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수의 살을 주고 뼈를 취하는 전략에 손현주가 속았다. 죽고자 하면 살고, 살고자 하면 죽는다는 전쟁의 명언이 있다. 배수의 진이라는 말처럼 죽음을 각오한 사람은 무섭다. 고수는 류승수에게 죽도록 맞다 죽을 것을 각오하고 손현주를 완벽하게 속일 계획을 이미 세워뒀던 것이다. 결국 손현주는 성진그룹을 손아귀에 쥘 결정적 순간에 추락하고 말았다. 겨우 나대지 두 평 때문에, 고수 때문에 말이다.

나대지 두 평에 10억이라는 거액을 요구하는 고수의 말을 순순히 들어줄리 없는 손현주가 조폭 류승수를 이용해 폭력을 휘두르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결과였다. 그리고 언제나처럼 자기 뜻대로 되는 걸로 착각한 것이 돌이킬 수 없는 실수였다. 또한 고수가 천만 원만 더 달라고 구걸한 것이 결정적인 속임수였다. 그 순간에는 손현주에게 땅도 얻고, 콧대 높은 고수의 굴복도 받아낸 두 가지 기쁨을 주었겠지만 그것이 자신을 나락으로 빠뜨릴 함정이었다는 것은 몰랐다.

깍쟁이처럼 따지고 든다면 약간의 허술함을 지적할 수 있다. 조폭을 동원한 강제계약에 천만 원을 더 주기로 한 약속을 계약서에 쓰지는 않을 테니 말이다. 그 부분을 너그럽게 본다면 고수의 전략은 무모했지만 통렬한 역전승을 가져올 필살기였다. 어쨌든 천만 원을 잔금으로 남겨둔 상태에서 계약서에 도장을 찍었으니 손현주가 아직 땅을 완전히 손에 넣은 것은 아니었다.

다음날 아침 은행 영업시간이 시작되자마자 장신영은 기다렸다가 통장을 해지했고, 손현주는 나머지 잔금을 줄 수 없게 됐다. 계약의 효력이 없어진 것이다. 그런 것도 까맣게 모른 채 손현주는 승리감에 도취되어 공동회장으로 오르는 화려한 꿈을 꾸고 있었다. 그렇게 자만심에 빠져 있을 때 이요원이 전화 한 통을 받고 돌아간 이유를 까맣게 모르고 있었다. 이요원은 손현주와 달리 고수의 요구를 들어줬다.

마침 돈가방을 양 손에 들고 이요원 방을 나서는 순간 다급히 고수를 찾아 나서는 손현주와 마주치게 됐다. 고수는 돈 가방에서 백만 원짜리 돈다발을 하나씩 꺼내서 손현주에게 던지면서 이번에도 자신이 이겼다는 말을 남겼다. 이 굴욕적인 상황에도 손현주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런 손현주에게 이요원은 더 잔인한 말을 더했다. “주워, 이 돈이 오빠가 가질 수 있는 전부가 될 거야”

단 하루도 자신만의 천하를 누려보지 못한 채 손현주는 왕좌의 게임에서 물러나고 말았다. 스스로 비굴해짐으로써 상대의 방심을 끌어낸 고수의 지독한 수에 당할 수밖에 없었던 것은 손현주가 늘 상대를 이겨왔던 습성 때문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상대의 비굴함에 속은 대가는 너무도 컸다. 모든 것을 다 내려놓고 교도소 신세를 지게 됐고, 마지막 히든카드였던 장학재단마저 자기 동생을 죽게 만든 큰아버지에게 상납하는 굴욕을 겪어야 했다.

여기서 잠깐, 손현주의 히든카드가 왜 장학재단인가는 각자가 생각해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장학재단이라는 근사한 이름 뒤에 숨어있는 은밀하고 추한 세태에 대한 박경수 작가다운 발상을 발견하게 된다. 박경수 작가의 드라마는 세태풍자의 요소들이 지뢰처럼 곳곳에 깔려 있다.

한편 장신영과 손을 잡은 고수는 승승장구였다. 아버지 수술비를 마련하기 위해 사정하러 갔던 건물주에게 받은 그대로 복수하는 장면은 깨알 같은 쾌감을 주기도 했다. 그러나 고수가 비상하며 단 날개는 성실과 정직과는 거리가 먼 타락한 날개였다. 사업을 위해 정치인에게 뇌물을 마다 않는 건설회사 사장이 됐다. 맞으면서 배운다고 했던가. 고수는 자기 아버지를 죽게 한 손현주와 어느덧 똑같은 사람이 돼가고 있다.

매스 미디어랑 같이 보고 달리 말하기. 매일 물 한 바가지씩 마당에 붓는 마음으로 티비와 씨름하고 있다. ‘탁발의 티비 읽기’ http://artofdie.tistor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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