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들이 얻어맞는다는 얘기가 심심찮게 들린다. 멀리 갈 것도 없다. 내가 아는 누구도 맞기 직전까지 갔다. 아니, 나부터도 몇 차례 '신분증을 까야 하는' 위협적 상황에 몰렸다. 마음이 불편하다. 겁도 나지만, 묘한 상실감 같은 것도 느낀다. 언론 자유에 대한 침해라고 하기엔 자가발전이 심한 것 같아 혼자 낯이 붉어진다. 반대로, 동업자가 맞는 게 싫어서라고만 하기엔 직업적 자존감을 스스로 깎아내리는 것 같아 도무지 찜찜하다.

기자 폭행에 대해 가장 기자 본위적인 반응을 보인 건 기자협회 성명서다. "시위대든, 진압경찰이든 그 어떤 이유로도 폭력은 정당화될 수 없다…특히 언론인, 언론사에 대해 자신들의 불만을 폭력적으로 드러내는 것은 결코 있어선 안 된다…취재 현장에서 국민의 알 권리를 위해 취재하는 기자들은 자유롭게 보도할 권리를 갖고 있다…기자들이 인신의 위협을 느끼는 상황에서는 언론 자유도, 국민의 알 권리도 지켜질 수 없다."

▲ 한겨레 6월 30일자 4면
시위대에게 위협을 받는 조선일보 기자를 경향신문 기자가 구해줬다는 얘기가 인터넷에서 회자되고 있기도 하다. 조·중·동과 거기에 속한 기자들을 향한 시위대의 반감을 보여주는 사건이지만, 기자들 사이에서는 미담에 가깝다. 경향신문의 그 기자가 일반시민들도 그렇게 구해준 게 아니라면 역시 '기자의 자유롭고도 안전한 취재가 언론 자유와 국민의 알 권리를 지키는 보루'라는 직업의식, 좀 더 솔직하게 말하면 동업자 의식이 작동한 것일 수 있다.

기자협회의 반응과 대척점에 있는 반응은 이쯤 되지 않을까 싶다. "야당 국회의원도 얻어맞고, 민변 변호사도 얻어맞고, 의료지원단도 얻어맞는데, 기자가, 그것도 조·중·동 기자가 위협 좀 받는 게 뭔 대수냐?" 시위대 입장에서는 일반시민이 두들겨 맞는 것과 별반 다르지 않고, (일부의 경우 맞아 마땅하고), 경찰 입장에서는 공권력이 맞는 것보다 대수롭지 않을 수도 있다. 폭력이 난무하는 공간에서 기자만 중뿔나게 보호받아야 한다는 법은 없으니까.

하지만, 기자가 얻어맞는 것은 폭력의 일반 범주에서 벗어나 있다고 느끼는 것도 기자들만의 자기도취는 아니다. 기자가 맞는 것은 확실히 개가 사람을 무는 쪽보다 사람이 개를 무는 쪽에 가깝다. 주권자로부터 선출되지 않았고, 위임받지도 않은 '자유롭고 안전하게 취재할 권리'가 민간기업(언론사)에서 발행한 사원증이나 프레스 완장 하나로 보장받아야 한다는 신화가 제법 넓고 짙게 퍼져 있음을 가장 잘 아는 것 역시 기자들 자신이다.

더구나 '기자는 폭력으로부터 보호받아야 한다'는 보편론은 기자 자신의 폭력성 앞에서 머쓱해지곤 한다. 몇 해 전 ○○일보 기자가 "내가 누군지 알아"("나 청와대와 친한 기자야")라며 나이든 택시기사를 두들겨 팬 사건, 그보다 몇 해 앞서 △△방송 기자가 수습생활을 마친 날 출입처인 경찰서에서 난동과 추태를 부린 일, 수습이 끝난 기자들에게 본사 앞 파출소를 때려부수게 하는 □□일보의 유구한 전통은 기자의 폭력으로부터 보호받아야 할 대상이 적지 않다는 걸 보여주는 삽화들이다.

▲ 중앙일보 6월 30일자 2면
그래서 기자가 폭력 피해자냐 폭력 유발자냐 하는 물음 구조는 본질을 비트는 설정인지 모른다. 기자는 두 모습을 함께 가지고 있다. 5공 때 기자는 문공부의 보도지침을 어기면 안기부 남산 분실에 불려가 진짜 뼈가 아픈 고통을 당했고, 그 보도지침을 폭로한 기자는 국가보안법 위반과 국가모독죄로 감옥에 갔다. 하지만 대부분의 기자는 그런 축에도 끼지 못했다. 거악 앞에서 소심하고, 소악 앞에서 대담했다. 거악 밑에 순종하며 소악 위에 군림했던 기자는 폭력의 장에 참여한 플레이어이기 십상이었고, 폭력의 하청업자이기를 자청했다. 폭력의 위계 구조 위에서 사다리를 타는 존재였다.

기자들이 다른 직업군에 견줘 유독 소심하거나 기회주의적이어서는 아닐 것이다. 기자는 애초 직업 자체가 박쥐와 같다. 공권력도 아니고 일반시민도 아니다. 공적 의제를 다루면서도 민간기업 소속이다. 전쟁터에서 적십자사 소속 의료인은 그나마 객관적 의술로 존재를 입증하지만, 종군기자의 객관주의란 일껏 주관성의 알리바이(현장부재증명)이기 십상이다. 의사의 메스는 국적에 상관없이 환부를 가르지만, 기자의 카메라는 진압경찰 쪽에서 찍을 때와 시위대 쪽에서 찍을 때 전혀 다른 기호학적 맥락을 만들어낸다.

촛불 정국에서 보편적 사실 전달자로서 기자의 위상은 매우 협소하다. 어느 한겨레 기자는 시민이 '압수'한 살수차 사진을 찍다 채증을 의심받았는데, 사원증을 보여준 뒤 "한겨레, 한겨레" 하는 전폭적인 연호를 받고 오히려 머쓱했다. 그 기자는 전경 대열 뒤쪽에 갔다가 공권력의 보호막 뒤에서 취재하는 조선일보 기자를 목격했다. 시민 쪽에서 취재하는 기자의 프레스 완장은 경찰의 진압 국면에서 무기력하고, 경찰 뒤에서 취재하는 기자는 경찰보다 먼저 퇴각한다.

폭력으로부터 자유로운 기자의 직업적 안전망이란 취재영역에 이성과 합리성이 작동할 때, 그 이성과 합리성이 동의할 수 없는 상대에 대해서도 관용적일 때, 겨우 확보된다. 그러나 그걸 현실 속에서 기대하는 건 (남성 기자의 경우) 왕자병이거나 (여성 기자에겐) 공주병일 것이다. 그 미망의 극단에 폭력, 심지어 죽음이 기다리기도 한다. (알카에다에게 살해당하는 서방 언론인들을 보라.) 기자는 이성보다 훨씬 순정한, 그러나 비우호적인 감성을, 이성의 아스라한 보호막 위에서 취재해야 하는 것이다.

<미디어스> 안현우 대표기자는 촛불집회 초기에 전경버스 지붕 위에 올라가 시민들 사이에서 취재를 하다 경찰에 폭력적으로 연행됐었다. 안 기자는 기자에게 가해지는 물리적 폭력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평범한 시민이 집회 현장에서 얻어맞는 만큼만 기자도 맞으면 된다"고. 기자는 양쪽 모두의 폭력 또는 위협에 노출돼 있지만, 양쪽의 폭력성은 결코 등가적이지 않다. 그 심각한 비대칭을 읽어내고, 그 기우뚱한 역학관계를 그대로 전달하는 게 기자의 직업적 숙명인 것 같다.

기자는 이성과 합리성이 감성과 균형을 세우는 보도, 민주주의의 가치를 믿는 시민들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는 보도, 얻어맞는 시민뿐 아니라 제 뜻에 반해 청춘의 한 때를 국가동원 체제에 끌려나온 전·의경들을 국가폭력의 구조 위에서 바라보는 보도, 꽃으로도 때리지 말라는 비폭력의 인권 감수성을 정교하면서도 거시적으로 읽어내는 보도를 할 때, 어느 쪽으로부터도 얻어맞지 않는 비폭력의 영토를 확보할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이 박쥐의 숙명이다. 그러고도 또 얻어맞으면 그때 가서 다시 생각해 보자.

저작권자 © 미디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