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영화에서 특정 소재의 쏠림현상이 심화되는 경우를 종종 보게 된다. 요즘 한국영화에선 사적 복수가 눈에 많이 띈다. 공권력이 집행하는 형량이 국민 정서와 차이가 나는 현상을 스크린이 반영하는 사례라 볼 수 있다. 실제 법 집행에 의한 형량의 가벼움을 사적인 복수로 갚고자 하는 경향이 한국영화에서 드러나고 있다.

장영남이 연기하는 <공정사회> 속 형사는 복지부동의 극치를 달린다. 피해 어린이의 엄마는 가해자를 찾기 위해 방방곡곡 뛰어다니며 경찰에 하소연하지만 형사나 경찰은 복지부동 혹은 무능의 경연대회를 보여주듯 무능하기 짝이 없다. 이런 무능한 공권력을 믿지 못하게 된 엄마는 직접 범인을 찾아 응징할 것을 결심하고 사적인 복수를 감행한다.

최근 개봉한 <몽타주>에서 딸을 잃은 하경(엄정화 분)이 딸의 목숨을 앗아간 범인의 공소시효가 만료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찾아 나선다는 설정 역시 법이 해결하지 못하는 처벌을 개인이 감당하겠다는 의지로 해석할 수 있으며, 공권력에 범인의 응징을 맡기지 못한다는 맥락으로 본다면 <공정사회>와 궤를 같이 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문제는 공권력의 법 집행이 일반인의 정서와 심한 괴리가 나타나는 현상을 사적 복수로 표현함에 있어 가해자의 희생양이 누구인가 하는 부분이다. <공정사회>와 <몽타주>에선 여자어린이가 희생양으로 표현되고 있다. 특히 <몽타주>는 어린이의 시신을 묘사함에 있어 숨이 끊어진 상태를 묘사하는 데 그치지 않고 어린이가 어떻게 처참하게 숨을 거두는가 하는 과정을 상세하게 묘사하고 있다.

사회적 약자 가운데 어린이라는, 가장 보호받아야 마땅하거나 혹은 가장 취약한 계층이 영화 속 사적 복수를 정당화하기 위해 희생되거나 소모되고 있다. 오월 가정의 달이 무색할 만큼 스크린에서는 어린이가 범죄의 희생양으로 전락하고 있다. 굳이 어린이를 희생양으로 삼지 않으면 사적 복수가 성사될 수는 없었을까 하는 의구심이 <몽타주>를 보면서 <공정사회>와 겹쳐 떨쳐지지 않는다. 한국영화 속 어린이 수난사는 <몽타주>에서도 이어지고 있었다.

늘 이성과 감성의 공존을 꿈꾸고자 혹은 디오니시즘을 바라며 우뇌의 쿠데타를 꿈꾸지만 항상 좌뇌에 진압당하는 아폴로니즘의 역설을 겪는 비평가. http://blog.daum.net/js7kei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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