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정원 직원의 사기와 국정원의 명예를 위해서 남북정상회담 대화록을 공개했다.”

26일 국회에 출석한 남재준 국가정보원장의 변이다. 하지만 국가정보원의 인터넷 댓글 여론조작을 통한 선거개입 및 남북정상회담 대화록 공개가 하루 이틀 준비된 일이 아니라는 정황이 속속 드러나고 있다.
▲ 남재준 국가정보원장이 25일 오전 서울 여의도 국회에서 열린 정보위원회 전체회의에 출석하고 있다. (뉴스1)
여론조작도 대화록 공개 시도도 하루 이틀 준비한 일이 아냐
미디어스가 지난 25일 국회 안전행정위원회 소속 민주당 진선미 의원실을 통해 입수한 <국정원 검찰 수사 범죄일람표-다음 아고라에서의 정치관여> 문건을 보면, 원세훈 전 국정원장은 2009년 2월 취임하자마자 인터넷 댓글을 통해 여론조작을 실시했으며 그 첫 번째 대상이 종편 채널 도입이었다고 한다. 다른 몇몇 언론들은 같은 문건을 받아 국정원이 2009년 5월 고 노무현 전 대통령 서거 당시 추모분위기를 비난하거나 노 전 대통령을 비하하는 인터넷 덧글을 유포했다는 사실을 중점보도했다.
결국 문건에 따르면 국정원은 원세훈 전 국정원장이 취임한 2009년 2월부터 지난해 대선 직전 ‘국정원 댓글 사건’이 터질 때까지 지속적으로 인터넷 여론조작을 시행했으며 선거개입 역시 그 일환이었을 뿐이다.
남북정상회담 대화록 공개 역시 마찬가지다. 야권이 지난 대선 당시 박근혜 후보 캠프의 종합상황실장을 지낸 권영세 현 주중 대사의 음성이 담긴 것으로 추정되는 녹음파일을 공개하는 등 석연치 않은 대목이 많다. 이 녹음파일에서 권영세 대사로 추정되는 인물은 대화록에 대해 “이건 우리가 집권하게 되면 까고”라고 발언했고 남북정상회담에 관한 서술은 모종의 문건을 보았음을 시사하고 있다. 민주당 박범계 의원은 “NLL 대화록은 이명박 정부 시절 이미 불법·무단으로 유출돼 ‘정상회담 분석보고서’라는 내용으로 정제됐고, 이 전 대통령과 여러 사람들이 기밀자료를 들여다봤으며 공유했음이 분명하다”고 주장했다.
새누리당 김무성 의원 역시 뷰스앤뉴스 보도에 따르면 "지난 대선 때 이미 내가 그 대화록을 입수해서 읽어봤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그는 “그 원문을 보고 우리 내부에서도 회의도 해 봤지만, 우리가 먼저 까면 모양새도 안좋고 해서 원세훈에게 대화록을 공개하라고 했는데 원세훈이 협조를 안 해줘가지고 결국 공개를 못한 것”이라면서 “그런데 내가 너무 화가 나서 대선 당시 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오후 3시쯤 부산 유세에서 그 대화록을 그 많은 사람들 앞에서 울부짖듯이 쭈욱 읽었다”라고 까지 말했다고 한다.
뷰스앤뉴스 보도에 대해 김무성 의원실 측은 "대선 당시 정문헌 의원이 남북정상회담 대화내용에 관한 문제를 제기한 내용과 노무현 전 대통령이 남북정상회담 이후 민주평통 행사 등에서 NLL 문제와 관련해 발언하신 내용을 종합해서 만든 문건을 선거에 활용한 것"이라면서 "‘남북정상회담 회의록 원문을 입수했다’는 내용은 사실과 다르다"고 해명했다. 하지만 뷰스앤뉴스의 추가 취재 결과 김무성 의원이 본인이 말한 그 부산유세에서 실제로 대화록 원문의 일부 내용을 읊은 것으로 알려져 김무성 의원실 측의 해명의 설득력을 떨어뜨리고 있다.
'대북심리전'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나
즉 국가정보원이 지난 몇 년간 상시적으로 여론조작을 실시했다는 정황은 풍부하고, 현 집권세력이 NLL 대화록을 어떻게든 공개하고 싶어 했다는 정황 역시 존재하는 것이 현재 상황이다. 따져봐야 할 것은 여기서 ‘국정원의 명예’가 도대체 어디에 존재하느냐는 것이다.
국정원은 분명 '국가정보원'의 준말이건만 활동을 했다는 예의 댓글들을 보면 차라리 '국정홍보원'의 준말인 것처럼 여겨진다. 하지만 참여정부 시절 국정홍보처가 공식적인 활동을 했다면 국정원의 댓글들은 익명 뒤에 숨은 비공식적인 여론조작을 '대북심리전'이란 명분 하에 수행했다.
하지만 게시판에서 평범한 시민인 척 야권 인사들을 '종북'이라 비방하는 댓글을 여러 사이트에 광범위하게 단 것이 '대북심리전'이란 말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 것인지 모르겠다.
이 말이 성립할 수 있는 논리적 문맥은 단 하나다. 국정원이 한국 사회 곳곳에 종북 세력이 침투했다고 선전하면서, 북한을 오판하게 만들어 '제 2의 6.25전쟁'을 이끌어내려고 했을 가능성이다. 북한 지도부가인터넷 댓글 몇 개 보고 정국을 판단할 만큼 멍청하지도 않겠지만 그렇게라도 우겨야 저게 '대북심리전'이란 말의 의미가 살 수 있다.
말하자면 국정원이 자신의 행동을 정당화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6.25 직전 남로당이나 박헌영의 역할을 했다고 자백하는 것이다. 물론 6.25를 일으킨 이들을 증오하는 보수세력이 이런 작전을 짰을 리는 없다. 사실 그들은 정당화에 대해선 별로 생각해본 적이 없고 대충 아무 말이나 하고 있다. 'NLL 회의록'을 보고 노무현 전 대통령이 '이적행위'나 '반역'을 했다고 우기는 것과 동일하다. 하지만 국정원이 이런 작전이라도 짜지 않았다면, 이 '댓글 알바'는 대북심리전일 수 없고 차라리 '대남심리전'이며 '대민심리전'이다. 먹혀든 먹히지 않았든 명백하게 정부에 반대하는 국민들의 마음을 왜곡하려 한 것이다.
국정원 직원들이 달았다는 댓글들은, 그 수법이나 정당화 논리가 파행이란 것을 떠나서, 내용면에서도 ‘괴랄’하다. 문체만으로 본다면 최근 사회적으로 문제가 된 ‘일간베스트’(이하 ‘일베’) 유저의 덧글과도 구별할 수 없다. 세간에서 ‘일베’조차 국정원이 만들어 내거나 관여하지 않았겠느냐는 추측이 괜히 나오는 것이 아니다. 설령 그 정도까지 추측하진 않더라도 국정원의 인터넷 댓글들이 그럴듯한 '가면'을 쓰기 위해 인터넷의 하위문화에 적응하며 자신들의 정치성을 드러낸 것이라 평할 수는 있다. 그렇다면 국정원 댓글이 인터넷에 유입되는 과정에 자생적인 넷극우파들과 영향을 주고 받으며 '일베'와 같은 것들이 좀더 대중화되는 데에 이바지했다고는 충분히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남재준의 난'의 막후에 대한 몇 가지 시나리오
또 ‘NLL 대화록’을 공개하고 싶었던 현 집권세력의 욕망을 국정원이 수용한 것이라면 이는 어찌 이해해야 할까. 사실 무슨 일이 일어나면 그 사태를 전적으로 대통령의 의지의 문제로 가져가는 일부 진보개혁 세력의 비평 역시 세밀하지 못한 데가 있다. 김무성 의원이 원세훈의 협조를 받지 못해 지난 대선 'NLL 대화록'을 공개하지 못했다는 취지의 발언을 했다는 보도가 나온 것에서도 시사할 수 있듯이, 설령 어떤 일이 '대통령의 의지'라고 하더라도 체제를 통해 그것이 실행되기 위해서는 여러 사람의 협조가 필요하다.
상식적으로 따져볼 때 국정원의 이번 파격 행보는 국정원 직원들의 판단과 국정원장의 결단, 그리고 대통령의 양해 내지는 묵인이 결합해서 일어난 일일 거라고 추정하는 것이 합리적이다. 다만 이것들이 어떤 방식으로 결합했을 지에 대해서는 다양한 가능성이 존재한다.
먼저 이명박 정부 시절의 국정원 직원들이 댓글 여론조작 검경 수사 및 국정조사 요구를 회피하기 위해 적극적으로 국정원장을 설득하고, 이에 설득당한 국정원장의 결단을 대통령이 '나쁠 것 없다'고 묵인했을 가능성이 존재한다. 다른 방법으로는 고지식한 군인 출신인 국정원장이 ‘NLL 대화록’을 보고 그만 ‘뚜껑’이 열려버려 대통령을 설득해 일을 벌였다고 볼 수도 있을 것이다. 혹은 정말로 박근혜 대통령이 의지를 가지고 애초 'NLL 대화록' 공개를 실행할 만하거나 그 실행을 약속한 남재준을 국정원장에 선임한 것일 거라고 추측할 수도 있다.
즉 일각에서 의심하는 것처럼 대통령이나 청와대가 처음부터 의지를 가지고 상황을 통제했을 가능성도 존재하지만, 그렇더라도 국정원장이 협력하지 않았다면 사태가 이런 식으로 전개되지는 못했을 것이다. 김무성의 발언으로 알려진 "원세훈이 협조를 안 해줘가지고" 운운이 시사하는 바도 그것이다. 이 말이 사실이라면 원세훈 전 국정원장은 비록 국정원을 이명박 전 대통령의 사조직으로 전락시킨 막중한 책임이 있지만, 적어도 자신이 하는 일들이 공개되어서는 적절하지 않은 일이라는 것을, 국정원이 나서서 정국을 주도하는 게 '모양이 좋아 보이지 않는다는 것' 정도는 인지하고 있었다고 평할 수 있다.
남재준과 윤창중의 유사성
남재준 국정원장에게 결여된 것이 그러한 종류의 인식이다. 결과적으로 그는 국정원의 정치개입을 결정하게 된 것이나 다를 바 없다. 신임 국정원장이, 국정원의 댓글 여론조작이 대북심리전이라는 터무니없는 주장은 받아들이면서, 자의적으로 공개등급을 긴급 조정하여 ‘NLL 대화록’을 공개해 진실(?)을 밝히는 것이 올바른 일이라고 봤다는 것이다.
오히려 국정원의 ‘명예’는 여론조작을 대북심리전이라 우기게 되면서 훼손당한 것이 아닌가. 그리고 이 훼손된 명예를 지키겠다며 대화록을 공개한 행위는, 나름의 의도는 순수했을지 모르나 또 한번 특정 정치세력에 편승하여 정국을 어지럽히는 결과를 낳은 것이 아닌가.
이것이 직원의 사기진작과 기관의 명예훼복에 관련되었다 믿는다면, 남재준 국정원장은 애초부터 그 기관의 역할을 잘못 인지하고 있는 셈이다. 간첩수사를 하는 상황이 아니라면 이 기관은 해외문제가 되었든 국내문제가 되었든 통치자에게 정보를 제공할 뿐이다. 전직 대통령의 발언이 자기가 보기에 부적절했다고 해서 그걸 공개해야 겠다는 판단을 내리는 것은 그의 책임범위를 한참 벗어난다. 결국 국가안보의 개념을 너무 편협하게 가진 전직 군인이, 국가안보와 정권안보를 구별하지 못하는 정치세력의 정치공세에 이용당하거나 이용당할 빌미를 준 셈이다.
그런 점에서 그의 결단에 의해 발생한 ‘남재준의 난’은 한국 보수의 수준을 까발림과 동시에, 박근혜 정부의 인사 참사를 드러내는 것이기도 하다. 경희대 이택광 교수가 트위터에서 한 지적처럼, “개인의 캐릭터가 정국에 파란을 몰고 온 건 윤창중과 동일한 양상”이며 “인사가 망사되는 일이 되풀이”되고 있다. 박근혜 정부에게도 민주당에도 득될 것 없는 ‘판도라의 상자’가 '낯 뜨거운 명예'를 핑계로 열려 버렸다. 이 사태를 누가 어떻게 수습할 것인가.
저작권자 © 미디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