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씨가 너무 덥다. 여름은 이제 겨우 초입을 지났을 뿐인데, 폭염에 몇 달은 시달린 느낌이다. 날짜를 확인해보니 7월 초. 더위를 쫓겠다며 햄버거 집을 찾아가 팥빙수를 시키는 것도 하루 이틀이지 더 이상 지속할 수 없다. 손가락을 들어 휴가까지 남은 일수를 세어본다. 스물여덟, 스물아홉, 서른, 서른하나, 서른 둘… 멈춘다. 그러니까 징그럽게 많이 남았다는 뜻이다.

인상 쓰고 있어봐야 달라지는 건 없다. 그러니 다른 것으로 대체해보자. 가령 책은 어떨까? 망측하게도 책은 우주를 여행하게 해 준다. 이를테면 피서용으로 한 번쯤은 선택하는 <<은하수를 여행하는 히치하이커를 위한 안내서>>(더글러스 애덤스, 김선형, 권진아 역, 책세상, 2005) 를 떠올려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안심하자. 오늘은 누구나 다 가는, 끔찍하게 시간이 오래 걸리는 그 행성계로 가는 게 아니니까. 여행을 떠날 곳은 인적이 드문 곳이다. 예컨대 <<구텐베르크 은하계>>(마셜 맥루언, 임상원 역, 커뮤니케이션북스, 2001) 같은 것. 그런데 대뜸 그곳으로 떠나자니 갤럭시한 스케일이 부담스럽다. 그렇다면 아담한 행성으로 시작할 수밖에. 즉 <<맥루언 행성으로 들어가다>>(더글러스 코플런드, 김승진 역, 민음사, 2013)로 안착하는 것이다.

마셜 맥루언의 1962년의 글에 놀라다

맥루언 행성을 선택한 이유는 책 앞에 등장한 어떤 문구 때문이다. 이 문구가 아니었으면 우리는 ‘맥루언 행성으로 들어’가지 않았을 것이다. 1962년 맥루언이 남긴 수수께끼 같은 구절. 인터넷은 상상조차 할 수 없었고, 컴퓨터라고는 8비트 애플조차 개발되지 않았던 시대에 등장한 ‘예언’이다.

‘차기 미디어가 무엇이건 간에(아마 의식의 연장일 것이다.) 그것은 텔레비전을 환경이 아닌 내용으로 취하고, 또 텔레비전을 예술의 형태로 바꿀 것이다. 리서치와 커뮤니케이션 도구로서의 컴퓨터는 정보 검색을 촉진하고, 거대 도서관 조직을 구식으로 만들 것이며, 개인의 백과사전적 기능을 되살려 그 기능이 상품 형태의 맞춤 정보에 빠르게 연결되는 전용 채널이 되도록 할 것이다. - 마셜 맥루언 1962’ - <맥루언 행성으로 들어가다.> p12

흠칫할 것 없다. 이 구절을 읽은 당신과 나는 똑같으니까. 그러니까 처음 읽을 때는 어리둥절한 기분으로 읽고, 책의 230쪽에 도달한 뒤에 “하지만 이 책의 12쪽에 나오는 마셜의 1962년의 글을 보고 소름이 끼쳤다면...” 이라는 작가의 말에 12쪽으로 되돌아가고는 감탄사를 연발한 그 과정을 반복했을 테니 말이다. 당신이나 나나 ‘차기 미디어가 (...) 의식의 연장...’에서 ‘인터넷’이 떠올랐을 것이고, ‘텔레비전을 환경이 아닌 내용으로 취하고...’ 에서 ‘유튜브’가 스쳐 갔을 것이며, ‘컴퓨터는 정보 검색을 촉진하고 (...) 개인의 백과사전적 기능을 되살려 그 기능의 상품 형태의 맞춤 정보에 빠르게 연결되는 전용 채널이 되도록 할 것이다.’라는 구절에서 검색과 쇼핑을 결합시킨 포털을, 그리고 거기서 무언가를 구매했던 2시간 전의 행보를 떠올릴 것이다.

감탄사를 발하게 되는 건 ‘마셜 맥루언 1962’다. 그리고 이 어리둥절한 구절이 왜 연도까지 표기해 맨 처음 배치되었는지도 이해하게 해 준다. 이것이 ‘맥루언 행성’을 선택하게 한 작가의 역량이라고 할 때, 알면서도 속는 기분으로 책을 넘겨보게 된다. 여행이란 이렇게 시작되는 것이다.

맥루언이 느꼈던 감각을 함께 느끼다

여행 팸플릿을 자처했으니 맥루언 행성을 구경하면서 ‘경험해 볼 만한 것들’을 선별해 보도록 하자. 우선 맥루언 행성의 구조부터 이야기해야겠다. 이 행성은 ‘맥루언의 일생’이라는 내(內)지각과 ‘인용’으로 이루어진 외(外)지각으로 이루어져 있다. 전체 행성의 85%쯤을 차지하는 내지각은 이 행성의 주요뼈대다. 맥루언의 일생이 서술되어 있으며 여행자들은 이 지층을 탐색하는데 대부분의 시간을 보내게 될 것이다. 반면 외지각은 인용의 돌덩어리들이 흩어져 있는 풍경에 불과하다. 그러나 내지각과 연결되며 흥미롭게 변용된다. 때로 이 돌덩어리들의 생김새는 심히 우스꽝스러워서 이것을 거부하는 여행자들은 드물다. 아무튼 외지각은 독특한 풍미를 지니고 있다.

그러나 잠깐. 이 여행은 맥루언의 이론을 탐사하기 위한 예비과정으로 참가한 사람들에게는 불만족스러울 것이다. 어떤 사상가를 읽기 위해 전기를 먼저 읽어보는 심각한 여행자들에게 그렇다. 왜냐하면 내지각에서 코플런드가 안내하는 지층들은 맥루언의 삶과 이론을 직접적으로 연결해주지 않는다. 저자 코플런드는 그런 것에 별로 관심이 없다. (하지만 간접적으로 보여주기는 한다. 외지각을 통해서.) 그가 우리에게 안내해 주는 것은 맥루언을 둘러싼 환경들과 그가 접촉했던 것뿐이다. 이를테면 맥루언의 신체, 개신교와 가톨릭, 어린시절의 에피소드, 헤럴드 이니스와 체스터턴, 포의 <소용돌이 속으로의 낙하>, 미디어 연구의 출발점으로서의 토론토 같은 ‘요소들’ 뿐이다. 코플런드가 우리에게 제시하는 것은 그것들을 만져보고, 느끼며, 맥루언이 느꼈을 감각을 상상하면서 잠시 있어보라고 권유하는 방식이다. 요컨대 그는 맥루언을 지층 속에 박제시켜 둘 생각이 없다. 그는 여행자 모두에게 맥루언의 신체를 직접 ‘체험’하라고 권유하고 있는 것이다. 이를 위해 코플런드는 맥루언의 역량으로 서술할 수 있는 것들을 요소로 분해해서 배치한다. 그리하여 우리가 내지각 탐사를 통해 얻을 수 있는 건 서사라기보다 리스트이다. 그리고 소년, 청년, 장년 시절로 분절된 지층들인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코플런드가 안내하는 대로 맥루언 지층들을 출생부터 사망까지 더듬어 갈 수도 있고, 마음에 드는 풍경 속에서 한동안 서 있을 수도 있다. 1922년의 캐나다 마을을 옮겨 다니며 ‘무한함의 감각을 갖게 해’ 준 어린 시절의 풍경 속에서 머물러 볼 수도, ‘마셜이 자신의 태도에 대한 어머니와 언쟁한다... 마셜이 일기에 어머니 욕을 한 바가지 적는다... 그런 생각을 한 자신에 대해서도 욕을 한 바가지 적는다...’ 같은 맥루언의 모습을 유심히 관찰할 수도, 의심스러운 표정의 수강생들 앞에서 알아듣든 말든 ‘이상하게도 정확한 발음과 음보로 내뱉는’ 그의 수업에 참여해 볼 수도 있다. 하긴, 책으로 여행을 하면서 뭘 못하겠는가? 상상력이 부족한 여행자를 위해 코플런드는 맥루언의 내면을 1인칭으로 들여다 볼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기도 한다.

“당신 말고는 이 행성의 25억 인구 중 어느 누구도 아직 알아차리지 못한 것 같다. 이봐! 치어리더들이 코카콜라 병을 물고, 임원들이 다림질이 필요없는 바지를 내리는 이 모든 것에서 무언가가 벌어지고 있다고! 폭군의 정치를 선전하는 데 사용되었던 전략들이 빨랫비누 광고에 사용되고 있었다. 운 없는 당신! 운 없는 당신! 이 거대하고 텅 빈 대륙에 당신은 혼자다. 일터에 걸어가면서 당신은 답답해 미치겠다고 생각한다. 어디에나 있는 저 쓰레기 같은 광고에 무언가 병적인 아름다움이 있다는 것을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기 때문이다.” - <맥루언 행성으로 들어가다>, p56.

맥루언의 인용구들은 무엇을 보여주는가

외지각은 내지각의 지층들과 연결된다. 외지각은 단순한 요청에 응답한 결과에 지나지 않는다. 이를테면 ‘마셜은...제임스 조이스는 건너뛰지 않았다’ 같은 서술을 한 뒤에 조이스의 짧은 경구를 ‘인용’하는 식이다. 여기에는 조이스를 포함한 화이트헤드와 네비게이션 안내문과 <<구텐베르크 은하계>>의 가격과 아직 번역되지 않은 코플런드의 단편소설까지 동원된다. 작가의 장난스런 시도라고 치부될 가능성이 없지 않지만, 각각의 ‘인용’들은 서술이 보여줄 수 없는 잔여를 환기하며 여정을 더 확장시킬 여지를 제공한다.

가령 <<미디어의 이해>>에 대해 언급한 부분에서 여행자들은 ‘<<미디어의 이해>>는 <<구텐베르크 은하계>>보다 더 체계적이지만 내용은 더 모호해서 독자들은 <<구텐베르크 은하계>>를 읽을 때와 마찬가지로 자신의 생각이 늘어나고, 위협당하고, 풍성해질 수 있도록 기꺼이 자신을 내맡길 의사가 있어야 한다.’라는 서술 뒤에 “생각을 도발하는 엄청나게 독창적인 연구서” / “놀라운 헛소리 모음집”이라는 제목의 독자서평이 차례로 인용된 것을 보게 된다.(p166~8) 한 가지 덧붙이자면, 구텐베르크의 문자매체에 마비되었던 인간은 현대 미디어를 통해 구술문화의 풍부한 감각으로 회복(?)될 것이라는 맥루언의 메시지가 코플런드의 단편에서 암시되고 있다.

그러므로 소박한 여행자들은 맥루언이 열광했다는 조이스의 <<피네건의 경야>>와 화이트헤드의 <<과정과 실재>>를 찾아 인터넷 검색을 시작할 수도 있고(물론 <<미디어의 이해>>일 수도 있겠지만), 코플런드의 서술방식에 흥미를 느낀 독자는 <<A Generation>>을 아마존에서 구매해 전자사전을 두들기며 보다가 머리를 쥐어뜯을 수도 있으며, 쓸데없이 대담한 여행자는 캐나다와 미국을 오가며 코플런드가 제시한 네비게이션 안내문을 따라 맥루언의 여정을 느긋하게 반복하는 낭비를 시도해 볼 수도 있다. 맥루언 행성의 여정은 그런 식으로 일단락되고, 지속되는 것이다.

맥루언 행성이 던진 기묘한 수수께끼

그러므로 여정의 끝에서 우리가 물어야 할 질문은 이런 것이리라. 이 여행을 통해 우리는 맥루언의 신체를 체험할 수 있었는가? 지층들과 요소들을 탐색함으로써 그를 이해할 수 있었을까? 코플런드는 한 가지 흥미로운 수수께끼를 제시한다. ‘뉴미디어에 대한 마셜의 관심은 대체로 다음과 같은 것들 때문에 생겨났다. 1) 그는 잘 알려지지 않았던 16세기의 팸플릿의 저자 토머스 내시로 박사 학위논문을 썼다. 2) 그는 어머니 때문에 낭독술을 배웠다. 3) 그의 뇌는 조금 특이한 방식으로 연결되어 있었다. 4) 그의 뇌에 혈액을 공급하는 동맥은 하나가 아니라 둘이었다. 5) 그는 종교를 발견했다. 6) 그는 캐나다 대초원 지역에서 자랐다. 7) 그는 대그우드 범스테드에 집착했다 8) 그는 제임스 조이스 전문가였다.’(p146)

다시 말해 마셜 맥루언이 ‘16세기 영국의 풍자 작가이자 비평가를 연구해서 우리가 아는 그 마셜이 되었다는 것은, 중세 프랑스의 부활절 의례를 연구해서 로켓 과학자가 되었다는 것만큼이나 이상해 보인다.’(p86)는 수수께끼다. <<구텐베르크 은하계>>와 <<미디어의 이해>>까지 경유해 간다면 맥루언 행성이 던진 이 기묘한 수수께끼를 풀 수 있을까? 정말, 당신은...? 따라서 이렇게 마무리하자. Have a nice journey! 즐거운 여행이 되길 빈다.

고덕영
2006년에 결혼했다. 결혼 직후 용돈이 궁한 탓에 한 번 사면 오래 읽을 수 있는 난해하고 어려운 책을 사서 뒤적거리기 시작한 게 화근이었다. 그런 책들을 오독하다 보니 ‘인문 딜레당트’로 ‘전락’하여 이런 저런 책을 뒤적뒤적하며 나락에 빠진 생활을 계속하고 있다. 의구심이 없는 건 아니지만, 주로 인문 쪽 책을 건너다닌다. 한 아이의 아빠이자 철딱서니 없는 남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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