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통적인 방송 프로그램 제작에는 기본적으로 연출자(디렉터)와 촬영자(카메라맨) 그리고 작가 등 고유한 역할을 하는 분야별 스텝이 참여하는 시스템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제작 시스템은 영상제작 장비의 디지털화 및 경량화 등의 이유로 10여 년 전부터 '원맨프로덕션(one-man Production)' 시스템이란 이름으로 점차 각 스텝의 고유한 영역이 허물어지기 시작했다.

물론 다큐멘터리와 같은 특정 프로그램 제작에 국한되는 이야기이긴 하지만 분명 최근 들어 연출자가 직접 촬영을 하고 글을 쓰는 일까지 담당하는 등 제작의 전체 과정을 혼자서 수행하는 사례가 사뭇 증가하고 있는 경향을 보인다.

▲ KBS 환경 스페셜 '철책의 땅 장항습지' 글, 연출 : 정현덕 (2007.7.11)

일부에서는 이러한 제작환경에 대해 제작사가 제작비용을 줄이기 위한 어쩔 수 없는 선택이라고 자조 섞인 시선으로 바라보는 이들도 있다. 분명 많은 독립제작사의 경우 6mm촬영과 편집 그리고 연출이 가능한 소위 6mm VJ가 혼자서 하나의 프로그램을 담당하는 사례가 비일비재한 것 또한 현실이다. 이 경우 대부분 제작비용을 줄이고 방송시간 채우기를 위한 프로그램 양산에 그 목적이 있음을 부인할 수 없다.

그러나 반대로 연출자가 직접 촬영을 하고 시나리오를 작성하는 경우는 연출자 본인이 시청자들에게 전하고자 하는 이야기를 매우 정확하게 전달할 수 있다는 장점을 기대할 수 있다. 이 경우 연출자의 프로그램 제작능력 이외에 촬영능력과 작가적 기술이 담보돼야 함은 물론이다.

KBS 프로듀서들의 두드러진 약진

현재 KBS와 MBC, SBS, EBS 등 지상파 채널 중 프로그램 연출자가 해당 프로그램의 시나리오까지를 담당하는 사례가 가장 두드러진 채널은 KBS로 주로 <환경스페셜>과 < KBS스페셜> 등의 프로그램이다.

KBS의 대표적인 시사교양 프로그램인 < KBS스페셜> <환경 스페셜> 여기에 <걸어서 세계속으로> <일요다큐 산> 등과 같은 다큐멘터리 프로그램에서 연출자의 촬영 및 글쓰기 작업에 관한 모습이 자주 목격되고 있다.

▲ KBS스페셜 '2008한반도 북한은 왜 베트남을 주목하는가' 글,연출 : 공용철 (2008.2.3)

▲ KBS 환경 스페셜 '철책의 땅 장항습지' 글, 연출 : 정현덕 (2007.7.11)

▲ KBS 환경 스페셜 '크리스마스의 기적 홍게' 글, 연출 : 김서호 (2008.3.19)

대부분 KBS 자체 제작 프로그램으로 편성되는 < KBS스페셜>과 <환경스페셜>에서의 경우는 연출자가 시나리오까지를 담당하는 사례가 많다. 반면 <걸어서 세계 속으로>와 <일요다큐 산>의 경우 연출, 촬영, 글쓰기 까지 1인 3역을 담당하는 사례와는 구분되는데 이는 프로그램 취재 카메라의 차이일 뿐 연출자들의 제작능력 확장 현상과 일치한다고 볼 수 있다.

즉 < KBS스페셜> 등의 프로그램은 주로 ENG카메라 시스템을 활용하지만 <일요다큐 산>과 같은 프로그램에서는 6mm 소형 카메라를 이용하고 있기 때문에 직접 연출자가 카메라를 운용할 수 있는 상황의 유무에 따른 차이일 뿐 글 쓰고 촬영하는 연출자들의 왕성한 활동은 별반 다르지 않다.

글 쓰는 연출가, 촬영하는 연출가 - 멀티플레이어

'카메듀서'(카메라맨 + 프로듀서)라는 신조어를 탄생시킨 EBS 이의호 감독은 ENG카메라를 운용하면서 프로그램을 제작하는 연출가로 유명하다. 2005년 자연다큐멘터리 <흙>과 2008년 6월 방송된 EBS 창사특집 다큐멘터리 <잡초>에서 보여준 그의 카메라 촬영기법은 그 어떤 전문 카메라맨의 기술 못지않은 실력을 발휘했다.

시간의 변화를 극명하게 보여주는 하늘의 구름 이동모습이며 바람의 흐름을 느낄 수 있는 나뭇가지의 움직임은 물론 땅 속에서 솟아오르는 생명들의 성장모습 등은 이 감독이 카메라를 직접 다루는 이유를 설명해 주기에 충분하다. 인간의 눈으로는 포착할 수 없는 자연의 변화를 카메라 렌즈와 기다림의 미학으로 완성해 낸 한 연출자의 새로운 도전으로 시청자는 더 넓은 세상의 풍경을 아주 쉽게 바라볼 수 있는 기회를 얻었다.

이처럼 최근 다큐멘터리 연출자들의 시나리오 글쓰기 혹은 카메라 촬영에 대한 열정은 단순한 제작비용을 줄이기 위한 수단이 아닌 프로그램 제작 주체로써 보다 가치 있는 영상과 내용을 시청자에게 제공하려고 하는 그들의 아름다운 도전의 산물이라 하겠다.

▲ KBS 수요기획 '갠지스 강의 소년 뱃사공 산딥' 촬영,연출 : 김정훈(2008.6.18 한국씨네텔)

▲ EBS 다큐프라임 창사특집 '잡초' 촬영,연출 : 이의호(2008.6.17)

멀티플레이어로써 요구되는 협력과 조율 그리고 기획력

분명 TV방송을 위한 영상 프로그램의 완성에는 많은 제작스텝의 힘이 요구된다. 결코 혼자의 힘으로 모든 것을 완성할 수는 없다. 단지 연출자가 촬영도하고 글을 쓴다고 해서 그것이 하나의 프로그램으로 완성되지 못한다는 의미다. 따라서 실제 방송을 위한 프로그램이 되기 위해서는 다양한 스텝의 고유한 능력이 보태져야만 가능하다.

다양한 능력이 요구되는 협동작업의 결과물일 수밖에 없는 영상 콘텐츠를 제작하는 연출자는 특정한 스텝의 능력을 최상으로 이끌어 내거나 다양한 제작환경을 효과적으로 운용하는 능력이 그 어느 것 보다 우선한다. 따라서 연출자는 그 역할에 맞는 제작지휘능력을 충분히 소화한 뒤에 또 다른 스텝의 역할능력을 발휘해야 한다. 그럴 때에만 비로소 멀티플레이어로써 인정을 받게 되기 때문이다.

영상취재 장비의 디지털화와 경량화로 인해 누구나 쉽게 영상을 촬영할 수 있는 환경이 조성되었고 편집장비 역시 일반 PC를 활용한 넌리니어(NLE) 편집이 보편화 되는 등 영상물 제작에 많은 변화가 일고 있다. 그런 만큼 제작스텝의 전문화 영역이 조금씩 무너지고 있는 것 또한 사실이다. 그러나 영상 프로그램은 협동의 산물이며 다양한 사전, 사후 과정이 요구됨으로써 하나의 완성된 영상 콘텐츠로써 가치를 가지게 된다.

프로그램 연출자가 자신이 취재한 내용을 정리하고 그것을 구성하며 시나리오로 완성하려는 노력과 도전정신은 분명 국내 영상제작환경을 더욱 풍성하게 하는 자양분이 되고 있음에 분명하다. 제작스텝의 협력과 조율을 통해 보다 완성도 높은 작품을 만들고 연출자의 풍부한 제작능력이 보태어지면서 경쟁력 있는 영상 콘텐츠가 생산되는 선순환구조가 완성되는 것이다.

연출자뿐 아니라 카메라맨과 작가 등도 그 영역을 확대하려는 움직임이 필요하다. 자신의 고유한 역할을 넘어서기 위해 사회변화와 트렌드를 읽고 해석할 줄 아는 능력을 가져야 하며 항상 학습을 통한 새로운 내일을 준비할 마음가짐이 필요하겠다. 이렇게 제작스텝들 사이에서 서로에 대한 선의의 경쟁이 일어날 때 국제 경쟁력을 가진 우수한 영상 콘텐츠가 자연스럽게 생산될 것은 자명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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