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일자 경향신문 3면 기사
매체비평지에 입사한지 만 1년이 넘었지만 아직 이 일을 어떻게 해야 잘 하는 것인지에 대한 제대로 된 판단이 서지 않을 때가 많습니다. 기수문화와 선후배 관계로 얽힌 기자사회에서 소규모 온라인매체 기자의 정체성은 혼란스럽지요.

거기다가 ‘매체를 취재하는’ 매체비평지 기자라는 사정까지 겹치면 그 혼란은 가중됩니다. 기자라는 직함을 달고 글을 쓰지만 저 자신이 기자인지가 분명하지 않습니다. 신문비평과 정치평론이 주된 업무인 제 주된 출입처는 농담보태 얘기하자면 “전화기와 네이트온, 그리고 카카오톡”입니다. 머릿속으로 정체성의 갈등을 겪을 때면 타 매체 기자들을 스스럼없이 ‘선배’라 부르는 어떤 동료들의 구김살 없는 태도가 부럽기도 합니다.
기성매체의 기자들이 저를 대하는 태도 역시 미묘하게 이중적이라고 느낍니다. 기자사회의 일원으로 받아들이는 데에도 불편함을 느끼지만 한편으로는 선배대접을 받고 싶어 합니다. 이를테면 ‘내부’면서 ‘외부’인 것이겠지요. 미디어스 기자들은 각자 한 번쯤은 취재차 전화 건 기자에게 “몇 년 차세요?”라는 질문을 받은 경험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제는 2년차라고 답할 수 있게 되었지만 어차피 그들 입장에선 ‘꼬꼬마’이니 1년차인지 2년차인지가 뭐가 그렇게 중요하냐 싶기도 합니다. 저는 “몇 개월 안 됐어요”라고 답했던 것 같습니다.
사실 경험은 서열을 확인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관련 상황의 맥락 속에서 사태파악을 위해서도 중요할 것입니다. 언론사 기자들이 매체비평지 보도에 대해 가지고 있는 불만도 이해가 갈 듯 합니다. 취재현장을 확인하지 않은 간접보도, 데스크의 관행과 의사결정 구조를 모르고 쓴 과도한 추측보도라는 비판이 가능할 것입니다. 어떤 보도에서는 그러한 비판이 그대로 사실이기도 할 것입니다.
매체비평지 기자는 그 직능의 성격으로 볼 때는 기성매체의 경험을 두루 거친 이가 하는 것이 바람직할 지도 모릅니다. 물론 현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타매체 경험이 있는 기자들의 숫자가 오히려 소수이지요. 제 경우에도 이곳이 첫 직장입니다. 기성매체의 기자들이 볼 때엔 기자들이 받아야 할 최소한의 훈련도 받지 못했고 현장도 모르는 이들이 드러난 현상과 자신의 감만 믿고 비판을 일삼는다고 여겨질 수도 있습니다.
매체비평지 기자가 그 직능의 성격에 적절한 경력을 가진 이들로 구성되지 못하는 것은 한국 언론시장의 환경과 언론운동의 현주소가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일 것입니다. 물론 현실이 그렇기 때문에 질이 낮은 기사를 받아들이라고 말하려는 것은 아닙니다. 그런 논법으로라면 어떠한 언론인도 어떠한 정치인도 비판할 수 없을 것입니다. 다만 주어진 조건 속에서 양질의 기사를 위해 노력하기를 요구하는 것이 합리적이면서 현실적인 비판의 척도가 되겠지요.
신문비평과 정치평론을 하면서 제가 비평대상에게 요구하는 것도 그 정도에 한정하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저와 제가 속한 매체에 돌아올 때도 합당하다고 여겨질 수준의 비판수위를 남들에게도 견지해야 공정하다는 평가를 받을 수 있을 테니까요. 하지만 기성언론에서도 그렇듯 비평이란 것이 어쩔 수 없이 기존의 관행을 거부하는 정치인이나 언론인 일개인의 결단을 요구하는 측면이 있는 것도 사실이라고 봅니다.
제 경우는 입사 전 자유기고가로 살 때에도 정치평론을 했습니다만, 사실 한 영역에 대해 평론을 하다보면 그 비평대상과 정서적으로 가까워지는 체험을 하게 됩니다. 가령 정치평론을 오래하다 보면 정치인을 비난하는 시민들보다는 정치인에 감정이입하게 되는 것이지요. 사람들이 정치인들에게 요구하는 것들은 너무 많고, 일관적이지도 않습니다. 그래서 정치인들의 움직임을 면밀히 살피다보면 모순된 요구를 어떻게든 채우려고 허우적거리는 그들을 동정하게 됩니다.
신문비평의 경우에도 마찬가지 상황이라 생각합니다. 시민들은 흔히들 기자들이 익명의 취재원 뒤에 숨어서 자신의 편견을 배설하고 사실을 왜곡한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매체비평지 기사에서도 그렇지만 기명의 취재원은 발언이 자유로울 수 있는 몇 사람으로 한정되기 마련이지요. 주로 교수집단에 해당하며, 그들 중에서도 유난히 사회문제에 대해 말하기를 좋아하는 몇 명으로 한정됩니다.
왜 자꾸 같은 사람만 등장시키느냐고 화내시는 분들도 있습니다만, 대체로 그런 분들만 발언하는 겁니다. 이런 상황에서 익명의 취재원을 등장시키지 않고 기사를 쓴다는 건 불가능에 가깝지요. 사실 시민들이 자기 편견으로 진실을 구성한 후 그 이면에 있는 맥락을 지적하는 기사들에 발끈하여 ‘기레기’란 비난을 하는 경우도 많습니다.
한편 어떤 기사는 미리 ‘야마’를 잡고 그에 맞는 발언을 해줄 이들을 동원해 급조되었단 느낌을 받기도 하고 아마도 그것이 사실이겠지만, 대체로 기자 1인당 하루 두 건 정도는 기사를 써야 하는 매체비평지 기자들의 경우에도 그런 일을 하는 것도 사실입니다.
그래서 저 역시 타매체의 보도를 비판함에 있어 앞서 말했듯 주어진 조건 속에서 양질의 기사를 위해 노력하기를 요구하는 정도의 수위를 맞추려고 노력합니다. 그리고 물론 이는 제가 그 위치에 있다면 더 좋은 기사를 쓸 수 있다고 자신하기 때문은 결코 아닙니다. 제가 이곳에서 그렇듯 우리는 환경의 제약과 관행에 휩쓸려 다닙니다.
하지만 서로가 서로에게 이 정도 수위의 비판과 지적을 하면서 당연시되었던 것들을 돌이켜볼 수 있다면 개선을 기대할 수 있지 않을까요? 현실적으로 매체비평지를 비평하는 언론은 없다는 점에서 이 제안이 ‘불공정’하게 들릴 수 있겠지만, 저는 기성언론 역시 자신들에 대한 비평에 지나친 알레르기 반응을 보인다고 느낄 때가 많습니다. 그만큼 익숙한 일이 아니라는 것이겠죠. 본인들은 관료나 법조인의 행적이나 발언을 실명을 거론하여 쓰면서, 특정 보도에 대한 비평에서 기자 개인의 이름이 거론되는 것을 정서적으로 납득하지 못하는 것 역시 ‘공정’한 태도는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 15일자 동아일보 4면 기사. 이 사건은 한국의 조직사회가 성추행 문제에 대처하는 방식이 얼마나 허약한지를 까발린 측면이 있다.
여기까지도 평소 하고 싶었던 얘기였습니다만, 이제 며칠 전 제가 쓴 기사 얘기로 넘어가야겠습니다. 저는 <윤창중의 알리바이, 78명의 기자>라는 제목의 기사로 한미정상회담에 따라간 청와대 출입기자 78인이 윤창중 사건을 눈치채지 못했던 이유에 대해서 적어보았습니다.
이 기사는 전현직 기자들에 대한 취재를 토대로 작성되었습니다만, 비평대상이라 볼 수 있는 78인의 청와대 출입기자의 발언을 담지 않았다는 ‘치명적인 한계’가 있습니다. 흔히들 이런 기사를 ‘반쪽자리 기사’라고 합니다. 합당한 비판이지요. 다만 증언들만 나열한 게 아니고 비평으로 나아가니 공정하게 말하자면 ‘반쪽자리 기사’의 형식 뒤에 비평을 얹었다고 평해야 할 것입니다.
이런 부족한 형식의 기사가 나오게 되는 이유는 간단합니다. 전형적인 반응은 뻔하게 예상되는데, 전형적이지 않은 반응을 위한 취재를 기울일 시간이 허락되지 않는 경우입니다. 그래서 차라리 전형적인 반응을 지탱하는 근거와 맥락들은 기사에 담되, 다른 방향의 취재나 탐색을 위해 시간을 쓰는 경우입니다.
물론 이런 경우라도 당사자의 뻔한 반응을 하나 따내어 담는 것이 언론윤리의 측면에서, 좀 더 기술적으로 말하면 책임회피를 위해서라도 바람직한 일일 것입니다. 그리고 이런 ‘기술’을 생략한 것에 대한 모자람에 대한 비판은 달게 받을 수 있습니다만, 이 기사가 “현장 상황에서 불가능한 것을 요구했다”고 평가될 수 있는지 여부는 그와 별개로 판단해야 할 문제일 것입니다.
기사 내용의 핵심은 “78인의 기자들이 윤창중의 성추행을 감지할 수 있었어야 했다”는 것이 아닙니다. 저 역시 “물론 전후 정황을 돌이켜보건대 78명의 청와대 출입기자들이 윤창중 전 청와대 대변인의 성추행 사건을 인지하는 게 수월하지는 않았을 것이다”라고 적었습니다. 여기서 더 나아간다면 “불가능에 가까웠다”라고 쓸 수도 있었겠지만 우연히 기자 눈 앞에서 사건이 벌어지고 그게 그대로 보도가 되는 일도 있는 게 인생이니 그렇게까지는 쓰지 않았습니다.
여기서 저에겐 두 가지 선택지가 있었습니다. 하나는 “윤창중은 78명의 기자들을 알리바이로 내세웠지만 애초에 그들은 알리바이가 될 수 있는 존재가 아니었다”고 말하는 길이었습니다. 그리고 다른 하나의 길이 실제로 제가 간 길입니다. 각각의 길로 가는 판단에는 장단점이 있습니다. 현장상황의 지난함만을 전달해 윤창중의 해명의 부적절함을 논파하려 했다면 전자의 길을 갔을 것입니다. 그랬다면 시민들이 쉽사리 기자를 ‘기레기’로 모는 정서에 부화뇌동하지 않았다는 자위를 할 수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한 가지가 마음에 걸렸습니다. 성추행 여부와는 무관하게, 윤창중이 어디선가 술을 마시거나 취해있는 것을 보았다는 기자들의 후일담이었습니다. 성추행 사건이 발생하고 이 증언들은 주요언론 기사들의 중요한 ‘소스’가 되었습니다.
물론 ‘눈가리고 아웅’ 식의 조율된 발언이라 보지만, 박근혜 대통령은 청와대 대변인이 그 시간에 인턴과 술을 마시고 있었다는 것 자체가 업무이탈이며 해임사유라고 본다고 발언했습니다. 우리의 ‘공식적인 언어’ 속에서 윤창중은 자신을 임명한 대통령의 시선으로 해임사유에 해당하는 일을 기자들에게 공공연하게 보여주고 있었습니다. 기자들 역시 그 사실을 기억은 했으되 이상한 일로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어떻게 그럴 수 있었을까요? 물론 ‘공식적인 언어’와는 다르게 그것이 범상한 일, 혹은 주목할 가치가 없는 일이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청와대 출입기자들의 눈과 귀가 관계자들에게서 흘러나오는 메시지에 집중되어 있는 반면, 그 메시지와 상관없이 돌아다니는 이들의 행보가 있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교포사회에서 윤창중이 아닌 청와대 관계자들도 특정 인턴을 집어서 술자리를 가지고 있었다는 소문이 도는 것에 주목했던 것도 그 때문이었습니다. 청와대 관계자가 업무를 이탈하여 인턴과 술을 마시는 정도의 풍경은 용인가능한 상황에서 성추행으로 나아가기 전 윤창중 전 대변인의 이상행동들이 숨겨졌다고 보았기 때문입니다.
그 며칠 간 상황에 대한 78인의 경험의 총체가 무엇인지를 판단하기는 어렵습니다. 그건 저뿐만이 아니라 그 78인 중 1인에게도 마찬가지의 일이 아닌가 싶습니다. 하지만 그 급박한 사건상황에서 피해자와 신고자가 미국 경찰에 가기까지 한국 언론은 고려의 대상이 아니었다는 사실이 무슨 의미였는지 만큼은 우리 모두가 곱씹어봐야 할 화두가 아닌가 합니다. 사건이 세간에 알려진 이후 미국의 제도가 금지하는 한계 언저리에서 피해자 주변인을 확보하는데 총력을 기울이는 언론보도 상황을 보면 그들의 선택이 현명한 것이었다는 생각이 들 정도이니 말입니다.
▲ 15일자 조선일보 4면 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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