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구의 미래를 그리는 요즘의 블록버스터는 한결같이 유토피아와는 작별을 고하고 디스토피아를 양산하고 있다. <스타트렉 다크니스>에는 미국과 영국, 프랑스에서 요즘 횡행하는 외로운 늑대형의 테러가 나타나고, <오블리비언>은 외계 생명체의 공격에 쑥대밭이 된 지구를 묘사한다.

갓 개봉한 <애프터 어스>라고 사정은 다르지 않다. 3072년, 인류는 지구를 등지고 노바프라임으로 이주한다. 한때 인간의 보금자리 역할을 하던 지구는 더 이상 사람이 살 곳이 되지 못한다. 사람이 자리를 비운 천 년 동안 지구의 생명체가 인간을 말살하기 위해 진화했기 때문이다.

지구상 모든 동물이 인간을 공격한다는 영화 속 설정은 가이아의 복수로 읽어볼 수 있는 대목이다. 지구의 역사를 24시간으로 볼 때, 자정 전인 11시 59분 59초에야 겨우 문명을 구축한 역사 가운데서 한낱 1초에 지나지 않는 인간의 행위로 말미암아 지구는 황폐화되었다.

우주선 고장으로 지구에 불시착한 사이퍼 레이지(윌 스미스 분)와 키타이(제이든 스미스 분)는 우주선 후미에 있는 통신기를 찾아야 구조 신호를 보낼 수 있다. 하지만 우주선의 후미는 지구에 불시착할 때의 충격으로 100km 밖에 있는 상황, 설상가상으로 사이퍼는 두 다리가 부러진 상태라 아들인 키타이가 아버지 없이 홀로 통신기를 찾아야만 한다.

<애프터 어스>의 큰 그림은 키타이의 성장 이야기이다. 용맹한 전사이자 장군인 아버지를 넘어서고자 레인저를 지원하고 아버지가 세운 기록을 갱신해도, 아버지에게 아들 이전에 용감한 레인저로 전사로 인정받는 건 머나먼 길이다. 키타이가 아버지의 명성을 이어받고 그의 진정한 후계자로 서는 일은 요원해 보이기만 한다.

만일 키타이가 착륙선 후미에 있는 통신기를 찾지 못한다면 두 다리를 다친 아버지의 목숨을 보전하지 못할 테니, 지구에서의 활약이야말로 아버지에게 인정받을 유일한 기회임에 분명하다. 키타이는 혈혈단신 통신기를 찾기 위해 100km의 머나먼 길을 달리고 여행한다. 여정의 중간엔 아버지와의 교신이 중단되기까지 하니 아버지라는 울타리를 벗어나 홀로서기의 주체로 무수한 시련을 겪게 된다. 아버지에게 인정받는 것을 초월하여 한 남자로서 홀로서기가 가능한가를 테스트 받는 셈이다.

키타이의 홀로서기는 ‘공포’와 맞서는 법을 배우는 것이기도 하다. 키타이는 트라우마가 있다. 눈앞에서 사랑하는 가족을 잃었기에 생긴 트라우마는 아버지의 그림자 이상으로 키타이를 괴롭히고 끈질기게 쫓아다닌다. 아버지와 교신이 끊어진 키타이는 한 남자로서의 홀로서기를 위해 공포를 극복해야 하는 과제를 껴안는다.

만일 키타이가 공포를 극복하지 못한다면 인간의 공포를 냄새로 추적하는 포식자의 제물로 전락할 위기에 처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애프터 어스>는 한 남자로서의 홀로서기 이전에, 공포를 극복하는 법을 배워야 하는 소년의 ‘통신기 찾아 삼만 리’ 여행이다.

하지만 <애프터 어스>는 M. 나이트 샤말란의 한계가 고스란히 드러난 SF 영화이다. 아버지에게 인정받고 아버지를 넘어서고 싶어 하는 아들의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를 제대로 짚어내기에는 M. 나이트 샤말란의 각본은 얄팍해 보이기만 하다.

부자 사이의 관계에 치밀하지 못한 각본의 한계 외에도 설정의 한계 역시 명확한 영화다. 불시착한 우주선 안에 오토바이나 자동차 혹은 미니 비행선 같은 보조 이동 장치 하나 없이 어린 소년이 갖은 고생을 겪어야 한단 설정의 빈약함은 아버지의 치료를 위해 100km의 길을 내달리는 제이든 스미스를 가학으로 내모는 결과를 초래하고야 만다. 이는 <7번방의 선물>이나 <몽타주>처럼 극적인 설정을 위해 어린이를 희생양으로 묘사하는 요즘 한국영화의 경향과 맞닿는 부분이기도 하다.

늘 이성과 감성의 공존을 꿈꾸고자 혹은 디오니시즘을 바라며 우뇌의 쿠데타를 꿈꾸지만 항상 좌뇌에 진압당하는 아폴로니즘의 역설을 겪는 비평가. http://blog.daum.net/js7kei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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