폴 토마스 앤더슨 감독이 범상치 않은 작품 <마스터>로 5년 만에 관객을 찾아왔다. 프레디(호아킨 닉스 분)는 2차 세계대전에 참전한 군인이다. 그는 분노의 임계치가 다른 평범한 사람들보다 훨씬 높다. 보통 사람이 대개 9나 10의 자극의 수준에서 분노가 폭발한다고 가정하면 프레디는 불과 2나 3의 자극으로도 불같이 화를 내는, 분노의 임계치가 현저히 떨어지는 사람이다.
1950년대 미국의 자화상, 풍요 속의 불안이 영화 속 인물로 형상화된 인물은 프레디다. 2차 세계대전을 승리로 이끈 승전국이자 유럽을 제치고 세계 제일의 선진국으로 도약한 미국이지만 그 가운데 찾아온 정신적인 불안까지는 완전하게 극복하지 못한 상황. 이러한 미국의 현실은 전쟁 트라우마 때문에 전후 사회에 적응하지 못해 투우장의 황소처럼 이리저리 치받기만 하는 프레디의 모습으로 형상화된다.
분노의 임계치가 이렇게 높다 보니 찾아온 손님에게 필요 이상의 물리적인 폭력을 행사하는 등 툭하면 사고치기 바쁘다. 때문에 진득하게 한 일자리에 붙어 있지 못한다. 이곳저곳 직장을 옮기던 프레디에게 전환점이 보이기 시작하는 데서 영화는 전기를 맞이한다. 투우장의 황소처럼 불안하기만 한 프레디를 받아주는 사람이 생기면서부터다.
프레디를 받아주는 사람은 심리 치료 프로그램 코즈를 운영하는 랭케스터(필립 세이무어 호프만 분). 랭케스터는 프레디가 공격적인 성향을 보이고 분노를 조절하지 못함에도 불구하고 그를 배척하거나 쫓아내지 않고 보호하고 받아들인다. 이런 프레디와 랭케스터와의 관계는 멘토와 멘티의 관계로 진전된다.
영화 제목 ‘마스터’는 이런 면에서 의미심장하다. 프레디는 랭케스터에게 상담을 받으면서 자신의 은밀한 비밀을 고백하고 치유받기를 바란다. 하지만 랭케스터에게 도움만 받는 관계만은 아니다. 프랭크는 랭케스터의 이론에 의문을 제기하는 사람을 물리적으로 해결하기도 한다. 하지만 랭케스터의 치료에도 불구하고 프레디의 공격적인 성향이 누그러질 조짐이 보이지 않는다.
프레디에게 구원으로 작용하는 건 랭케스터와의 멘토 관계가 아니었다. 프레디에게는 사랑하는 여자인 도리스가 있었다. 참전하기 전에 프레디는 도리스에게 작별 인사를 하면서 반드시 돌아오겠다는 약속을 나눈다. 영화의 처음과 마지막은 수미상관 기법이 드러난다. 해변가의 모래를 쌓아 여인의 모습으로 만드는데 프레디가 여인의 모습으로 쌓은 모래 곁에 눕는 장면이 나온다.
프레디에게 있어 구원은 랭케스터의 치료가 아니라 ‘여자’라는 노스탤지어를 보여주는 순간이다. 전쟁 후에도 한결같이 도로시를 잊지 못하고, 멘토인 랭케스터와의 관계보다 도로시와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오토바이로 한달음에 내달리는 프레디의 모습은 프레디에게 있어 노스탤지어가, 치유를 제공받을 힘이 랭케스터가 아닌 사랑하는 여인 도로시라는 걸 보여주는 장면임에 틀림없다.
프레디라는 남자를 구원하는 힘을 제공하는 이는 멘토가 아닌 사랑하는 여인이었다. 영화 제목처럼 마스터가 프레디를 구원하는 게 아니라, 여자가 남자를 구할 수 있는 힘을 가졌음을 보여주는 영화다. 사랑하는 여자라는 정신적인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음에야 비로소 프레디가 방황을 끝내고 안식을 얻고 정착할 수 있으리라. 여자가 남자를 구원하리니.
늘 이성과 감성의 공존을 꿈꾸고자 혹은 디오니시즘을 바라며 우뇌의 쿠데타를 꿈꾸지만 항상 좌뇌에 진압당하는 아폴로니즘의 역설을 겪는 비평가. http://blog.daum.net/js7kei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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