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의 목소리가 들려’는 적어도 8회까지는 완벽하다고 해도 좋을 만큼 대본과 연기의 궁합이 잘 들어맞았다. 그리고 감히 10년의 나이차를 뛰어넘는 이종석, 이보영의 수족관 키스는 설렘도 컸지만 그만큼 아픔도 많았다. 그것이 연애의 시작이 아니라 끝을 의미하는 이별의 키스였기 때문이다. 그 설렘과 아픔을 안고 기다렸던 9회는 충격과 실망을 안기고 말았다. 분명 이유가 있었겠지만 기억상실이라는 한국드라마의 막장 클리셰가 등장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유를 막론하고 너목들에서 기억상실을 만날 거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다.

민준국(정웅인)은 결국 무죄선고를 받고 자유의 몸이 됐다. 판사의 무죄선고를 듣자 이보영은 법정을 급하게 빠져나왔고, 윤상현이 다급히 쫓아 나와 당신을 잃고 싶지 않다고 한다. 하지만 너무 서둘렀다. 자기 엄마 살해범을 무죄로 방면시킨 사람에게 듣고 싶지 않은 말이라는 것을 왜 몰랐을까.

이보영은 예의 차갑고 사무적인 어투로 눈치 없는 윤상현에게 “아무 것도 하지 마세요. 난 지금 원망할 사람이 필요하니까. 그러니까 가만히. 내가 계속 미워할 수 있게 아무 것도 하지 말구”라고 답했다. 이건 정말 명대사다. 명대사는 명언과 다르다. 명대사란 극중 캐릭터가 할 수 있고, 해야 할 말을 제대로 가려내는 것이다. 감정이 새거나 혹은 해소될까봐 화조차 내지 않고 차갑게 말한 이 대사야말로 연인 사이였던 남자에게 원망과 미움을 전달하기에 완벽한 문장이었다.

그리고는 법원 내 이보영만의 공간. 회전문 사이에 주저앉아 오열하는 모습은 그 원망과 미움에 엄마에 대한 미안함 그리고 자신의 무력감에 대한 좌절까지 모두 합쳐진 장혜성의 심정을 그대로 전달할 수 있었다. 여기까지는 정말 감탄하며 작가를 칭송하는 마음뿐이었다. 그런데 예상했던 대로 이종석이 정웅인을 죽이려 찾아가면서 상황이 꼬이기 시작했다.

우선 이종석의 능력을 아는 정웅인이 갑자기 전기스위치를 내려 빛을 차단했다. 이미 눈을 감고 기다렸던 정웅인은 어둠에 눈이 익어 쉽게 이종석을 폭행할 수 있었다. 그러다 주인공이 언제나 악당에게 당하다 역전시키는 클리셰가 등장한다. 쇠파이프로 일방적으로 당하던 이종석이 휘두른 주먹질 몇 방에 정웅인이 그로기상태가 되는 것이다. 물론 그 정도는 애교로 넘어가줄 수 있는 수준이다.

그러던 중 이보영이 현장에 도착한다. 이종석이 예전에 깔아둔 위치확인 앱을 활용한 것이다. 그런데 이종석이 정웅인을 칼로 찌르려던 순간 이보영이 어느새 앞을 가로막고 대신 찔린다. 이 장면만은 그냥 넘기기에는 무리였다. 그 찰나를 이용해 정웅인은 칼로 이종석의 어깨를 깊이 찌른다. 다시 찌르려는데 멀리서 윤상현의 목소리가 들리자 정웅인은 칼을 챙겨서 주차장 밖으로 도망친다. 윤상현은 멀리서 도망치는 정웅인의 모습을 목격한다. 비로소 자신의 잘못을 깨닫는 순간이지만 그보다는 정웅인의 손에 들린 칼과 핏자국에 더 놀라 이보영을 찾아 나선다.

이종석을 살인범으로 만들지 않기 위해서 이보영이 우사인 볼트보다 빠른 속도로 달린 것까지도 이해한다고 치자. 정말 허망한 탄식을 나오게 한 것은 그 이후였다. 주차장 사건으로 인해 정웅인은 다시 살인미수로 공개수배범 명단에 오르고, 이종석도 함께 자취를 감췄다. 그러면서 이보영은 이종석을 만나기 전과 같은 날로 먹는 무책임한 국선변호사의 모습으로 돌아갔다. 그러던 중 한 낚시터에서 사람의 손이 잘려진 채 발견된다. 그 주변에서 칼과 휴대전화가 나왔다. 물론 이종석의 지문이 다량 채취됐다.

결국 경찰은 이 사건을 토막살인으로 확정짓고 이종석을 수배한다. 진짜 여기서는 더 이상 인내할 수가 없었다. 신체의 일부분이 발견된다고 할지라도 시체 전부가 발견되기 전까지는 살인으로 규정지을 수 없기 때문이다. 발견된 증거도 시체가 발견되기 전까지는 살인 증거가 될 수는 없다. 살인이라고 추정할 수는 있어도 아직 살인이라고 할 수는 없다. 한국에는 워낙 수사드라마가 적어 낯설 수 있겠지만 미드를 좀 봤다면 이 상황이 얼마나 억지스러운지 금세 파악할 정도다.

잘 참아왔던 불만이 터져 나올 수밖에는 없었다. 그러다 보니 형사가 들고 다니는 수배전단의 CCTV 녹화장면도 눈에 거슬렸다. 세상에 어떤 CCTV가 로우샷으로 찍힐 수 있겠는가. 그런데 그렇게 찾아낸 이종석이 이번에는 맙소사 기억상실이다. 마침내 한국드라마 막장의 클리셰가 등장하고 만 것인가? 물론 이종석의 기억상실은 아직 확실한 것은 아니다. 아니 아닐 것이다. 그렇지만 조금씩 쌓인 개연성을 놓친 상황들 때문에 기억상실이라는 단어만으로도 터져버릴 것만 같다. 그 복잡한 이유에 대해서 당연히 그럴듯한 설명이 뒤따르겠지만 9회는 이보영의 회전문 속 오열장면에서 기억을 닫고 싶은 심정이다. 그러나 억울하게도 재미있다.

매스 미디어랑 같이 보고 달리 말하기. 매일 물 한 바가지씩 마당에 붓는 마음으로 티비와 씨름하고 있다. ‘탁발의 티비 읽기’ http://artofdie.tistor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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