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엉거주춤하다. 뒤도 안 닦은 채 바지 올린 것 마냥. “돌격 앞으로”를 외치고 득달같이 뛰쳐나갔는데, 얼핏 뒤가 서늘해 돌아보니 셋뿐이다. 늑대 소년 노릇도 한두번이지, 이번에도 뒤통수 긁적거리면 그냥 넘어갈 수 있을까. 그동안 말을 얼마나 자주 바꿔왔는지, 이젠 스스로 뭔 말을 했는지조차 기억 못할 지경이다.

촛불을 괴담, 배후, 반미로 몰고 갈 때만 해도 사태파악이 안됐다. 뒤늦게 억지춘양으로 “그들은 ‘참을 수 없는 순정’으로 나왔다”거나 “민주주의는 국민이 원하는 대로 하는 것”이라고도 해봤다. 무람없는 시위꾼들이 계란을 던져도 썩소로 화답하며 때를 기다렸다. 여론이 바닥을 치고 반등하는 것처럼 보일 무렵, 거리는 때맞춰 과격해졌다. “폭력이다.”(늑대가 나타났다.) 촛불은 ‘폭력-비폭력’의 프레임 안에 가두면 금세 꺼질 것 같았다. 그런데 갑자기 신부·수녀들이 나타나 살인미소 한방 날리자, 다시 커져 버렸다. ‘안타깝게도’ 너무 평화적이기까지 하다.

▲ 미사 드리는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 ⓒ송선영
7월2일, 조중동의 지면에는 깊은 시름의 흔적, 다크 서클이 역력하다. 전날, <성직자들이 불법 부추기는 모양새는 안 돼>(중앙일보 사설)라고 할 때만 해도 그 정도는 아니었다. (1)야간집회 자체가 불법이고 (2)폭력성이 드러났고 (3)여론도 바뀌었고 (4)반미·반정부 투쟁인데, 성직자들이 철없이 거기에 숟가락을 보태려고 하느냐고 나름대로 준열한 모양새를 갖췄다. 그래도 신부·수녀들은 웃기만 한다. “사랑합니다.” 어제의 ‘폭도’들은 손가락 하트까지 날린다.

대책회의가 대책회의에 공식·비공식으로 SOS?

▲ 조선일보 7월2일자 4면.
2일치 조·중·동의 촛불집회 관련 기사를 보면 이 난처하고 민망한 상황에 대처하는 방법이 읽힌다. 먼저 조선일보의 관련기사 제목은 <궁지몰린 시위대, 종교계에 “SOS”>다. 이 제목의 주어는 시위대다. 종교계는 대상일 뿐, 이 신문으로부터 주체적 위상을 부여받지 못하고 짐짓 무시된다. 이 제목은 “종교계가 꺼져 가던 촛불시위의 ‘구원투수’로 나선 것은 대책회의가 공식·비공식으로 요청을 했기 때문이라고 경찰은 분석하고 있다”는 본문에 의해 뒷받침되고 있다. 그런데 문장 안의 사실관계가 어긋난다. 그냥 ‘요청’도 아닌 ‘공식·비공식 요청’이라면 ‘사실’이 매우 구체적이라는 것을 의미하지만, 경찰은 이 ‘사실’을 ‘확인’한 것이 아니라 ‘분석’했다니 말이다.

확인인지 분석인지 헷갈리는 이 ‘사실’의 근거는 바로 이어서 나오는 대책회의의 성명서 내용이다. “7월5일을 ‘국민 승리 선언을 위한 촛불문화제’의 날로 선정하고 온 국민의 참여를 호소한다. 천주교, 기독교, 불교 등을 비롯한 모든 종교계 그리고 뜻을 같이 하는 모든 정당과 사회단체 등에 이러한 우리의 제안을 말씀드릴 것”이라고 했다고 한다. 아직 7월5일은 여러 날 남았고, 뜻을 같이 하는 모든 정당과 사회단체 등은 이미 시위대의 일원이다. 더욱이 같은 기사 안에 “이들 종교단체는 대책회의를 구성하는 1830개 단체에 포함돼 있다”고 돼있다. 대책회의가 대책회의에 공식·비공식으로 요청한 결과, 대책회의가 전면에 나선 것이다? 종교계는 정녕 시위대의 앵벌이에 손을 내민 것인가? 무시하는 척하면서 실눈 뜨고 곁눈질하면 사물이 정확하게 안 보이는 법이다.

사제들, 배후에서 주동으로?

▲ 중앙일보 7월2일자 5면.
중앙일보의 제목 <지도부 숨자 종교단체가 시위 주도>는 건조한 관찰자의 형식을 취하고 있다. 전날 사설과 달라진 건 성직자들을 ‘부추기는 자’(배후)에서 ‘주도하는 자’(주동)로 전진배치한 점이다. 중앙일보의 시각이 조정된 것인지는 판단하기 어렵다. 다만 기사 오른쪽에 집회 사진이 아닌, ‘불타는 전경버스’ 사진을 나란히 실음으로써 편집 의도와 관련해 해석의 뒷맛을 남긴다. 사진설명은 ‘화재 원인을 조사 중’이라고 돼 있지만, 시각적으로는 방화를 연상시킨다. 신부·수녀들이 (공식·비공식적으로) 전경버스에 불을 붙였으면….

동아일보 관련기사의 제목은 <종교단체들도 촛불 앞에 갈라지나>이다. 주격조사 ‘도’에는 촛불이 이미 세속계를 분열시켰다는 전제가 내포되어 있다. 그리고 그 분열의 세가 세속계를 넘어서 종교계까지 이어질지 모른다고 한다. 분열에 대한 기대인지 우려인지 알 수 없는 이 기사의 전망을 뒷받침하는 ‘사실’은 “이에 맞서 보수 성향의 종교단체들도 행동에 나서고 있다”는 것이다. 이에 맞선 보수 종교단체의 움직임은 ‘대통령을 위한 기도 시민연대(PUP)’ 결성이란다. 이들은 2~6일 대통령을 위해 특별 금식을 하고, 19일엔 서울역에서 대통령을 위한 정기기도회도 연단다.

판타스틱한, 너무나 낭만적인 동아

▲ 동아일보 7월2일자 6면.
PUP 네이버 카페에 들어가보자. 6월27일 개설된 것으로 나온다. 사제단의 미사가 시작된 6월30일보다 사흘 먼저 개설됐다. 미사가 시작되기 전부터 미리 맞서기 시작한 건가? 기도회 일정도 6월28일자로 공지되어 있다. 이것도 미리 미사를 예측하고 준비한 것이고? 카페 개설자가 쓴 발족 동기는 “대통령이 무릎 꿇고 기도하는 환상을 하나님이 보여주셔서”라고 하는데, 동아일보는 너무 의역을 심하게 한 것 같다. 2일 오후 3시 현재 회원수 135명. 이 정도면 종교계가 갈라진다고 표현하기에 부족함이 없는 규모인가? 동아일보, 너무 판타스틱하고 낭만적이다.

조중동이 2일치 사설이나 칼럼을 통해 한목소리를 내고 있는 원칙이 있으니, ‘정교분리’다. 종교 교리로서 정교분리를 주장하는 거라면 시대에 따라 교리 해석이 달라져선 안 된다. 그런데 조중동은 유신정권 때, 혹은 6·10항쟁 때까지는 종교가 정치에 참여하는 게 옳았다고 한다. 자기네끼리도 시기를 달리하니 신빙성이 떨어지지만, 어쨌든 지금은 정교분리가 옳다는 거다. “정교분리는 근대화의 산물”이라는 주장(중앙일보 시론)에 따르면, 지금 사제들은 전근대적 행태를 보이고 있는 셈이다. 이렇게 볼 수는 없을까. 탈근대적 현상이라고. 지금 거리는 탈근대의 징후들로 넘쳐난다.

정교분리, 탈 정치가 아니라 탈 권력 복무다

정교분리의 정확한 역사적 맥락은 정치와 종교의 분리가 아니다. 물리력이 달리는 교황이 탐욕스런 현실정치권력을 어쩔 수 없이 군주에게 넘기고 스스로 살 길을 궁리한 결과다. 요는 탈정치가 아니라, 권력 배제인 것이다. 지금 사제들이 국가권력을 찬탈하려고 하는가. 오늘날 정교분리의 가치는 탈정치도 권력배제도 아닌, 종교가 권력을 위해 복무하지 않는 데서 성립한다. 대통령을 위한 기도회, 목사가 한반도 대운하를 밀어주려고 ‘친환경 물길 잇기 전국연대’ 같은 단체를 만드는 일, 정작 이런 것들이 정교분리를 어기고 있으니, 조중동은 확고한 신념으로 일관되게 비판해주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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