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문경 시인의 세 번째 시집 <엄마 생각>이 출간되었다. <항상 난 머뭇거렸다> (2003년)에서 일상생활에서 발견한 삶의 비밀을, <노란 장미를 임신하다> (2008년)에서 아모르파티적인 생의 긍정, 기쁨, 열정 등을 노래했던 시인은 이번 시집에서도 기존의 시적 관점을 고스란히 반영하고 있다. 좀 달라진 부분이 있다면 신자유주의 시대의 사회적 갈등과 현실 문제에 대한 관심과 부드러운 저항의 목소리가 읽힌다는 점이다.
뭉쳐진 설움은 부드럽게 흔들릴 수 없는 것
35m 크레인 위에 올라가 해고자 복직 투쟁을 하고 있던 김진숙 씨는 공교롭게도 시인과 고등학교 동창이다. 전혀 다른 생의 길을 걸어왔던 두 사람은 각자 다른 자리에서 첨예하게 만나게 된다.
고등학교 때 시험문제 틀린 것을 따지는데
육성회비도 밀렸다고 야단맞자
그 길로 교실을 뛰쳐나와
삼십 년을 걸어 올라간 저 아이와
이제는 사장 부인으로 사는 시인 조문경
그 사이에는 삼십 년 넘는
눈부신 불통(不通)의 성장만 있었다
- 「진숙이의 요구」 부분
시인의 눈에는 어쩌면 그녀의 싸움이 「국화의 춤」처럼 보였을지도 모른다. ‘갑자기 돌풍 불자/꽃송이 처박듯 흔들리고/ 순식간에 다시 꼿꼿이 서는’ 국화꽃은 ‘뭉쳐진 설움’이며 ‘결코 부드럽게 흔들릴 수 없는 것’이다. 그래서 시인은 묻는다. ‘당신은 아시나요/ 물러설 곳도 없는 사랑을 가진/ 국화의 춤을’ 이라고.
시인이 바라본 자본주의 현재, 혹은 미래는 ‘뱀이 개구리를 삼키고 도로에서 납작하게 죽어 있는 형상으로 비쳐진다. 튀어나온 뱀의 창자에서 삼켜졌던 개구리도 함께 쏟아져 나와 죽어 있는 모습은 공멸을 예감하고 있다. (「어떤 동행」)
갯벌에서 진흙을 뒤집어 쓴 채 서로를 향해 몸을 날리며 싸우는 짱둥어의 싸움처럼 저들이 왜 그러는지 시인은 알 수 없지만, 태풍 속에서도 아름다운 순천만의 풍경에 감탄하면서도 세상은 늘 화염 없는 생의 긴장이라는 인식에 이른다. (「싸움에 대해」)
알고 보면
부딪힘이다
산다는 것 전부가
눈뜨는 순간부터 눈감을 때까지

나는 밀고 가고
세상은 열린다
딱딱함이 부드러움으로 바뀌면서
때론 상처도 내지만

가장 큰 고통에서
잠자던 이성의 피가 돌아
사랑의 탄성
터지기도 하느니

부딪힘에서
지금, 눈뜬다
나는 저항抵抗을 섬겨
부드러움으로 바꾸는
사랑을 한다
- 「부딪힘」 전문
생은 온통 부딪힘이지만 시인은 부드러운 힘으로 세상을 열어젖히길 희망한다. ‘저항을 섬겨 부드러움으로 바꾸는 사랑’을 하려고 한다.
우리가 꿈꾸는 세상
시인은 벤자민 화분에 함께 핀 흰 꽃과 노란 괭이밥 꽃의 아름다운 공존을 바라본다.
참으로 共하고 和한 國이다
저들의 배짱 아닌 천성이 새삼 부러워
다 아는 이야길 또 해보고 또 해보고 계속 해보고 싶은 것이다
- 「共和國에 대해」 부분
시인이 꿈꾸는 세상은 잊히지 않는 어린 시절의 뒷산과 같은 것이다. 엄마는 밭일하고 마루에서 목침 베고 모로 누워 깜박 잠 주무실 때 문간에서 보던 엄마 몸의 굴곡 같은 것이다. 자연스러운, 자연과 하나가 된 산. 모든 생명을 품고 섬기며 함께 살아가는 산. 내가, 우리가 살고 또 까마득하게 자라야 될 몸과 같은 세상이다. (「잊혀지지 않는 뒷산」)
부드러운 저항과 사랑으로
그런데 시인의 저항 방식이 독특하다. 여성성과 부드러움, 경계에서 출렁임과 같은 저항이다. 그것을 하나의 장면으로 묘사한다면 ‘한 겨울 도로 옆 맨홀 구멍에서 하얀 김이 오르는 것’과 같다. 바람을 품고 크게 휘어지고 몰아치며 스미는 방식의 저항이다. 겨울밤을 껴안는 용맹하면서도 한없이 부드러운, 추울수록 더 강렬하고 깊숙해지는 춤과 같은 저항이다. (「겨울 무곡」)
그래서 시인은 한없이 작아지려고 한다. ‘작다는 것은 미성숙이 아니라 과장된 성숙을 덜어낸 겸손’이기 때문이다. 그냥 참 작기만 한 냉이 꽃과 친구가 되려면 내가 작아지고 섬세해져야 한다고 말한다. (「냉이꽃은 작다」)
공터 가득
냉이꽃 피었다
몸보다 길게 길게 목을 빼고
자기 가장 높은 곳에
잘 보이지도 않는
꽃 달고
바람에 흔들린다
격렬하게도 고요하게도
마음 속 오지로의 여행처럼
그래 먼 길 가는 행장은 간소하다
다른 이의 눈에 띠는 것도 불편하다
찬란한 노지(露地)에서의 잠
빗속에서의 고독
바람을 헤치는 행군
가장 멀리까지 사랑에게 가는 사람은
냉이꽃처럼 작아진다
경건해지는 것이다
- 「냉이꽃, 경건한 까닭」 전문
먼 길을 가기 위해서는 행장을 간소하게 해야 한다. 다른 이의 눈에 띄지 않고 노지의 잠을 불편해 하지 않으며 고독한 행군을 해야 한다. 가장 멀리까지 사랑에게 가야 한다. 냉이꽃처럼 작아져서. (「냉이꽃, 경건한 까닭」)
때로는 뱉어 놓은 수박씨가 작은 수박을 맺듯이 자생적인 생명력을 살펴야 한다. 작은 수박 앞에서 우리가 작아질 때 오히려 수박이 커지듯이 작아지는 투쟁이 필요하다. (「가장 큰 수박」)
목동에서 자유로 거쳐 파주 광탄이라는 동네 벽초지 수목원 갈밭 사금파리 빛러럼 흔들리는 연못 한 귀퉁이에서 나를 부르는 어리연을 보는 것이다. 마치 그 꽃이 나를 불러서 찾아간 것처럼, 귀를 열고 마음을 열고 빨려들듯이 달려가는 것이다. (「어리연」)
시인이 말하는 부드러운 저항이란 떠돌면서 부서지는 자유를 노래하는 것이다. 새로움이란 버리는 것에서 왔음을 깨닫는 것이다. 아무런 감상도 없이 다시 가볍게 솟구쳐 올라 사랑이 되는 것이다. (「고엽의 노래」)
시인은 뜨거운 생의 긍정으로 환삼덩굴처럼 삶을 장악해 들어간다. 때로는 불꽃같은 연애로 생을 욕망하고 아이같이 천진한 마음으로 생을 끌어안는다. 경계에서 고민하며 되묻고 출렁이며 삶의 내밀한 구석을 가장 밝고 높은 자리로 위치이동 시켜 놓는다. 건강한 서정이 주는 충만함과 부드러운 저항으로 현실을 직시하게 하는 힘이 있는 시집이다.
이병승 님은 시인이자 아동문학가로 1989년 『사상문예운동』으로 문단에 나왔고, 경남신문 신춘문예, 푸른문학상, 눈높이아동문학상 등을 수상하였다. 작품집으로는 동시집 『초록 바이러스』와 장편동화 『톤즈의 약속』, 『여우의 화원』, 『난 너무 잘났어!』 『검은 후드티 소년』 청소년소설 『달리GO!』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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