 그야말로 체스판의 체스말처럼 다룰 뿐이다. “나는 너희들의 인간적 면모에는 전혀 관심이 없다. 그저 외계인과의 접촉을 성공적으로 수행하기 위한 명령을 내릴 뿐”이란 말조차 하지 않는다. 인간 승무원들은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 마련된 도구일 뿐이다.

테세우스의 다른 승무원들이 이런 흡혈귀 리더를 받아들이는 이유는 무엇일까. 비록 자신을 언제든지 자살에 가까운 임무에 투입시켜 희생양으로 삼을 수 있을지언정 의사결정에 있어 정밀하고 탁월하기 때문만은 아니다. 인류 최초인 외계인과의 조우 임무가 승무원 각자의 이해관계에 부합하기 때문이다. 다른 승무원들 입장으로 보면 주카 역시 자신의 목적을 위한 도구인 셈이다. 그리고 이런 흡혈귀 리더 주카 대 인간 승무원들(신체 일부를 기계로 대체하거나 한 변종들이지만)의 구도에서 한발자국 떨어져 있는 또 다른 인간 승무원(이자 주인공이자 소설상 화자 역할을 하는) 시리 키튼이 있다.

▲ 소설 '블라인드 사이트' 원서 표지
-종합가

시리 키튼은 ‘종합가’(Synthesis)이다. ‘정보 위상수학자’(Information Topologist)라고도 불린다. 너무나 생경한 용어들이라 한숨이 나온다. 다행히 ‘옮긴이의 말’(529~538p)에 도움이 되는 해설이 있다. 종합가란 “관찰과 보고를 전문으로 하는 이”다. 관찰을 통해 얻은 정보를 종합한다고 해서 종합가인 셈이다. 그런데 관찰과 보고를 지극히 객관적으로 하기 위해 종합가는 “관찰 대상에게 개입하거나 영향을 미치면 안 된다”. 관찰 대상에 대한 감정이입이나 공감도 절대 금물이다.

어린 시절 간질발작 때문에 “좌뇌와 우뇌의 연결을 끊고 반쪽 뇌로만 살아가는 시술”을 받아 인간성 일부를 상실한 시리는 타인에 대한 공감능력이 상당부분 결여되어있다. 그래서 시리는 주카를 비롯한 승무원들을 관찰하는 종합가로서 테세우스에 승선한다. 테세우스와 외계구조물 로르샤흐의 조우과정 전체를 관찰하고 보고하기 위해서. 그의 관찰력은 시리의 진술만 보자면 주카도 어느 정도 인정하고 있다.

기본형 인간 중에 흡혈귀와 눈을 마주치고도 마음이 편한 사람은 별로 없었다. 주카는 예의가 바르고, 바로 그 이유 때문에 타인과 눈을 마주치지 않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주카라는 인물을 형성하는 위상에는 또 다른 면이 있다. 위상면(topology)만 있다면, 나는 포유동물의 속내를 읽듯이 어떤 존재의 속내라도 읽을 수 있었다. 주카가 일부러 공공장소를 피하는 거라면 나 때문인지도 모른다. 20p

‘위상면’이라는 용어 역시 ‘옮긴이의 말’에 따르면 겁먹을 필요가 없다. “얼핏 어려워 보이지만 실제로는 손짓, 발짓, 무의식적인 표정, 눈짓 등을 가리키는 말이다.” 입으로 내뱉는 발언과 신체언어를 관찰하고 종합하는 ‘종합가’ 시리 키튼은 스스로를 “프로파일링 전문가와 증명 도우미와 정보이론 전문가를 섞어놓은 잡종”이라고 정의한다. 그리고 이런 종합가에 대한 다른 승무원들의 감정은 꽤 복잡하다.

자신들을 관찰하고 보고하기 위한 존재라니. 인간 CCTV인 셈인데, 그래서 시리는 동료들 사이에서 왕따 비슷한 경계의 대상이 되어 ‘위원장’(comissar)이라는 비아냥 섞인 별명으로 불린다. comissar는 구소련군 그리고 현재 북한군에서 에서도 사병과 장교의 행동 ·사상을 감시·지도하는 ‘정치장교’(政治將校)다. 영화 <에너미 앳더 게이트>에서 주인공 저격수 바실리 자이체프(주드 로)를 독려하면서도 관찰·감시하던 장교 다닐로프(조셉 파인즈)가 바로 정치장교다.

이렇게 인간성과 공감능력을 상실하여 스스로 탁월한 종합가라 자부하는 주장하는 시리의 입을 통해 우주선 테세우스와 외계구조체 로르샤흐의 조우 과정이 펼쳐진다. 그 가운데 시리는 수시로 지구에서의 개인적인 과거사를 술회한다. 주로 자신의 비참한 유년시절과 가족사, 실패한 연애 등이다. 그의 이야기들은 2082년의 미래사회를 짐작케 하는 여러 힌트를 준다. 그리고 그 이야기 속에서 시리 스스로 규정한 자신의 모습과는 또 다른 면모가 드러난다. 특히 시리의 어린 시절부터 친구이자 유일한 친구인 로버트와의 대화는 그 또 다른 면모에 대해 많은 것을 시사한다.

"시리, 너 인마. 인간은 합리적이지 않아. 너도 그렇고. 우리는 생각하는 기계가 아니야. 우리는.... 기본적으로 느끼는 기계야. 생각은 어쩌다가 하지." 로버트는 숨을 쉰 다음 덧붙였다. "너도 이미 알고 있는 사실이야. 안 그러면 일을 못할 테니까. 아니면....." 로버트는 얼굴을 찡그렸다. "시스템은 그 사실을 알고 있지." 315p

"난 그냥 관찰할 뿐이야. 사람들이 뭘 하는지 보고 어떻게 그럴 수 있는지 상상하는 거지."

"내가 보기엔 그게 감정이입 같은데."

"아냐. 감정이입은 다른 사람들이 어떻게 느끼는지 상상하는 게 아냐. 내가 그런 상황에 처했다면 어떤 기분일지 상상하는 거지."

로버트가 인상을 찡그렸다. "그래서?"

"자신이 어떤 기분일지 모른다면?"

로버트가 나를 쳐다보았다. 그의 위상면은 진지했고 완전히 투명했다. "넌 그런 인간은 아냐. 항상 그렇게 행동히자는 않을 거야. 난..... 알아. 네가 예전에 어땠는지 안다고." 317~318p

-외계인

외계인만큼이나 낯선 미래인류인 테세우스 승무원들은 1.8X10(10승)킬로그램의 질량에 총 부피 2.3X10(8승)세제곱미터, 전파와 플라주 효과로 보건데 태양보다 수천 배 강한 자기장을 두른 거대한 외계구조체와 태양계 외곽에서 조우한다.

우선 “사인방” 수전에 의한 의사소통 시도가 진행되고 모호한 결과 속에서 주카의 명령에 의해 로르샤흐 안으로의 직접 진입이 시도된다. 이미 태양보다 수천 배 강한 자기장 안에서 무인 관측 장치들이 뚜렷한 한계를 드러내기에 인간 관측자가 들어가야만 하는 것이다. 지휘자 주카를 제외한 승무원들은 테세우스 안에서 조립한 로봇 병사들과 함께 로르샤흐 안으로 진입한다. 로르샤흐는 인간의 신경과 뇌의 취약함을 파악하여 승무원들을 압박한다. 가령 인간의 시각이 가진 취약점인 맹점(Blind Spot)을 이용해 눈에 띄지 않고 접근해온다. 기계는 감지하지만 사람은 눈으로 볼 수 없는 외계인이 접근해온다고 생각해보라.

"너희 종족의 시야 한가운데는 맹점이 있다." 주카가 지적했다. "너희는 그걸 볼 수 없다. 너희는 시간에 따라 흐르는 시각 속에서 정지 영상을 볼 수 없다. 너희가 알고 있는 약점은 그 두 가지뿐이다. 하지만 훨씬 더 많이 있다."

생물학자가 고개를 끄덕였다. "어쨌든 내 얘기의 요점은 그거예요. 로르샤흐라면...."

"사례 연구를 하자는 게 아니다. 두뇌는 생존을 위한 도구지. 거짓말 탐지기가 아니다. 자신을 기만해서 적응력이 높아진다면 두뇌는 거짓말을 한다. 관계없는 것들을 무시한다. 진실은 전혀 중요하지 않다. 적응력만이 문제다. 너희는 지금까지 세상을 있는 그대로 경험한 적이 없다. 경험이란 가상에 근거해서 조립한 시뮬레이션이다. 지름길이고 거짓말이다. 모든 종족은 기본적으로 인지불능 상태다. 로르샤흐가 가한 조작은 너희가 스스로에게 해온 것과 전혀 다르지 않다." 393~394p

또, 로르샤흐는 강력한 자기장을 동원하여 테세우스 승무원들의 뇌를 통제한다. 그 결과 승무원들은 “자신이 죽었거나, 존재하지 않거나, 부패 중이거나, 혈액 전체 또는 중요 내부 장기 (예를 들어 심장)를 잃어버렸다고 믿게”되는 코타르 증후군을 비롯한 여러 환각을 겪게 된다. 이런 외계인의 간섭은 테세우스의 생물학자에 의해 친절히(?) 설명된다.

"잠깐만." 어맨더가 반대 이론을 냈다. "우리는 로르샤흐에 갔을 때 꼭두각시 노릇을 하지 않았어. 환각을 보고 시각을 잃었고..... 미치기까지 했지만 조종당하지는 않았다고."

생물학자가 어맨더를 보고는 콧방귀를 뀌었다. "조종하는 줄에 저항할 수 있다고 생각해? 그걸 느낄 수나 있을 것 같아? 지금 당장이라도 내가 두뇌용 자석을 머리에 씌워놓으면 넌 가운뎃손가락을 들고 발가락도 흔들고 여기 앉아 있는 시리를 걷어찬 다음 잘난 네 엄마의 무덤에 걸고 자기 의지에 따라 그랬다고 맹세도 할 거야. 꼭두각시처럼 춤을 추면서도 자유의지로 그랬다고 목숨을 걸겠지. 하지만 나 같은 중증 강박장애 환자도 MRI용 헬멧과 자석 몇 개만 있으면 그렇게 조종할 수 있어." 392p

로르샤흐는 강력한 자기장으로 인간의 뇌를 간섭하여 사고까지 완벽하게 통제한다. 어느 정도로 완벽하냐면 로르샤흐가 하게 한 행동을 자기가 자신의 자유의지로 했다고 믿을 정도의 수준이다. 이렇게 자기장 신호를 통해 뇌 자극 반응을 통해 두뇌활동을 조사하고 통제하는 기술은 현재도 가능한 기술이다. 경두개자기장치료기(Transcranial Magnetic Stimulation)를 인터넷 검색창에 입력하면 우울증, 치매 치료와 같은 결과를 찾아볼 수 있다. 현재의 경두개 자기장 치료보다 더 강력하고 정교한 외계의 자기장 통제 기술이 우리 인간의 뇌에 간섭하게 된다면? 로르샤흐에 진입한 테세우스 승무원들처럼 자유의지나 자기정체성이 외부의 물리적 간섭에 의해 와해되는 것이다.

로르샤흐가 심어준 환각 속에서도 테세우스 승무원들은 로르샤흐 내부의 외계인 두 명을 생포하는데 성공한다. 생물학자는 조사결과 이들이 인간 수준의 신경과 뇌를 갖고 있지 않다는 사실을 파악한다. 그래서 테세우스 승무원들은 더욱 미궁에 빠져든다. 생포한 외계인이 과연 지구에 개똥벌레들을 보낸 주체인지 아니면 지성을 가진 주체는 따로 있고 이 둘은 로르샤흐 내부를 지키는 하수인인지 파악하기가 어려워진 것이다.

그리고 외계인이 어떤 존재이며 어떤 의도를 갖고 있는지에 대한 열띤 토론이 사이보그 생물학자, 다중인격 언어학자 그리고 흡혈귀 사이에서 벌어진다. 토론의 최종 결과와 그 최종 결과에 따른 테세우스의 최종 행동은 스포일러이기 때문에 적지 않겠다. 다만 외계인과 인간이 얼마나 다른지에 대해 언어학자와 생물학자가 토론하는 과정에서 흥미로우면서도 자신들의 생존과 직결된 가설이 제기된다. 인간이 스스로를 인식하는(self-awareness) 능력인 ‘지각’(sentience)이 높은 지능을 갖춘 모든 생물체에게 필수가 아닐 수도 있으며 오히려 다른 종과의 생존경쟁에서 장애가 될 수도 있다는 가설이다.

"하지만 넌 생물학자잖아. 우리 엄마 말이 누구보다 정확하다는 건 알 거야. 두뇌는 포도당으로 만든 거대한 돼지지. 뭘 하든 간에 코로 호흡을 해야 하고."

"그건 맞아." 생물학자가 인정했다.

"그러니까 지각이란 건 뭔가 목적이 있단 말이야. 유리하려면 비용이 많이 들잖아. 에너지만 빨아 먹고 아무것도 안 한다면 진화에 의해서 사라졌을 거라고."

"그랬는지도 모르지." 생물학자는 한참 만에 말했다. 음식을 씹거나 담배를 빤 것 같았다. "침팬지가 오랑우탄보다 똑똑하다는 거 알아? 대뇌 용적률이 더 높아. 하지만 거울에 비친 자기 모습을 못 알아볼 때가 있어. 하지만 오랑우탄은 안 그래."

"그럼 결론이 뭐야? 똑똑한 동물이 자각은 떨어진다고? 침팬지는 자각이 사라지는 중이라고?"

"과거에 그랬는지도 모르지. 그리고 우리는 침팬지의 선례를 따라가지 않는 거야." 425p

거울 속 자신을 자신이라고 인식하는 지각 능력은 오랫동안 지능의 척도가 되어왔다. 많은 동물학자들이 여러 동물을 대상으로 그런 실험을 해왔다. 하지만 침팬지처럼 높은 지능을 가진 유인원도 종종 거울 속 자신의 모습을 자기로 연결시키지 못한다는 것이다. 오히려 침팬지에 비해 신체 대비 두뇌용적률이 낮은 오랑우탄은 침팬지와는 달리 거울 속 자신을 반드시 자신이라고 인식한다는 것이다.

<블라인드 사이트>에서는 지각 능력이 지능과는 별개라는 가설 위에 이야기를 진행시킨다. 그리고 ‘나는 무엇인가’라는 쓸데없는 질문의 필요성을 느끼지 않고 행동하는 높은 지능을 가진 존재를 상정한다. 스스로를 인식하지 않는 것처럼 타인의 존재 역시 인지하지 않는 존재. 자신의 생존이나 목적을 위해 의식적으로 사고하지 않고 무의식적으로 사고하여 행동하는 존재. 그래서 가장 효율적인 행동만을 수행하는 존재.

"잠깐만, 지금 전 세계의 기업을 이끄는 엘리트들이 사실은 지각 능력이 없는 사람들(nonsentient)이라 이거야?"

"그거야 당연히 아니지. 그런 사람도 있지만. 이제 막 그렇게 되기 시작한 건지도 몰라. 침팬지처럼."

"그럴지도 모르지. 하지만 이상성격자(sociopaths)들은 잘 섞여 살지 못하잖아."

"지금까지 분석을 당한 이상성격자들은 그럴지도 몰라. 하지만 정의(definition)에 따르면 잡힌 것들은 수준이 떨어지는 놈들이라고. 나머지는 똑똑해서 안 잡히지. 게다가 진짜 로봇이라면 훨씬 잘 할거야. 한 가지 더 있어. 권력을 얻으면 남들처럼 행동할 필요가 없어. 다른 사람들이 알아서 흉내를 내니까."

샤샤가 휘파람을 불었다. "우와. 완벽한 연기자네."

"그렇게 완벽한 건 아냐. 이 우주선 안에도 하나 있잖아." 427p

스스로를 인지하려 하고 정의내리는 것에 대한 필요성을 굳이 느끼지 않고 아주 단순한 목적을 성취하기 위해 사고하며 행동하는 높은 지능의 존재(들)과 스스로를 인지하도록 진화해왔고 ‘나는 무엇인가’라는 화두에 몰두해 온 인류가 조우하게 되면 어떤 일이 벌어지게 될까. 오랑우탄처럼 지각능력을 갖춘 인류 사이에서 침팬지처럼 지각 능력이 결여된 존재들의 비중이 높아진다면? 인류를 압도하는 지능을 지녔지만 침팬지처럼 지각 능력이 결여된 존재가 인류와 조우한다면?

<블라인드 사이트>는 이런 가정 아래 해당 분야의 여러 연구와 가설을 동원한 사고실험이다. 작가 스스로는 “<블라인드 사이트>는 하나의 실험적인 사고이자 유희격인 제안이다. 그 이상은 아니다” (517p) 라고 자신의 사고 실험에 어떤 선을 긋고 있지만 이 사고 실험에 동원된 여러 참고 자료들은 ‘인간은 무엇인가’, ‘인간이 무엇이라면 나는 또 무엇인가’라는 가장 우리종 다운 질문을 다시 상기시킨다. 내가 스스로 내린 인간과 나에 대한 정의에 대한 업데이트를 요구한다.

솔직히 매 페이지마다 스릴과 즐거움보다는 생소한 용어와 정보들을 안겨주는 소설이었기에 상당한 피로감과 함께 책장을 덮었지만 이 업데이트의 요구는 책장을 덮은 시간과 비례하여 점점 더 커지고 있다. 이 정보들을 더 제대로 이해하여 주제를 뚜렷하게 파악하고 싶다는 욕심이 커지고 있다. 때문에 나는 작품 속에 언급된 토머스 메칭거나 다니엘 베그너, 로저 펜로즈, 토르 뇌레트란더스, 쿠르트 괴델같은 학자들의 저서에 접근하려 한다. 일단 영문 위키피디아(링크)에서 함께 읽어볼 것을 권하는 올리버 색스의 <아내를 모자로 착각한 남자>부터 시작하여 <블라인드 사이트>로 인해 촉발된 당혹감과 호기심을 꾸준히 처리해보려 한다.

덧) <블라인드 사이트>에 대한 보다 공식적인 정보가 필요하다면 작가의 홈페이지(링크)도 찾아가보자. 영어 독해가 수월한 사람이라면 더욱 정교한 배경 설정과 지식들을 접할 수 있다. 꼭 영어 독해가 수월하지 않더라도 작가 스스로 제시한 우주선 테세우스호의 이미지를 볼 수 있다.

최원택

드라마 잡지 〈드라마틱〉과 장르소설 잡지 〈판타스틱〉의 기자를 거쳐 책 만드는 일을 하다가 곧 자유낙하가 멀지 않은 자유기고가가 되었다. 허영에 휘둘려 책장을 넘기고 마우스를 클릭하다가 깜냥을 확인하는 것도 우직하게 반복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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