큰일 났다. 미국산 쇠고기 수입 문제와 촛불시위에 온 국민의 시선이 쏠린 틈을 타 한나라당을 비롯한 수구·보수세력의 개헌 총공세가 시작됐다. 개헌 주장이나 논의가 어제 오늘 시작된 것은 아니다. 그런데 지금까지는 특정 정파가 정치적 목적을 가지고 거론하는 수준이었으나, 이제는 여야 정치권 모두가 이에 매달린 양상이다. 이런 분위기에 자신감을 가져서인지 원내 과반수를 장악한 한나라당 국회의장 내정자인 김형오 의원은 ‘연구’의 수준을 넘어 구체적인 개헌안 제출과 처리 시한까지 못 박으며 단단히 밀어붙일 태세다. 2010년 6월 전까지 개헌을 끝내겠단다. 여야 모든 정당 소속 국회의원들이 모임에 가입해 본격적으로 개헌 논의를 시작했다. ‘촛불혁명의 87년 판’이라 할 수 있는 ‘6·10민중항쟁’을 통해 쟁취한 1987년 헌법을 개악하려는 것이다. 만에 하나, 이를 저지하지 못하면, 피해자는 결국 촛불시위에 나왔거나 촛불시위를 안방에서 지지했던 서민, 대중들이 될 것이다. 그래서 큰 일 났다는 것이다. 개헌 논의에 도사린 함정과 위험성을 몇차례 나누어 파헤친다. 촛불들이여, 헌법 119조 2항을 사수하자! <편집자 주>

기자가 개인적으로 ‘국보(國寶)’라고 생각하는 몇 사람이 있다. 물론 정부에서 발표하는 인간문화재 말고 각 분야에서 빛과 소금 역할을 하는, 그래서 우리 사회가 국보처럼 대접을 해 줘야 할 사람들이다. 우상숭배하자는 것이 아니다.

그 국보들 중 한사람이 김종인 전 의원(민주당 비례대표)이다. 강직과 청렴으로 유명한 초대 대법원장 가인(街人) 김병로(金炳魯: 1888~1964) 선생의 손자다.

김종인 의원의 기막힌 예언 적중과 삼성의 위헌 소송

선생이 일찍부터 변호사가 되려는 꿈을 갖고 있었는데, 그 이유는 “일정(日政)의 박해를 받아 비참한 질곡에 신음하는 동포를 위하여 도움이 될 수 있는 행동을 하려는 것이며, 변호사가 되면 첫째, 아무리 일본경찰이라도 변호사를 쉽게 폭행하거나 구금하기는 어려울 것이며, 둘째 변호사 수입을 사회운동을 위한 자금으로 쓸 수 있고, 셋째, 공개법정에서라도 정치투쟁을 전개할 수 있으며, 인권옹호와 사회방위를 위한 사업이 될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실제 김병로 선생은 일제 치하에서 법정투쟁을 통해 투옥된 독립투사들을 구하는데 온 몸을 던졌다.

가인 김병로 선생의 손자사위 중의 한 사람이 윤영철 전 헌법재판소장이다. 김종인 전 의 의원의 사촌 매형이다.

김종인 전 의원은 노태우 전 대통령의 ‘경제가정교사’ 역할도 했다. 노태우 정부 때 도입된 토지공개념과 재벌의 비업무용 토지에 대한 과세 등도 김종인 의원의 작품이다.

119조 2항, 87년 헌법의 핵심 중의 핵심

기자가 그를 국보로 생각하는 것은 단 한 가지 이유 때문이다. 그가 헌법 119조 2항 도입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기 때문이다. 119조 2항은, 우리 헌정 사상 최초로 여야 합의로 탄생한, 1987년 헌법의 '핵심 중의 핵심'이다. 그가 아니었다면, 헌법 119조 2항은 태어나지 못했을 것이다. 이른바 ‘경제민주화 조항’이다.

우선 그 내용을 보자.

헌법 제119조
① 대한민국의 경제 질서는 개인과 기업의 경제상의 자유와 창의를 존중함을 기본으로 한다.
② 국가는 균형있는 국민경제의 성장 및 안정과 적정한 소득의 분배를 유지하고, 시장의 지배와 경제력의 남용을 방지하며, 경제주체간의 조화를 통한 경제의 민주화를 위하여 경제에 관한 규제와 조정을 할 수 있다.

말하자면 경제에 관한 내용을 담은 헌법 9장의 첫째 조항으로 이 조항 때문에 정부와 국가가 '경제에 관한 규제와 조정' 정책을 입안, 시행할 수 있는 것이다. 이 조항은 국가의 시장 개입과 공적 기능에 정당성을 부여하는 헌법적 근거 역할을 하고 있다.

이 조항이 사라지면 어떻게 될까? 상상만 해도 끔찍하다.

노무현 정부 임기 막판에 재벌과 한나라당 등의 총공세로 다시 개악되긴 했지만, 금융산업구조개선에 관한 법률(금산법)을 통해 금융자본과 산업자본을 분리하므로써 특정 재벌의 독과점과 경제력의 남용을 방지하고, 경제주체간의 조화를 이루기 위한 여러 경제정책들을 쓸 수 있는 것도 헌법 119조 2항이 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그 뿐이 아니다. 가령 그린벨트와 같은, 개인의 재산권 행사를 제한하는 정부 조치도 마찬가지다. 우리나라 헌법의 기조는 우리나라의 정치, 경제사회적 여건과 특성에 맞추어 자유로운 시장질서를 인정하되, 경제주체간의 조화와 균형발전을 도모하려는 것이다.

부익부 빈익빈과 양극화가 갈수록 심화하고 있고 중산층이 사실상 붕괴하고 있는 상황에서 정부가 이를 막기 위해 필요한 ‘규제와 조정 정책’을 쓰려고 해도, 이 조항이 없어지면 불가능한 것이다.

멀리 갈 것도 없다. 119조 2항이 없으면, 삼성이 제출한 금산법에 관한 헌법소원 사건에서 헌법재판소는 위헌 판결을 내리게 되어있다.

왜, '김종인 조항'이라 부르는가?

이 조항을 도입하게 된 배경을 듣고 나면 가슴을 쓸어내리게 된다.

이 조항은 1987년 헌법 개정을 논의할 당시 국회에서 여야합의로 구성한 헌법개정특별위원회 경제분과 위원장이던 김종인 의원(당시 민정당 의원)이 주도해 도입한 것이다.

당시 이 조항 도입에 대해 국회와 정부의 거의 모든 관계자들은 말할 것도 없고, 특히 재벌 등 재계도 격렬하게 반대했으나 김종인 의원이 전두환 당시 대통령을 직접 설득해 재가를 받는 바람에 반대 바람을 잠재울 수 있었다고 한다. 그래서 혹자는 이 조항을 '김종인 조항'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김종인 의원은 한국외국어대 독어과를 졸업하고 독일로 건너가 뮌스터대학에서 경제학박사학위를 취득한다. 그는 그 후 서독 기민당의 아데나워 수상 밑에서 경제장관을 지낸 에르하르트를 존경하고 연구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라인강의 기적 이룬 '사회적 시장경제' 이념 담겨

루드비히 에르하르트 (Ludwig Erhard: 1897-1977)는 ‘라인강의 기적’을 이룩한 설계자이자 아버지로 불리는 사람이다. 그는 2차 세계대전 후 경제장관(1948~63)을 지내면서 독일(서독)의 경제복구를 주도했으며, 1963~66년 총리를 역임했다. 그는 나치에 오염되지 않은 전문 경제학자로서 전후 독일을 점령한 연합군 당국에 의해 뉘른베르크-퓌르트 지역의 산업을 재건하는 책임자로 임명되었다.

그는 경제를 재건하는 데 있어서 ‘사회적 시장경제 이론’을 적용하여 '라인강의 (경제)기적'으로 불리는 놀랄 만한 성과를 거두었다. 그는 1957년 부총리로 임명되었고, 1963년 10월 아데나워의 뒤를 이어 총리가 되었다.

김종인 의원이 에르하르트를 존경하고 연구한 것이 결과적으로 헌법 119조 2항을 도입하는 계기가 된 셈이다. (<아주 사적인 정치비망록>(남재희 지음, 민음사, 2006) 중 ‘개헌...제119조 2항, 헌재(憲裁), 편집권독립’ 참조)

1987년 개헌작업 당시 김종인 의원은 119조 2항의 조문을 직접 작성하면서 서독 기본법의 제14조와 15조 등을 참고한 것으로 보인다.

*서독 기본법
제14조(소유권, 상속권, 공공수용).
① 소유권과 상속권은 보장된다. 그 내용과 한계는 법률로서 정한다.
② 소유권에는 의무가 수반된다. 그 행사는 동시에 공공의 복지에 이바지함이 필요하다.
③ 공공징수는 공공의 복지를 위하여서만 허용된다. 그것은 보상의 방법과 정도를 규정하는 법률 또는 법률의 근거에 의하여 행해진다. 보상은 공공 및 관계자의 이래를 공정히 고려하여 결정되어야 한다. 보상 금액에 관하여 다툼이 있을 때에는 통상재판소에 소를 제기할 수 있다.

제15조(사회화): 토지, 천연자원 및 생산수단은 사회화(Vergesellschaftung:영어로는 'public ownership'으로 번역)의 목적을 위하여 보상의 방법과 정도를 규정하는 법률에 의하여서 공유재산 또는 다른 형태의 공공경제로 옮길 수 있다. 보상에 대하여서는 제14조 제3항 제3단 및 제4단을 각각 적용한다.

김종인 의원 직접 119조 2항 작성, 전두환 설득해 반대 세력 물리쳐

1987년 개헌작업 당시 김종인 의원과 함께 개헌특위 위원으로 활동했던 남재희 의원(후에 노동부장관을 지냄)으로부터 87년 헌법개정안 확정 당시 에피소드를 들어보자. (앞의 책 참고)

김종인 의원이 마지막 개헌안 문안을 갖고 청와대로 보고하러 갔을 때, 전두환 대통령은 제119조 2항을 혹시라도 재계가 싫어하지 않겠느냐고 물었고, 김 의원은 “그 조항은 경제 활동에 아무런 지장이 없는 것이며, 다만 미국에서 루스벨트 대통령이 뉴딜 입법을 할 때 대법원이 위헌판결을 한 적이 있는데 그런 사태에 대비하기 위한 것”이라고 설명했다고 한다.

남재희 전 장관에 따르면, 나중에 자신이 개헌문제와 헌법 119조 2항에 대한 글을 쓰려고 하자 김종인 의원은 이 조항을 도입하게 된 배경을 자세히 설명했다고 한다. 굉장히 중요한 배경과 내용을 담고 있어 그의 책에서 그대로 옮겨 싣는다. 남재희 전 장관이 최근 프레시안(www.pressian.co.kr)에 기고한, ‘개헌 - 신자유주의 홍수 속, 둑에 구멍 내는 격’이라는 제목의 글에도 나와 있다.

김종인 전 의원의 설명이다.

“한국 경제는 1962년 1차 경제개발 5개년계획 이후 1980년대 중반에 이르기까지 자본주의의 역사에서 전례가 없는 압축 성장을 이룩하였다. 압축 성장은 자유시장경제에 의하여 이루어진 산물이 아니다. 이것은 정부가 경제성장에 효율만을 강조하여 일부 대기업 집단에 자원을 인위적으로 집중 배분함으로써 가능하였다.

이 과정에서 재벌그룹이라는 거대 경제 세력이 탄생하게 되었다. 경제발전 초기에는 경제세력이 정치세력에 압도적으로 열세이다. 하지만 경제세력은 지속적인 경제성장과 함께 점차적으로 확대되어 경제뿐만 아니라 경제력을 바탕으로 정치·사회에 실질적인 영향을 행사하게 되고 이로써 정치세력을 압도하게 된다.

이런 상황에서 정치세력이 사회 조화를 위하여 경제세력을 견제하기 위한 방법으로 제도적 장치를 마련하게 되면 경제세력은 자본주의의 자유시장경제라는 명분을 내세워 저항한다. 이 경우 한국과 같은 현실에서 경제세력은 언론, 법률가 등을 총동원하여 헌법소원이라는 방식으로 정치세력의 의도를 무산시키려 최대의 노력을 할 것이다.

결과는 정치세력은 좌절할 수 밖에 없고 사회 조화는 이룩될 수 없다. 이에 대한 역사적인 사례는 프랭클린 루스벨트 미국 대통령이 뉴딜 정책을 법제화하였을 때 미국의 각종 이익집단들이 위헌(소송)을 제기하고 이를 대심원(대법원)이 수용한 데서 찾을 수 있다. 헌법 제119조 2항은 이러한 사태가 발생할 것에 대한 안전판을 마련한 것이다.”

김종인 의원의 예언 정확히 맞아 떨어져

김종인 의원의 예언은 한 치도 어긋남이 없이 그대로 맞아 떨어진다. 한국 최대 재벌로 부상한 삼성그룹은 시장질서를 어지럽히며 각종 불공정행위를 서슴지 않았고, 이에 대한 공정거래위원회의 제재조치에 대해 헌법소원을 제기했다. 또 금융자본과 산업자본의 집중과 독점을 방지하려는 '금산분리’ 정책에 대해서도 위헌소송을 제기한 상태다.

삼성 뿐만 아니라, 전경련 등은 오래 전부터 헌법 119조 2항을 없애기 위해 호시탐탐 기회를 엿보고 있다. 좌승희 박사와 민경국 교수가 헌법 119조 2항 철폐를 주장하는 대표적 인물들이라는 게 남재희 전 장관의 평가다.

좌승희 박사의 주장을 남재희 전 장관의 프레시안 기고 글에서 재인용한다.

"좌 원장은 '차별·선택·복제(증폭)의 과정을 거쳐 경제가 발전한다'는 '복잡계 경제발전원리'를 내세웠다. '발전은 성공하는 주체에게 더 많은 인기와 부좌승희 박사는 전경련 산하의 경제연구원 원장 때부터 제119조 2항 삭제를 주장해 왔는데 그의 견해는 <동아일보>(5.31)에 잘 나타나 있다.

좌 원장은 '차별?선택?복제(증폭)의 과정을 거쳐 경제가 발전한다'는 '복잡계 경제발전원리'를 내세웠다. '발전은 성공하는 주체에게 더 많은 인기와 부·명예를 안겨줘 차등과 차별을 만드는 과정'이란 설명이다. 이를 통해 사회 전체의 부가 늘어난다는 것이다….

선진경제 도약을 위한 해법으로 '차별화를 통한 무한경쟁'을 제시했다. 그는 '중소기업·농민·근로자·지방·지방대학·낙후지역 혹은 약자라야 대접받는다는 생각에서 벗어나도록 해야 한다'며 '홀로 서서 성공하는 사람을 더 우대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를 위한 구체적 대안으로 △ 수도권 규제 철폐 △ 평준화 교육 탈피 △ 대기업 역차별 및 중소기업 우대 금지 등을 들었다."


일단 개헌 논의가 본격적으로 시작되기만 하면 삼성을 비롯한 재벌들은 이 조항을 없애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총력전을 펼 것이 불을 보듯 뻔하다. 87년 당시의 삼성과 재벌들의 영향력과 지금의 그들의 총체적 영향력과 지배력은 땅과 하늘 차이 정도다.

게다가 18대 국회 의석분포를 보면, 한나라당 등 보수적인 성향의 의원들이 개헌안 의결정족수인 3분의 2를 차지하고 있다.

개헌논의가 시작됐는데 어떻게 권력구조만 논의하겠는가? 권력구조를 논의하면서 어떻게 대통령 중심제를 전제로 한 임기문제만 논의하겠는가?

한나라당 국회의장 내정자인 김형오 의원 등도 노골적으로 “1987년 (헌법)체제를 바꿀 때가 되었다”고 주장한다. 권력구조 뿐만 아니라 헌법 전반을 새로 쓰겠다는 것이다.

헌법 119조 2항 사수에 촛불들이 나서야 하는 이유

여기서 한 가지 주목할 것이 바로 한국 사회 전반의 세력 분포다. 헌법을 풀어쓰면 '기본법(the basic law)'이다. 헌법은 '최고의 법(the supreme law)'이기도 하다. 그 국가의 이상과 이념 및 정체성과 이루려고 하는 목표를 담고 있기도 하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헌법을 창출(제헌 혹은 개헌)하는 과정이란 측면에서 접근하면, "개헌 혹은 제헌 당시 (정치, 경제, 사회 등 모든 요소를 망라한) 모든 세력 사이의 (정치적) 타협의 산물'로 정의할 수도 있다.

따라서 역사상 사례가 많지 않은 '민중항쟁'을 통해 민주세력의 열망이 그나마 반영된 상태로, 개헌 역사상 처음으로 여야 만장일치 합의로 만들어낸 '1987년 헌법'을 모든 세력과 이들 사이의 역학관계가 완전히 바뀐 지금, 고치자고 주장하고, 논의를 시작하는 것 자체가 너무나 위험하다는 것이 기자의 생각이다.

김대중·노무현 정권 10년 동안 신자유주의 정책으로 인해 한국 사회는 8:2의 사회에서 9:1의 사회가 돼버렸다. 부익부 빈익빈, 사회양극화가 한층 심화한 것이다. 그런데 김대중, 노무현 정부가 ‘소극적, 방어적’ 차원의 신자유주의 정책을 폈다면, 이명박 정부는 대단히 '공격적이고 적극적인 신자유주의' 정책을 천명하고 있다. 이명박 대통령은 미국에서도 이미 한계를 드러내고 비판의 도마 위에 올라, 폐기 일보직전에 있는 신자유주의 정책이 무슨 만능 해결사인 것처럼, 여기에 목을 매고 있는 형국이다.

이런 상황에서 헌법 119조 2항의 폐기는 곧 국가적 재앙이 될 것이다. 촛불들이 나서, 개헌 논의와 개헌 기도 자체를 저지해야 하는 이유다.

* 다음 기사는 '한미 FTA 비준되면 헌법이 무너진다'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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