솔직히 말해서, SBS 수목드라마 <황금의 제국>이 지난 <추적자>의 제작진과 배우들이 의기투합해 만든 드라마가 아니었다면, “4회까지만 봐 달라”는 손현주의 당부가 아니었다면, 2주에 걸쳐 이 드라마를 계속해서 ‘본방사수’하는 일은 아마 없었을 것이다.
이유는 간단하다. 재벌그룹 내부의 힘겨루기나 재개발을 소재로 ‘가진자’와 ‘없는자’의 갈등을 부각시키는 이야기가 그다지 새롭지 못한 상황에서, 시청자가 감정을 이입시켜 응원할 만한 캐릭터가 전무하기 때문이다.
만약 <황금의 제국>이 기존 드라마의 문법을 따랐다면, 용역업체를 동원한 건설회사의 일방적인 강제철거로 아버지를 잃은 장태주(고수)의 반격과 복수가 사실상 이 드라마를 이끄는 주요 스토리가 됐어야 마땅하다. 하지만 드라마는 1회 첫 장면에서 장태주가 장관 내정자를 살해하는 장면을 보여줌으로써 장태주라는 캐릭터가 결코 시청자가 기대하는 그런 선한 캐릭터가 아님을 분명히 했다.
심지어 단 4회 만에 돈의 노예가 되어버린 장태주의 모습을 통해 드라마는 이제 최민재(손현주 분)와 보다 장태주가 나을 게 하나도 없다는 메시지를 전하고 있다. 이유 없는 악인은 없다지만, 드라마가 온통 ‘돈’에 목숨을 건 사람들로 넘쳐나며, 배신과 음모만이 가득하니 도무지 시청자입장에서는 마음을 줄 만한 캐릭터를 찾을 수가 없게 된 것이다. 이 드라마가 좀처럼 시청률에서 반등의 기회를 잡지 못하고 있는 이유도 이와 무관치 않다.
사실 ‘착한캐릭터’를 포기하는 것은 일종의 모험이기도 하다. 선과 악의 뚜렷한 대립을 통해 결국 ‘권선징악’으로 마무리되길 바라는 우리나라 드라마 시청자들의 성향을 고려했을 때, 착한 캐릭터가 없다는 것은 그만큼 드라마에 있어 불리하게 작용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황금의 제국>은 왜 ‘착한캐릭터’를 포기하면서까지 위험을 감수하는 것일까. 대체 이 드라마가 전하고자 하는 주제의식은 무엇일까. 답은 바로 ‘약속의 4회’에 있었다.
9일 방영된 4회에서 장태주는 벼랑 끝에 몰려 자신을 찾아온 최민재에게 ‘미사일 버튼 신드롬’에 대해 설명했다. 다름 아닌 미사일 단추를 누르는 군인에게는 사람을 죽인다는 의식이 없다는 것이다. 그 미사일로 수많은 사람이 다쳐도 정작 본인은 단추만 눌렀을 뿐이라고 합리화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비록 최민재는 상가를 철거하라는 전화만 했을 뿐이지만, 그 전화가 결국은 철거민을 죽이는 전화였단 사실을 지적한 것이다.
이날 장태주는 이제 미사일 단추를 누르는 것은 자신이라며, 최민재에게 복수를 다짐했다. 하지만 장태주 역시 모르는 게 하나 있었다. 그는 자신의 누르는 단추가 어떤 의미를 갖는지 잘 알고 있기 때문에 본인은 최민재와 다르다고 주장했지만, 결과적으로 장태주가 누른 단추는 최민재의 부인을 죽음으로 몰아넣었다. 최민재와 장태주는 서로에 의해 가장 사랑하는 사람을 잃게 된 것이다.
최민재와 장태주가 미사일 단추를 누른 것은 오직 ‘돈’ 때문이었다. 차라리 생존을 위해서였더라면 어느 정도 수긍할 수 있겠지만, 두 사람 모두 먹고 살만한 충분한 돈이 있는 상태에서, 오로지 더 큰 야망을 위해 단추를 눌렀다. 공감은커녕 앞으로 펼쳐질 두 사람의 악행이 그다지 큰 기대를 불러일으키지 못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최민재, 장태주와 함께 앞으로 ‘황금의 제국’을 차지하기 위한 게임에 발을 들여놓게 될 최서윤(이요원)은 또 어떤가. 그룹을 지킨다는 명목 하에 오빠를 내치고, 사촌 오빠를 곤경에 빠뜨린다. 성진그룹의 실질적인 후계자에 오른 그녀는 “좋은 사람이 되지 말고 두려운 사람이 되라”는 아버지의 뜻에 따라 본격적으로 악역카리스마를 내뿜을 예정이다. 최민재와 장태주 만큼은 아니지만 어쨌든 정이 안 가는 캐릭터이긴 마찬가지다.
하지만, ‘황금의 제국’으로 명명되는 국내 굴지의 성진기업을 차지하기 위해 끊임없이 암투와 계략을 벌여야 할 이 세 사람의 운명을 놓고 봤을 때, ‘착한 캐릭터’는 오히려 역효과를 불러올 가능성이 높다. 왜냐하면 정의를 믿는 순수함만으로는 자본과 권력에 맞설 수 없기 때문이다. 게다가 IMF 시대 전후를 관통하는 이 드라마의 시대적 배경을 생각해본다면, 마냥 순하고 착한 캐릭터보다는 ‘돈’ 앞에 이성을 잃고 미쳐 날뛰는 캐릭터가 더 훨씬 더 그 시대의 생생함을 전달해 줄 수 있다.
문제는 ‘돈’ 앞에 사람은 결국 다 똑같다는 허무주의를 넘어서, 대체 우리 사회는 왜 사람과 사랑, 믿음과 가족까지 버려가며 그토록 ‘돈’에 집착해 왔는지를 세밀하게 그려낼 수 있느냐의 여부다. 수단이어야 할 돈이 목적이 되어버렸던 시대를 돌아봄으로써 현재 우리의 모습을 반추하는 것. ‘황금의 제국’에 착한 캐릭터가 없다고 아쉬워하기 전에 우리가 먼저 던져야 할 질문이다. 대체, 돈은 우리에게 어떤 의미인가?

대중의 언어와 사고에 깊숙이 관여하는 대중문화를 바로 보는 것은 무엇보다 중요합니다. 그래서 오늘도 필자는 대중문화의 겉과 속을 파헤치기 TV 리모콘을 사수합니다.http://saintpcw.tistory.com 많이 방문해주세요.

저작권자 © 미디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