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라이트 성향의 단체 한국현대사학회가 집필한 고등학교 한국사교과서(교학사)가 검정심의 본 심사를 통과했다. 본 심사를 통과한 교과서들은 8월30일 최종 합격 여부가 발표된다. 역사교과서가 국정에서 검정으로 바뀐 '2007년 교육과정 개정 체제' 이후 최종 합격에 들지 못하고 탈락한 역사교과서는 없다고 한다.
경향신문은 1면과 3면, 4면에 걸쳐 해당 사실을 비판적으로 바라보는 기사를 실었다. 다른 언론에 비해 특출하게 많은 보도다. 프레시안도 기사를 쓰고 진보정의당도 논평을 냈는데 관점은 비슷비슷하다. ‘역사 우경화’가 문제라는 지적이다.
▲ 5월 31일 자 경향신문 1면 기사
사실 이런 문제는 진보언론이 아니라 인터넷상에서 더 큰 반향을 일으킨다. 많은 사람들이 뉴라이트의 주장을 몇 개의 키워드로 요약해 퍼트린다. 노컷뉴스의 기사 하나는 네티즌이 올렸다는 표를 인용하여 “표에 따르면 해당 교과서는 5.16 쿠데타를 5.16 혁명으로 표기하고 5.18 광주 민주화 운동을 5.18 광주항쟁으로 표기했다. 뿐만 아니라 독립운동가 김좌진, 안중근 등을 테러리스트로 보고 종군 위안부를 '성매매업자', '자발적인 경제단체'로 보고 있다”고 설명한다.
하지만 이런 식의 요약은 악의적인 왜곡이나 날조에 가깝다. 근거는 없지만 많은 사람들이 인터넷에서 그렇게 말하고 있으니 따라서 받아쓰며 욕을 하는 것에 불과하다. 노컷뉴스의 기사는 교과서를 읽어보지도 않고 네티즌들이 만들어낸 루머를 정보처럼 소개한 셈이다. 이 교과서는 편찬자들의 인적 구성이나 성향으로 볼 때 과거 교과서포럼에서 만들어낸 ‘대안교과서 한국 근현대사’의 축소판일 것으로 예상된다. 대안교과서는 검정 통과를 염두에 두지 않아 분량이 많은 책이 되었지만 정규 교과서는 ‘교육과정’과 ‘집필 준거안’을 준수해야 하므로 근현대사 과정이 다른 교과서보다 월등하게 많을 수는 없기 때문이다.
▲ 5월 31일 자 경향신문 3면 기사
대안교과서의 경우 5.16을 쿠데타라고 표기했으며 작년 대선과정에서 경향신문은 이를 근거로 박근혜 후보의 발언을 비판하기도 했다. 대안교과서는 5.16을 대체로 군사정변으로 표기한 다른 교과서와는 달리 5.16을 쿠데타로 표기했으며 다만 5.16 이후 근대화혁명이 가속화되었고 5.16의 원인 중 하나가 근대화혁명의 지체라는 가치평가를 하였을 뿐이다. 물론 이는 박정희의 통치에 대한 긍정적인 평가를 전제하는 것으로 논쟁의 대상이 되지만 “5.16 쿠데타를 5.16 혁명으로 표기”한 것에 비유할 일은 아니다.
“5.18 광주 민주화 운동을 5.18 광주항쟁”으로 표기한 것은 사실인지도 모르지만 이 정도가 큰 문제가 되는 것은 아니다. ‘광주사태’나 ‘광주폭동’ 정도가 문제가 되는 시선이라 볼 수 있다. 또 대안교과서에서 독립운동에 관해 ‘테러’라는 표현을 쓴 것은 사실이지만 이는 다른 교과서도 마찬가지다. 한국인들은 ‘테러’나 ‘테러리즘’이란 말을 가치평가로 이해하는 측면이 있지만 독립운동세력 중 무장투쟁 계열을 영어로 옮기자면 ‘테러리스트 그룹’ 외에 마땅한 대안이 없는 것도 현실이다. 뉴라이트가 무장투쟁보다는 실력양성론이나 외교독립론에 더 우호적이었다고 해서 그들만이 ‘테러’라는 말을 쓰면 안 된다는 견해는 옳지 않다.
▲ 5월 31일 자 경향신문 3면 기사
또한 “종군위안부를 '성매매업자', '자발적인 경제단체'로 보고 있다”는 견해는 어디에서도 근거를 찾을 수 없다. 아마도 2004년 뉴라이트 성향 이영훈 교수의 백분토론 이후 오마이뉴스 기사 등을 통해 유포된 견해일 것이다. 하지만 그가 종군위안부를 ‘자발적 성매매’로 보았다는 오해는 대중적 화법에 익숙하지 않은 이의 발언을 곡해한 것에 불과하다. 그는 당시 토론에서 40여분 경에 과거사 진상규명법에 대해서는 반대하는 입장이지만 “전쟁위안부, 그러니까 전쟁 성노예” 같이 보편적인 반인륜범죄는 끝까지 추적해야 한다는 취지의 발언을 했다. ‘성노예’라는 단어를 사용하는 이가 위안부를 ‘자발적 성매매’라 생각할 수는 없다. 대안교과서에도 그런 서술은 안 나온다.
물론 이번 교과서가 대안교과서와는 '차원이 다른' 왜곡을 보여줄 가능성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민주주의를 '자유민주주의'로 수정하자고 제안한 그 단체이기도 하고 전경련이 함께 하고 있다는 것도 미심쩍다. 하지만 현재 진보언론과 누리꾼의 논의 어디에서도 이번 교과서를 직접 보고 나온 비판은 없다. 대안교과서의 내용을 요약한 '짤방'이 돌아다니고 그나마 그것도 왜곡이거나 날조에 가깝다. 사실 ‘교과서의 왜곡’이란 것은 과격하게 이루어지기가 힘들다. 학자들이 서술하고 공적 기구의 검증을 거치기 때문이다. 박근혜 대통령 후보 시절 발언이나, 박근혜 정부의 각료들의 발언이나, 종편 방송의 편협한 보도와 비교하기는 어렵다.
“대한민국을 긍정하자”라고 말하며 ‘자학사관’을 비판하는 그들의 어법에 일본 극우파의 단어 몇 개가 섞여 들어간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대안교과서를 읽어봤을 때 느낀 것은 이 교과서는 사실의 왜곡보다는 관점의 차이를 보여주고 있다는 것이었다. 식민지기 서술은 오히려 기존 교과서보다 낫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는데, 기존 교과서가 항일투쟁 일변도로 서술한 반면 이 교과서는 식민지 근대화론을 정당화하기 위해 식민지기의 생활상도 두루 담았기 때문이었다. 다만 해방 이후 역사서술에서 이승만에 대한 긍정적인 평가 등은 불편한 부분이 있었고 4.3 사건 등에서 일어난 국가폭력에 대한 기술도 다소 소략하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러나 이런 정도의 문제는 논쟁의 여지가 있는 것들이다. 식민지근대화론에 입각한 뉴라이트 진영의 민족주의 사학 비판을 꼼꼼하게 살피면 일리가 있는 것들도 많고 민족주의 사학에서 놓치는 팩트들도 있다. 민족주의 사학이나 기존 교과서라고 다른 측면에서 문제가 발견되지 않는 것은 아니란 것이다.
뉴라이트 진영의 논의를 일부 종편과 ‘일베’에서 퍼트리는 터무니없는 “광주폭동의 북한군 개입설”에 비교할 수는 없다. 어떤 이들은 "한국인이라면 맨유를 응원합시다"라는 말을 하듯 "한국인이라면 식민지 근대화론자를 친일파라고 욕하는 게 당연하다"라고 생각하는 듯하다. 하지만 ‘일제에 의한 근대제도의 이식과 우리 민족의 수용’ 여부를 따져보고 토론해 보자는 게 반드시 친일파의 논리인가? 가령 박정희 시절 경제성장이 일어났다는 서술과 독재의 정당성 여부를 묻는 가치평가의 문제는 별개의 것이 아닌가?
▲ 지난 2012년 7월 18일 경향신문 2면 기사
사실여부를 따지지 않고 사람과 사건에 대한 가치평가를 완결 짓는 태도는 근거도 없이 ‘광주폭동의 북한군 개입설’을 끈질기게 주장하는 이들이 가지고 있는 “한국인이라면 자유민주주의 체제를 절멸시키려는 북한을 증오해야 하기 때문에 모든 사건 뒤에 북한이 개입해 있다고 추정하는 것은 정당하다”는 자세와 얼마나 멀리 있는 것일까?
사람들은 5.18을 ‘광주폭동’이라 주장하는 ‘일베’에 경악하며 역사교육이 필요하다고 진단한다. 하지만 정작 역사교육에 대한 관심을 활성화시킬 수 있는 자신과 다른 정치성향의 교과서가 진입하려 하면 “그것은 역사가 아니다”라며 거부한다. 이는 역사교육의 질이나 양, 다양한 논의의 확장 등에 관심이 있는 게 아니라 본인의 역사관을 학자가 교과서로 정당화해주고 교사들이 그것을 학생들에게 주입해주기를 희망하는 태도라고밖에 볼 수 없다.
정말로 역사교육의 활성화를 바란다면 기존 교과서에 문제가 없다는 태도에 안주하지 말고 뉴라이트의 도전을 정면으로 수용해야 한다. 기존 교과서의 집필자들은 뉴라이트 진영의 기존 교과서 비판에 대해 “전공자들이 교육과정에 맞춰서 썼고 검정을 통과한 교과서”를 왜 비판하느냐고 묻는다. 논쟁을 피하는 태도다.
적어도 이렇게 얘기하려면 자신들도 뉴라이트 교과서를 비판하지 말아야 할 게 아닌가? “전공자들이 교육과정에 맞춰서 썼고 검정을 통과한 교과서”인 건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 물론 한국현대사학회 등에 사학 전공자는 별로 없다고 반박할 수 있겠지만 현대사전공자는 어디에나 희소하며 현대사를 해석하는 문제에 다양한 사회과학 전공자들이 개입하는 것이 사학자 일변도인 단체들보다 나쁘다고 말할 마땅한 근거도 없다. 민족주의 진영이 뉴라이트 진영보다 '사학자' 비율이 높다고 자랑하지만 고중세사 전공자까지 합친 그 비율이 무슨 의미가 있으며 현재 논란이 되는 현대사 논의에 고대사 전공자가 경제학자보다 나을 것이 무엇이란 말인가? 박근혜 정부라서 그런 교과서가 통과될 수 있었다고 말하려면 뉴라이트 진영 역시 김대중 노무현 정부라서 민중주의적 좌파 교과서가 통과되었다고 말할 권리를 인정해 줘야 한다.
분명한 것은 역사인식은 특정한 견해에 ‘친일파’란 ‘낙인’을 찍는 방법으로는 성숙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심지어는 ‘일베’에 대해서도 ‘낙인’ 전략을 사용하는 것의 위험성을 논해봐야 하겠지만, 대중들이 뉴라이트나 식민지 근대화론에 대해서까지 그런 태도를 취하는 것은 정말이지 심각한 문제라고 봐야 할 것이다.
그리고 진보언론이나 학자들이 이런 태도를 비판하거나 거리를 취하지 않고 부화뇌동하는 것 역시 진보담론의 혁신에 장애가 되는 일이다. 2012년 대선의 패배는 하루아침에 이루어진 일이 아니다. '진보세력은 사실을 왜곡하고 선동을 한다'는 '일베'의 언어가 어떤 이들에게 먹히는 것이 과연 전적으로 사실 왜곡의 선동이기만 한 걸까? 우리는 또 다시 패배의 궤적을 밟아가고 있는 것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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