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려해 보이기만 하는 TV브라운관 속 연예인들. 그러나 일부 톱스타를 제외한 일반 연기자들의 형편은 결코 녹록지 않다. 국내 방송에서 활약하고 있는 탤런트, 성우, 개그맨, 무술연기자, 연극인이 소속된 한국방송연기자노동조합 전체 조합원 5000여 명 가운데 70% 이상이 연 1000만원 미만의 소득으로 일상을 꾸려간다. 4대 보험 조차 적용받지 못하고, 출연료가 떼여도 속수무책이다. 방송의 매력에 이끌려 이 바닥에 발을 들여 놓았다가, 엄혹한 현실 앞에서 절망하고 다른 업종으로 빠진 전직 연기자들도 허다하다. 미디어스가 취재 과정에서 만난 한 연기자는 "언제까지 이렇게 살아야 하느냐?"라고 반문했다.

미디어스는 화려한 방송계의 이면, 그늘진 사각지대를 집중 조명하는 기획을 마련했다. 기획은 총 5차례에 걸쳐 게재된다. 탤런트(1회), 성우(2회), 개그맨(3회), 무술연기자(4회) 4차례에 걸쳐 이들의 현주소를 조명할 예정이며 마지막 기사(5회)에서는 이들의 처우를 개선하기 위해 어떤 법제도 장치들이 필요한지 고민해 본다. (편집자주)

평일 오후 6시, 매주 일요일 오전 8시와 오후 1시. 20여년 전, 지상파 3사에서 만화영화를 편성한 시간대다. <세일러문>, <천사소녀 네티>, <슈퍼 그랑죠>, <디즈니 만화동산> 등의 만화는 초등학생이었던 기자를 TV 앞으로 붙잡아 두곤 했다.

다음 편이 기다려지는 만화영화의 감칠맛을 더해 주는 것은 당연 성우의 몫이었다. 심술궂은 스크루지부터 꾀 많은 티몬, 코믹한 말투로 성대모사까지 등장시킨 저팔계의 목소리까지. 성우들은 능숙한 연기로 캐릭터에 개성을 불어넣는 역할을 했다. 어린 시절 KBS2TV에서 방영했던 <X파일>에 대한 기억도 성우들과 닿아 있다. <X파일>의 주인공 스컬리의 도도한 목소리는 아직도 귓가에 생생하다.
하지만 요즘, 방송에서 성우의 존재감을 느끼기는 쉽지 않다. 몇 년 전 기계같이 무미건조한 투로 재미난 상황을 설명해 화제가 됐던 <남녀탐구생활>의 서혜정 성우가 인기를 끌었던 것이 성우와 관련된 가장 인상적인 기억일 뿐이다. 특히나 요즘은 연기자나 인기 아이돌 등이 성우의 자리를 대신하는 경우가 잦다. 그 많던 성우들은 어디로 갔을까. 매년 새로운 성우들이 발굴되고 있기는 한 것일까.
미디어스는 지난 2일 김영진 한국성우협회 사무총장을 만나 성우들의 ‘요즘’은 어떤지 들어 보았다. 김영진 사무총장은 94년 KBS 공채 24기로 <도전! 골든벨>, <대결 노래가 좋다>, <KBS스페셜> 등 굵직한 프로그램을 맡았다. 2002년 KBS <연예대상>에서 베스트 엔터테이너상을 수상하기도 한 김영진 사무총장은 현재도 활발히 활동하는 프리랜서 성우다.
공채 2년 뒤에는 프리랜서로… “싼 값에 고급인력 쓰고 버려”
▲ 김영진 한국성우협회 사무총장. 김영진 사무총장은 지금도 활발히 활동하고 있는 현직 성우다. ⓒ한국성우협회
미디어스(이하 미) : 방송사에서는 공채 탤런트를 안 뽑은 지 5년이 다 되어 간다. 성우들은 상황이 어떤가.
김영진 사무총장(이하 김) : KBS의 경우 매년 12명씩 뽑는다. EBS는 2년에 한 번 뽑고 한 기수에 4명이다. 애니메이션 전문 채널에서도 성우를 뽑는데, 투니버스는 2년에 1번 8명 정도, 애니원은 2년에 1번 10~11명 정도 뽑는다. MBC는 공채 성우를 안 뽑은 지 10년이 넘었고 SBS는 처음부터 공채 제도가 없었다.
미 : 공채가 활발히 이루어지는 것은 좋은 일 아닌가. 계속해서 기회가 주어진다는 측면에서.
김 : 그렇지는 않다. 공채로 뽑히더라도 2년 후 프리랜서로 전환이 돼 이후에는 스스로 알아서 살아야 한다. 매년 공채를 뽑아 싼 값에 고급인력을 쓴다. 2년 쓰고 나서는 버린다. 또 새로운 성우를 뽑고 버리는 일이 반복된다. (이미 공채를 거쳐 성우가 된 사람은 많은데, 그 사람들이 전부 일할 만큼의 일거리가 없으니) 수요 공급법칙이 절대 안 맞는 것이다. 프로페셔널한 배우들이 설 자리가 없어지게 되니 차라리 안 뽑는 게 낫다는 생각이 들 정도다. KBS의 경우 한 해에 여자들은 2,000명이, 남자는 800명이 시험을 보는데 각각 6명이 뽑힌다. 그러고선 95만원 받는다. 새로운 아이들을 매년 뽑고 2년이 지나면 ‘알아서 프리랜서로 뛰어라’라고 하는 것이다.
미 : 성우들은 임금이나 처우가 어떻게 되나.
김 : KBS 공채 성우의 경우 고정 월급이 95만원이다. 1년차일 때. 보너스는 따로 없다. 2년차는 103만원을 받는다. 2년 간 전속으로 있을 때에는 4대 보험도 적용이 된다. 전속에서 벗어난 프리랜서들이 받는 돈은 천차만별이다. 성우 등급을 보면 만 10년차 안쪽까지가 B급이고 10년차 이후는 A급이다. 라디오 드라마를 예로 들면 프리랜서가 50분물 한 편을 하면 A급일 경우에는 24~25만원 정도 받고, B급은 그 절반 정도를 받는다. 공채 성우는 1만 5천원 안 되게 받으니 격차가 크다. 싼 값에 고급인력을 쓴다는 게 이런 뜻이다.
방송 4사(KBS·MBC·SBS·EBS)와 애니메이션 채널에서 지원하는 노조 발전기금이 연 70억 정도 된다. 75억을 750명이 나누면 연 수입이 1,000만원 정도 나온다. 하지만 이는 평균치이고 각각 벌어들이는 돈은 차이가 크다. 전체 750명(한국성우협회 회원) 중에서 100명이 버는 수입이 나머지 650명보다 많고, 50명 수입이 전체 수입의 반 정도는 될 것이다.
미 : 성우들의 활동 기간이나 수명은 대체로 어떠한가.
김 : 저는 전속 성우로 3년 일한 것 포함해 올해로 20년 정도 됐다. 유명하신 분들은 30년 이상 오랫동안 성우를 하기도 한다. 하지만 워낙 서로 달라서 딱 어느 정도라고 말하기 어렵다. 한 기수에서 10% 정도밖에 살아남지 못하다 보니, 프리랜서가 되고 나서 자리를 못 잡으면 활동 기간이 짧아질 수도 있다.
미 : 성우들마다 각자 특화된 분야가 있는 것 같다. 쇼 프로그램 전문, 애니메이션 전문 등등. 이런 분야는 어떤 식으로 정하게 되나.
김 : 꼭 한 분야만 해야 된다는 법은 없지만 장르적 특성이 있어서 애니메이션이면 애니메이션, 쇼프로면 쇼프로 이렇게 맡아서 한다. 열 명 정도가 다양한 장르에서 일을 많이 하고, 내레이션 전문은 50명 정도다. 300명 정도는 애니메이션, 외화 등 더빙을 맡고 있다. 본인들이 맘먹어서 간다기보다는 초기에 두루두루 하면서 적성을 찾는 편이다.
성우 참여 프로그램 편성 적고 자막방송 시작해 성우 설 자리 줄어
미 : 2년만 지나면 프리랜서가 되는 구조라면 성우 대부분이 프리랜서라는 말인데, 프리랜서여서 어려운 점은 없나.
김 : 말 그대로 ‘프리랜서’이다 보니 각자에게 맡긴다. KBS는 공적 책임이 있는 방송사인데 공채를 뽑아놓고 2년 후에는 책임을 하나도 안 진다. 일부 사람들은 “적자생존”, “능력껏 벌어먹는 것 아니냐”라고 한다. 한 기수에서 살아남는 케이스가 10%도 안 되고, 전문성 있는 분야라서 다른 직업으로 바꾸기도 어려운데 그런 말을 너무 쉽게 한다.
KBS 극회 기준으로 450명 중 425명 정도가 프리랜서인데 라디오 드라마는 거의 전속(공채) 성우들로 운영이 된다. 프리랜서 비중은 20%도 안 된다. 25명 정도가 라디오 일의 80~90%를 맡는데 아무래도 1, 2년차이기 때문에 연차 높은 선배들보다는 연기력이 떨어지는 문제가 있다.
미 : 매년 혹은 격년으로 프리랜서를 만들어 내는 방송사에 문제제기를 한 적이 있나.
김 : 공채 성우 준비할 때 6~7년은 걸린다. 막내 후배 평균 나이가 30대 초반 정도 된다. 30대에 들어서면 새로운 직장에 들어갈 준비를 하기엔 늦어진다. 이직, 전직이 어렵다는 의미다. 고스란히 실업자가 된다. 이에 대해 문제제기는 수차례 했다. 그럴 때마다 “노력하겠습니다”라고 말하지만 달라진 것이 없다. 새로운 사람을 발굴하는 것 자체는 좋지만, 워낙 많은 사람들이 실업자가 되는 구조라 그럼 차라리 뽑는 인원을 줄여달라고 요청하고 있다. 방송사 소속에서 벗어나 프리랜서가 된 친구들 가운데 안착하지 못하는 경우도 많은데, 거의 대부분 성우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한다.
▲ MBC에서 매주 일요일 밤 12시에 방영되던 'CSI 마이애미 시즌10'은 MBC 봄 개편으로 인해 지난달 14일 마지막 방송을 끝으로 폐지됐다. (MBC 'CSI' 홈페이지 캡처)
미 : 얼마 전 MBC 봄 개편 당시 라디오 드라마와 외화 <CSI> 시리즈가 사라졌다는 소식을 들었다.
김 : 프리랜서라는 구조적 문제를 개선해달라는 요청도 했지만, 성우들이 참여할 수 있는 프로그램 편성 확대를 요청하기도 했다. 외화, 라디오 드라마, 애니메이션 편성을 늘려달라는 것이다. 예전에 비해 지상파에서 방영되는 정규 애니메이션 프로그램이 많이 줄었다. KBS 라디오 드라마 1년 예산이 2억 5천에서 3억 정도다. TV 드라마는 대하사극 하나 하는데도 몇십 억은 편성될 텐데. 애초에 편성된 예산이 너무 적다.
또, 일요일 심야 시간대에 영화를 편성한다는 것은 시청자들에게 ‘보지 말라’고 하는 것과 같다. 다음날 출근하고 등교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일요일 12시 넘어서 편성하고 시청률이 안 나온다, 광고가 안 붙는다는 말을 한다. 밤 10시대 같은 골든타임에 집어넣으면 시청률이 안 오르겠나.
미 : KBS에서 방영 중인 <셜록>은 자막방송으로 나가고 있다. 젊은 시청자들 사이에서는 ‘더빙보다 자막이 낫다’는 반응도 있는데.
김 : 물론 자막을 좋아하는 시청자들이 있을 수 있다. 하지만 적어도 지상파 방송만큼은 더빙을 기본으로 하는 것이 좋다고 생각한다. 프랑스, 이탈리아, 일본 등 해외는 외화 방영할 때 올 더빙인데 우리나라는 그렇지 못해서, 우리말 더빙 법제화를 준비하고 있다. 자막을 읽기 힘든 노인들이나 시각장애인들을 위해 기본적인 ‘음성 제공 서비스’가 나가줘야 한다는 말이다. 우리말 보호 차원도 있다. 어느 나라나 자국어를 보호하고 있으며, 그것이 통념으로 굳어져 법제화될 필요가 없는 수준이다. 미디어 소외계층 보호, 우리말 보호 차원에서도 더빙 서비스는 꼭 필요하다.
원어로 보고 싶은 사람들을 위한 경로도 여러 가지 마련돼 있다. 다운받아서 보거나 케이블 영화채널을 보면 된다. 지상파에서 자막방송을 하는 것은 일부 마니아층의 반응에만 기댄 미디어 담당자들의 횡포라고 본다.
미 : 그 외에도 성우들이 겪고 있는 어려움이 있다면.
김 : 배우들 스스로 선택한 길이지만 그들이 노력을 안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오늘도 후배들 재교육 강의를 하고 왔다. 선배들이 위협을 느낄 정도로 능력 있는 후배들을 키워내는 것도 중요하다. 하지만 재교육 시스템 지원이 전혀 마련돼 있지 않다. 자체교육을 하고 있는데, 방송통신위원회, 콘텐츠진흥원 등에서 지원을 받긴 하지만 턱없이 부족한 수준이다.
“힘든 부분 있으나 성우라는 직업 사랑해”
미 : 요즘은 어린이들을 대상으로 한 애니메이션 영화는 아이돌 가수가, 교양 프로그램의 내레이션은 연기자들이 맡는 모습을 흔히 볼 수 있다. 이에 대한 생각은 어떤지.
김 : 타 영역에 있는 분들의 활동이 활발해진 데는 익숙한 목소리에 대한 시청자들의 욕구가 깔려 있는 부분이 있을 것이다. 하지만 성우들은 말을 정확히 구사할 수 있고 연기도 가능한 전문성을 지니고 있다. 알맞은 소리를 찾아내는 감각도 뛰어나고 전달력도 좋다. 순수 예술가라고까지 할 순 없지만 대중문화를 이끌어가는 장르의 장인이라고 생각한다.
미 : 얼마 전 한 아이돌 가수가 애니메이션 영화 더빙을 하면서 기존 성우들보다 50배 가까이 높은 금액을 받았다고 해 논란이 된 적이 있다. 어떻게 보는지.
김 : 방송국이나 영화사 쪽이나 성우들에게 배역을 맡길 때에는 늘 ‘좀 깎아달라’고 했었다. 돈을 더 주면서도 연기력이 부족한 친구들을 쓰는 이유를 잘 모르겠다. 노련한 성우들은 영화 한 편 더빙하는데 반나절이면 끝난다. 프로이기 때문이다. 아마 성우가 아닌 분들은 컷마다 잘라서 갔을 것이다. 그 스타들에 반감을 느끼지는 않는다. 다만 극의 완성도를 더 높일 수 있는 성우들을 대하는 제작진들의 마인드가 불쾌할 뿐이다. 성우들은 스타성이 부족해 연예인들처럼 ‘스타 마케팅’이 안 되다 보니 그런가 보다.
미 : 성우라고 하면 대개 더빙 연기나 내레이션을 담당한다는 이미지가 강하지만, 게임 더빙이라든지 오디오 스토리텔링 서비스 등 활동 반경이 더 넓은 것 같다. 사람들이 잘 모르는 성우의 다양한 역할에 대해 설명해 달라.
김 : 쉽게 말해 일반적인 오디오 서비스는 다 한다고 보면 된다. 박물관, 유적지 가이드용으로 만들어진 음성 서비스는 대부분 성우의 몫이다. 정보를 명확한 발음으로 전달하고, 필요할 때에는 설득력 있는 감정선을 전달하기도 한다.
미 : 지난해 3월 한국고용정보원이 759개 현직 종사자를 대상으로 실시한 ‘직업 만족도 설문조사’에 따르면 성우가 만족도가 높은 직업 2위로 꼽혔다. 어려운 상황에서도 직업 만족도가 꽤 높은 편이다.
김 : 저도 참여했다. 성우 자체 조사에서 2위를 기록한 것이니 의미가 있다고 본다. 수입도 적고 2년마다 프리랜서가 되는 불안정한 구조지만, 많은 성우들이 배우로서 자부심을 가지고 있다. 의외로 시간 여유도 있어서 만족도가 높게 나온 것 같다. 저도 제 직업을 매우 사랑한다. 그래서 힘들다고 우는 소리만 하고 싶지는 않다.
저작권자 © 미디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