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을 어느 정도 아는 이라면 오스카 와일드의 <도리언 그레이의 초상>을 모를 리가 없을 것이다. 그만큼 영미문학에서 유명한 작품이기도 하지만, 오스카 와일드 본인에게 있어 이 작품은 선정성과 부도덕의 대명사로 손가락질 받게 만든 작품이기도 하다.

주인공 도리안 그레이(벤 반스 분)의 도덕적인 타락은, 여성을 사랑해야 할 대상이 아니라 하룻밤을 충족시키기 위한 성적 도구로 전락시키는 파렴치함으로 귀결되기 때문이다. 영화 에서 도리안이 딸도 모자라 그녀의 어머니마저 침대로 끌어들이는 설정은 이를 반영하고 있다.

또 하나, 도리안은 원래부터 호색한이 아니었다. 헨리(콜린 퍼스 분)의 꼬드김에 넘어가 호색한이 된다는 설정은 부도덕이 본인 자신에게 머무르는 것을 넘어서서 어떻게 전염되어 가는가를 보여주고 있다. 성적 방종을 부추기는 이가 또 다른 이를 도덕적 타락의 길로 이끌었을 때 그로 말미암아 수많은 여성들이 눈물을 흘리도록 만들기 때문이다.

여성을 쾌락을 위한 기제로 활용하는 것, 도덕적 타락이 순수한 청년 도리안 그레이의 영혼을 어떻게 타락시키는가를 치열하게 보여준 건 오스카 와일드의 생존 시 비평가들에게 먹이거리를 제공하는 셈이나 마찬가지였다.

<도리안 그레이>는 ‘외모 지상주의’를 다루고 있다. 잘 생긴 외모가 늙지 않는 ‘불로’와 만난다는 건 시간의 침범을 받고 늙어가는 피조물의 한계를 극복하고 싶은 유혹이 아닐 수 없다. 현대 의학이 추구하는 현대판 불로초를 영화로 대비한다면 도리안 그레이의 초상화가 아니겠는가. 도리안을 대신하여 머리가 빠지고 늙어가는 초상화는 영화처럼 굳이 영혼을 팔지 않더라도 오늘날 의학의 발달과 자본만 구비되면 노화를 늦출 수 있는 현대판 불로초의 유비로도 바라볼 수 있다.

영화 <도리안 그레이>는 소설 원작에는 없는 캐릭터를 삽입한다. 오스카 와일드의 원작에서 도리안 그레이로 하여금 진정한 사랑의 의미를 깨닫도록 만드는 헤티 대신에 영화는 헨리의 딸 에밀리(레베카 홀 분)가 원작 속 헤티의 역할을 감당하도록 각색한다. 이 각색 덕에 에밀리는 원작 소설과는 다른 의미를 갖는 캐릭터로 자리한다.

원작 및 영화 초반에 도리안을 도덕적 방종의 길로 이끄는 이는 헨리다. 하지만 아버지가 이끈 도덕적 해이에 의구심을 갖게 만드는 이는 헨리와 아무 관련이 없는 헤티라는 제3자가 아닌 헨리의 딸이라는 아이러니를 내포하고 있다.

아버지가 타락의 길로 도리안에게 손짓하였다면 딸의 대에 이르러서는 아버지와는 반대로 도리안을 구원의 길로 이끄는 도덕적 지침이 되는 셈이다. 아버지 헨리가 유혹자인 반면에 딸 에밀리는 아버지와 달리 구속자의 역할을 수행한다. 아버지와 딸의 역할이 완전히 상반된 역할을 하고 있는 설정은, 소설 원작에서는 찾을 수 없지만 영화에서만 찾아볼 수 있는 각색의 미덕이다.

타락자와 구속자가 아버지와 딸이라는 영화 속 설정은, 타락이 종국이 아니라 타락을 개과천선할 수 있는 구원이 동전의 양면처럼 함께 붙어 다닐 수 있음을 아버지 헨리와 딸 에밀리라는 한 핏줄로 역설하고 있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늘 이성과 감성의 공존을 꿈꾸고자 혹은 디오니시즘을 바라며 우뇌의 쿠데타를 꿈꾸지만 항상 좌뇌에 진압당하는 아폴로니즘의 역설을 겪는 비평가. http://blog.daum.net/js7kei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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