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한국일보 기자들은 편집국이나 출입처가 아닌 서울 중구 한진빌딩 신관 1층 로비로 '출근'한다. 회사측의 편집국 폐쇄로 인해, 평소처럼 취재를 하거나 기사작성을 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오전 9시에 출근한 기자들은 총회, 집회 등을 가진 이후 출입처로 흩어진다. 취재가 아닌, 동료 출입기자들에게 한국일보 상황을 알리기 위해서다. 20일부터는 청와대, 국회, 검찰청, 광화문 등지에서 1인시위도 시작했다. 기자 170여명이 이렇게 편집국 주위를 배회하고, 외부의 조력을 구하는 사이 15층 편집국 안에서는 한때 '선후배'였던 회사측 간부 등이 '짝퉁 한국일보' 제작에 힘을 쏟고 있다.

▲ 한국일보 기자들은 20일부터 청와대, 국회, 검찰청, 광화문 등지에서 1인시위를 시작했다.(언론노조 한국일보지부 비대위 제공)

한국일보 사측이 '편집국 폐쇄'를 단행한 지 21일 기준으로 벌써 일주일 째다. 사상 초유의 사태를 두고, 언론 시민사회 뿐만 아니라 정치권까지 나서 "5공 시절에도 볼 수 없었던 전무후무한 폭거"라고 비판하고 있으나 한국일보 사측은 여전히 강경하다. 15일 편집국 폐쇄를 단행한 이후에도 짝퉁 한국일보 발행, 주필 보직 해임 등 연일 강수를 두고 있다. 전사회적인 지탄이 쏟아지고 있으나, 안중에도 없는 모양새다.

장재구 회장의 무리수, 내부선 "법적 처벌 피하려는 도박"

회사측의 초강경 대응을 놓고, 언론노조 한국일보지부 비대위 관계자는 "회장이 이렇게까지 나오는 이유는 200억 배임 혐의에 대한 검찰 수사밖에 없다. 혐의가 워낙 명확하니까 법적 처벌을 피하려, 무모한 도박을 벌이고 있는 것"이라고 분석했다. 사회부 A기자 역시 "배임 혐의에 대한 검찰 수사 등이 장재구 회장에게 유리하게 나온다고 하더라도 그동안 쌓인 여러 범법행위로 인해 (장재구 회장은) 법적 처벌을 피할 수 없다"며 "장재구 회장으로서는 다른 카드가 없기 때문에 계속 극단적인 모습을 보이는 것 같다"고 해석했다.

논설위원들까지 한국일보 사태에 대해 "십 수 년 언론사란 보호막에 싸여온 경영의 비리와 탈법, 부도덕의 적폐를 이제는 털어내 한국일보를 바로 세워야 한다는 데 200여명 기자 거의 전원이 뜻을 모은 것이 발단"이라고 강조할 정도로, 장재구 회장의 전횡에 대한 구성원들의 분노는 임계점을 넘어섰다.

노사 대화는 전혀 진전되지 못하고 있다. 18일, 이상석 부회장과 비대위 측에서 만남을 가졌으나 '앞으로 이야기를 하자'는 수준에 그쳤다. 정상원 언론노조 한국일보지부 비대위원장은 "이번주 초에 이상석 부회장과 만나, '앞으로 이야기를 하자'고 한 것 외에는 전혀 접촉이 없다"며 "저희는 대화를 하자는 입장이지만, 회사 쪽에서 전혀 연락이 없다"고 말했다. 이번 사태와 별개로 19일은 노사 임금협상 예정일이었으나, 회사측 관계자들이 자리에 나타나지 않은 것으로 전해졌다.

이에 대해 사측 관계자는 "앞으로 대화를 해볼 생각"이라면서도 "한달 넘게 협상을 계속 했었으나 서로 안되는 부분이 있었다. 노조가 인사 전면 철회를 요구하면, 우리는 할 수가 없다"고 밝혔다. 비대위 관계자는 "결국 회장이 결정하는 건데, 여전히 강경한 것"이라고 지적했다.

검찰수사 결과 나오지 않는 한 당분간 평행선 달릴 듯

검찰의 배임혐의 수사결과 등 외부의 법적 판단이 내려지지 않는 이상 한국일보 사태는 당분간 평행선을 달릴 것으로 보인다. '장기투쟁'이 예상되는 상황이지만, 한국일보 기자들의 전망은 결코 어둡지 않았다.

18년 넘게 한국일보에서 일한 B기자는 "단기간에 끝날 싸움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어려운 싸움이지만, 전망은 어둡지 않다"며 "흐지부지 묻힐 수도 있었던 한국일보 사태가 '편집국 폐쇄'로 인해 미디어면에서 가장 관심을 받는 뉴스로 부각되고 있다. 회사의 무리수가 오히려 사태해결을 앞당길 것"이라고 전망했다.

B기자는 "회사가 사설 집필을 거부한 정병진 주필의 보직을 해임하고, 한국일보 기자들이 알지도 못하는 사람을 논설위원으로 세운다는 것도 마찬가지다. 바깥에서 보기에도 이해할 수 없는 일"이라며 "(강병태 전 논설위원실장이 주필 자리를 받아들인 것도) 본인의 기자 인생, 논설위원 인생을 한꺼번에 잃어버리는 결과를 낳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어, "사태가 이지경까지 됐기 때문에 검찰도 더 이상 눈치보며 질질 끌지는 못할 것"이라며 "핵심은 '범죄인 단죄'"라고 강조했다.

사회부 A기자는 "구체적으로 말하긴 어렵지만, 조만간 장재구 회장 소환의 윤곽이 나올 것"이라며 "결정의 시기가 임박했다는 이야기가 들리고 있다"고 전했다. A기자는 "오히려 노조 안에서는 대열의 이탈이 없는데, 회장 측에 선 간부-기자들 사이에서 이탈의 징후들이 보이고 있다"며 "(10여명으로 신문을 제작하는 것은) 더 이상 답이 안나온다'는 내부 논쟁도 있었다고 전해들었다"고 밝혔다.

이와 관련해 사측 관계자는 "노조가 곳곳에서 지키고 있어서 밖으로 못나와, 답답하고 힘들어 한다. (간부들이) 무슨 죄가 있느냐"고 반문했다. 이 관계자는 "(폐쇄 조치 이후) 확약서에 서명한 기자들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라며 "신문 제작이 제일 급한 사안이기 때문에, (기자들을 설득하기 위해) 확약서 서명이 너무 부담스럽다면 방법의 측면에서는 좀 융통성있게 해보려 한다"고 말했다.

저작권자 © 미디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