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일 오전 서울 중구 브라운스톤 LW컨벤션센터에서 남양유업 김웅 대표(오른쪽 네번째) 등 임직원들이 '영업직원 막말 음성파일'로 불거진 강압적 영업행위에 대한 사과의 뜻으로 고개를 숙이고 있다.ⓒ 연합뉴스

나는 몇 가지 ‘갑’의 기억을 가지고 있다. 그 기억은 어리숙하거나 어스름하다.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머릿속 실타래를 잠시만 풀어보려 한다.

 

오래전이었다. 나는 대학가에 진입한 자취생이었다. 학기를 마무리하며, 휴학을 했고, 방을 옮겨야 했다. 짐은 많지 않지만, 용달을 이용하지 않고는 이주가 힘들었다. 다행히도, 나 같은 처지의 자취생들을 상대하는 업체가 있었다. 대충의 이동과 정리가 끝났다. 업체의 직원은 갑자기, 처음의 협의보다 많은 돈을 요구했다. 예상보다 짐이 많았고, 골목 진입 상황이 좋지 않았다는 거다. 수고가 갑절로 들었으니 보상해 달라는 요구. 나는 그 때 어렸고, 물정에 어두웠다. 닳고 닳은 ‘을’의 능변과 수완에 휘둘려, 적지 않은 액수를 ‘조공’했다. 내가 속았다는 사실을 아는 데엔, 불과 며칠이 필요치 않았다. 석연찮은 기분에, 주위에 토로했다. 얘기가 끝나기도 전에, 그들은 나를 이렇게 불렀다. ‘호갱님’. 속절없는 모멸감에 한동안 분통을 터트렸다. 이토록 멍청한 ‘갑’이라니.

아마도 대한민국의 뭇 갑들이 빈번히 상대하는 을은, 택배회사 직원일거다. 지금과 그리 멀지 않은 언젠가, 고대하던 컴퓨터 모니터가 배달되기로 한 오후였다. 정사각형 LCD 모니터에서, 와이드형 HD의 세계에 들어서는 건 설레는 일이었다. 일찌감치 발을 옮긴 귀가길. 집근처 모퉁이에서 전화기가 울었다. 나의 ‘을’ 택배회사 직원은 벨을 눌러도 응답이 없다며, 부재중 여부를 확인했다. “금방 도착할겁니다. 기다려 주세요.” 한달음에 몸을 놀려, 집 앞 현관에 다 달았다. 그런데… 아니, 이보시오. 택배회사 직원양반. 이게 무슨 일이란 말이오. 사람은 간데없고, 물경 30만원의 몸값을 자랑하는 모니터만 덩그라니 놓여 있었다. 어쨌든 물건은 인계받은 셈이지만, 행여나 도난가능성을 되새기니, 참을 수없이 부아가 치밀었다. 나는 고객 상담 센터로 전화했다. 잃어버린 ‘고객의 권리’를 되찾기 위해서였다. 융단폭격을 퍼붓듯 상담원을 다그치며 ‘컴플레인’을 제기했다. “앞으로 주의하세요. 확실히 조치해주시구요.” 폐회선언을 남기듯, 엄중한 멘트로 마무리 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친절하고 간곡하게 조아리는 상담원을 뒤로 한 채, 수화기를 덮었다. ‘호갱님’이 ‘고객님’으로 복위할 왕좌는 어느새 마련돼 있었다.

우리 동네 사우나의 카운터 아저씨는 무뚝뚝하고 을씨년스럽다. 일회용 샴푸를 살 때도, 수건이 떨어졌다 요청할 때도, 귀찮은 외마디로 응대한다. 종종 얼굴을 보지도 않고 사래질 할 땐, 사람을 무시하는 건가, 엉뚱한 생각이 든다. 잔뜩 무거운 가방을 짊어지고, 늘어진 어깨로 입장한 어떤 밤이었다. 락커룸에 집어넣기에는 가방의 덩치가 컸다. 애매한 상황. 어찌할까 고민하다, 카운터에 보관을 부탁했다. 아저씨는 전매특허같은, 예의 무뚝뚝한 사래질을 시전했다. 자신도 고용된 처지인지라, 분실이 부담스러운 모양이었다. 부탁과 거절이 몇 차례 오가다, 짜증이 치밀어 올랐다. 슬로우 모션처럼 아저씨의 사래질이 머릿속에서 오버랩했다. 누군가 버튼을 눌린 듯, ‘뚜껑’이 열렸다. 아니. 대체 왜 안 된다는 겁니까. “지금 돈 내고 들어 온 손님이 부탁을 하자나요. 손님이!…”

나는 순전히 나의 경험에 터 잡아, 갑과 을을 말해보려 한다. 내가 겪은 갑과 을의 문제는 자존감의 문제다. 남들만큼 사는 것도 버거운 세상에서, '나'의 자존감은 ‘남들’보다 낮아질 수밖에 없다. 어떻게든 남들만큼이라도 사는 게 절체절명의 과제가 된다. 그게 힘들다면, 남들만큼 ‘대접’받기라도 해야 한다. 서로 다른 정체성의 개개인이 구매를 행사할 때, ‘소비자’란 단일한 라벨이 붙는다. 기업은 친절과 봉사, ‘고객감동’의 슬로건을 내세운다. 갑과 을의 매트릭스는 부와 지위에 관계없이, ‘남들만큼’ 대접받을 수 있는 잠정적 공간이다. 어쩌면, 항시적으로 흔들리는 을의 자존감을 건사할 ‘갑질’의 ‘대리 체험장’이다.

갑의 권리라 인식되는 당연한 것들이 있다. 이걸 알아서 챙기지 못하면, 다시 말해 ‘갑질’에 능숙하지 못하면, 순진한 고객님은 ‘호갱님’이 될 위기에 처한다. 을은 을대로, 과중한 업무와 스트레스에 직면해 ‘갑질’에 봉사하기 힘들다. 어떤 약삭빠른 을들은 오히려 갑보다 능숙한 ‘갑질’을 구사하기도 한다. 고객만족의 감동은 이렇듯, 시시때때로 미완의 꿈에 그친다. 갑의 오만은 을의 자존감을 착취하지만, 을에게 무시당하는 갑만큼, 비참한 인간도 사실 없다. 자존감은 한층 더 망가질 때도 있다. 그러니 갑은 갑의 스탠스를 의식하고 고수하려든다. 이 사태에 대비한, 공식적인 사후구제책 역시 마련돼 있다. ‘고객만족 상담센터’. 갑과 을의 역할게임은 구조적으로 제공된다. 이 과정에서 내면화 되는 건, 칼자루를 쥔 자와 도마 위에 오른 자의 역관계일지 모른다.

소비시장에서 인격과 인격은 그렇게 단절된다. ‘을’은 ‘갑’이 되어, 만성적인 자존감의 결핍을 벌충한다. 그 을은 다시 갑이 되고, 또 다른 을은 또 다시 갑이 되고…. ‘갑질’의 내리물림을 개인의 인격에 환원시켜, 설명하고 비난할 수는 없다. 나는 사람사이 존중의 가치를 알지만, 그러하되 어떤 ‘갑질’의 기억을 안고 있다. 나 자신부터 반성 할 일을 어떻게 설파하고 요구할 수 있을까. 그래서 이 글은 토로이며 얼마간은 넋두리다. 지난 ‘갑질’의 기억을 돌아보면, 내게는 이유와 근거가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 순간 내가 겨냥한 건, 아무래도 문제의 해결이 아닌, 을의 인격적 굴복이었던 것 같다. 부끄러운 기억이다. 그 ‘갑질’을 당위로 승격시킨 건, 분명 일상이 공인한 소비자의 물신화 된 권능이었을 거다.

근래 대한민국은 사건과 사고의 왕국이었다. 포스코 ‘왕상무’는 라면 한 그릇의 풍미를 위해, ‘갑질’의 스펙타클을 구현하였다. ‘슈퍼갑’ 남양유업은 ‘갑질’의 만행으로, 우리를 경악시켰다. 일련의 사건은 서로 다른 영역에서, 서로 다른 양상으로 발생했다. 사건들의 몸통을 꿰고 엮는 건, 단순히 계급적 부조리는 아닐 듯하다. ‘갑질’의 이데올로기는 우리의 일상을 배회하고 있다. 큰 물고기가 어중간한 물고기를 삼키고, 어중간한 놈이 피라미를 뒤쫓듯, 우리는 서로의 ‘갑’이며, 서로의 ‘을’이다. 저들의 책임을 묻는 것과 별개로, 이 악순환의 구조를 인식한 후, 성찰하는 것이 대안이리라 믿는다. 당신의 ‘갑질’의 기억을, 당신도 한번쯤 꺼내어 보길 부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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