점령당한 사과들
다분히 개인적인 감상을 밝히고자 한다. 언제부터인가 한 떼의 시인들이 지나가고 나면 보통 쓸 만한 단어들이 남아있지 않았다. 단어의 점령군들이 자행한 화려한 언어의 조탁 속에 남은 것은 개인화된 상징들이나 보편을 베풀기 어려운 들판 위의 황폐한 주둔지들뿐이었다. 그들은 ‘사과’에 대해서 말할 때, 자신이 사과를 어떻게 먹었는지에 대해서 말할 뿐만 아니라 어디에서 사과를 베고 잤는지, 언제 사과와 사랑을 나누었는지, 왜 사과로 모자를 만들어 썼는지에 대해서 노래했다. 때로는 매우 아름답지만, 때로 시인의 지문들로 선명한 그 사과들은 도무지 먹을 수가 없어서 안타까웠다.
자기증명을 위한 복화술
그런데 시 속에서 스스로 “그깟/ 사과쯤 베어먹지 못하면 어떠랴”(「비로소 웃다」)라고 노래하는 시인이 있다. 앞서 2000년에 『평화시장』이라는 시집을 출간한 바 있고, <내림> 동인과 <일과시> 동인으로 활동하는 동시에 1호선 전동차 승무원으로 근무 중이기도 한 이한주 시인이다. 여기까지가 바로 프로필에 정리되어있는 시인에 대한 확고부동한 사실이다. 하지만 시인 스스로의 존재 증명은 다른 방식으로 이루어진다.
밀실 저편에서
웃으라는 만큼만 웃고
머리카락 한올
내 마음대로 쓸어올리지 못한 채
팔이 잘리고
두 다리가 잘려 나간
생경한 얼굴 하나
저게 나란다
입 한번 뻥긋 못한 채
웃지도 울지도 못하고 엉거주춤한
저게 나란다
- 「증명사진」 중에서
이 풍경은 몸에 붙은 듯 익숙하다. 누구나 한번쯤은 자신의 존재증명을 위해 기계 앞에서 이렇게 애써야한다. 이상하게도 세상이 원하는 증명은 나에 대한 진정한 증명을 얼마간 포기하고서야 정당해진다. 그러니까 살아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이 시에 대한 공감을 표명할 수 있을 것 같다. 시인은 ‘증명사진’이라는 일반적인 증명에 대하여 그것은 마땅한 증명이 아님을 밝힘으로써, 진정한 증명으로 나아가는 방법에 대한 물음을 던지고 있다. ‘저게 나란다’라는 마무리 뒤에는 ‘저게 나일까?’라는 반문이 도사리고 있다. 이상하게도 물음표가 없는 시인데, 물음표가 보이는 시이다. 증명하지 않는 증명은 시를 쓰는 일을 통해서 완성되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지금, 이 방법(증명사진)으로는 자신을 증명할 수 없다는 표정을 하고 있지만 결국 시를 쓰는 행위를 통해서 자신을 증명하고 마는 시인의 복화술을 목격하고 있다.
어떤 이름 짓기
그렇다면 이 시인이 시를 쓰기 위해 단어를 고르는 방법은 무엇일까.
우리말갈래사전을 사고
선생인 네 이모네 반 출석부를 몰래 훔쳐보며
특별한 이름보다는
모든 사람들과 금방 친해질 수 있는 이름
떵떵거리며 출세하는 이름보다는
메아리처럼
나지막이 들리는 이름 어디 없을까
네가 평생 간직할 나의 첫 선물
네 얼굴만큼 선한
어디 그런 이름 없을까
벌써 며칠째
전화번호부를 뒤적이고
책방을 둘러보고
- 「이름」
시인은 지금은 열여덟 살이 된 딸의 이름을 짓고 있는 중이다. 시인이 딸의 이름을 짓는 일과, 시인이 시를 쓰는 일은, 둘 다 가장 소중한 단어를 골라 엮어내는 작업이라는 점에서 결코 멀리 떨어져 있는 일이 아닐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전화번호부를 뒤적이는’ 시인의 모습을 엿보며, 시인이 시를 쓰는 방법을 짐작해도 좋을 것이다.
시인은 갑자기 사과와 사랑을 나누려고 하거나, 사과로 모자를 만들어 쓰려는 것이 아니다. 그렇지만 출석부, 전화번호부, 책방과 같이, 사람의 이름이 널린 어딘가에서 가장 소중한 이름을 찾아내려고 한다. 별안간 특별하고 새로운 이름이 아니라, 다만 ‘메아리처럼/ 나지막이 들리는’, ‘평생 간직할’, ‘네 얼굴만큼 선한’ 이름을 찾고 있다. 무엇보다 이 이름은, ‘특별한 이름보다는/ 모든 사람들과 금방 친해질 수 있는 이름’이다. 시인은 특별하기를 일찍부터 포기한다. 딸이 태어났을 때부터, 시를 쓰기 시작할 때부터. 이미 익숙한 이름들 사이에서 이름 찾기를 시도함으로써 그는 누구나 부를 수 있는 이름을 찾거나, 아마 사람이 널린 곳이라면 어느 곳에서든 시가 발견되기를 희구한다. 이러한 시인의 시론은 표제시 『비로소 웃다』에서 더욱 명확하게 드러난다.
‘비로소’ 웃다
‘비로소’의 자리에 놓일 수 있었던 부사들을 상상해 본다. ‘결국’도 가능했을 것이고, ‘마침내’도 놓일 수 있었을 것이다. ‘끝내’도 있고, ‘끝끝내’도 있다. 모두 비슷한 의미를 가진 단어들이다. 그러나 유독 ‘비로소’라는 점에 주목하게 된다.
보통 ‘비로소’라는 한글 부사는 ‘비로소 시(始)’라는 한자와 어울리며, 이 글자는 주로 ‘시작(始作)’이나 ‘시초(始初)’와 같은 단어를 만들어 낸다. 보통 어떤 일이나 행동의 첫 단계를 이루는 것을 가리키는 단어의 활용에 복무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표제시 「비로소 웃다」의 ‘비로소’는 ‘웃기’시작하기 전, 시인이 겪어 온 여러 가지 사건들을 단번에 함축한다. 여기, 시인이 직접 토로하고 있는 그간의 과정이 있다.
나는 그들에게 이야기를 들려주었지만
그들은 누렇고 성긴 내 이빨만 보았다
틈이 벌어진 앞니 사이로
침이 튀고
말이 새는 게 부끄러워
말수를 줄이고
입을 가리며 웃다가
그들처럼
진짜보다 더 진짜같은
새하얀 가짜 이빨 덧대놓으니
가지런한 웃음이 싱그럽다

그깟
사과쯤 베어먹지 못하면 어떠랴
- 「비로소 웃다」
사람들은 누렇고 성긴 이빨을 가진 입에서 흘러나오는 말들을 믿기 어려워한다. 정작 언제나 우리의 믿음을 저버리고 마는 것은 하얗고 가지런한 잇새로 흘러나오는 엘리트 정치가나 학자, 자본가들의 말인 경우가 많았는데. 그런 편견의 희생자는 철도노동자로, 10등급 기능직으로 오래 일해 온 시인이었던 것 같다. 시인은 ‘이야기를 들려주었지만’ 그들은 ‘누렇고 성긴 내 이빨만 보았다’는 막막함. 아마 그것만 봐주기를 바라지 않았기에, 시인은 가닿을 수 없는 ‘그들’과의 교점을 만들기에 부단했던 것 같다. 그것이 설령 ‘새하얀 가짜 이빨’에 불과한 것이었을지라도. 시인은 자기 웃음, 자기 시어를 다시 불러 모으기 위해서 남들이 쓰는 흔한 말, 새하얗지만 가짜에 불과한 싸구려 이빨 같은 것들을 주워 모았다. 어쩌면 너무 초라해서 ‘마침내’ 이후로 전락해 버리는 과정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시인은 말한다. ‘그깟/ 사과쯤 베어먹지 못하면 어떠랴’
저마다 자기만의 사과를 소유했던 시인들과는 달리, 이한주 시인은 사과를 갖지 않음으로써, 사과를 베어 먹지 못함으로써 비로소 모든 사람들과 사과를 나눌 수 있게 된다. 앞으로 시를 쓸 또 다른 사람들을 위해 활용이 지연된 사과가 여기 있다. 그러므로 시인은, ‘마침내’가 아니라 ‘비로소’로 시작하고 있다.
마침내, 비로소
나라는 개인은 동시에 여러 삶을 살 수 없지만, 누군가 먹지 못한 사과를 넘겨받듯, 시를 통해서 다른 삶을 양도받을 수 있다. 그리고 시집을 읽는 동안만큼은 그 생활세계의 단어를 익히고 오래 누릴 수 있다. 그렇게 남의 말을 배우고, 남의 말로 말해보는 연습을 할 때 우리는 ‘비로소’ 연대할 수 있다. 시집 속에서 밝히고 있는 사태들로 보아, 이한주 시인은 그동안 몇 명의 동지들을 잃었고(「고마웠어요 아, 허광만 동지」), 그래서 종종 외로웠던 것 같다. 그렇지만 이 시집을 읽는 일이 그와 직접 만나지 않고도 연대할 수 있는 방법이라면, 우리는 많은 좌절과 고립의 끝에서 ‘마침내’를 말하려다, ‘아니, 비로소.’라고 말할 수 있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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