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수의 열정에 함께 도취하는 것이 아니라 다수의 오만에 저항해 목소리를 내는 것이 용기’라고 배웠다.”

이렇게 글을 조각내 읽어보면 천번 만번 옳은 말씀이다. 하지만 전체의 맥락 위에서 보면 진실은커녕 사실관계마저 호도하는데 악용되고 있다. 지난 24일자 동아일보 유윤종 차장의 칼럼 <더 많은 사람의 진실2> 얘기다.

▲ 동아일보 6월24일자 30면.
더 많은 사람? 궁금증을 유발하는 제목이었다. 그래서 참으로 오랜만에 동아일보를 봤다. 그러나 그 궁금증이 얼굴이 화끈거릴 정도의 부끄러움으로 변하는 데는 5분도 채 걸리지 않았다. 제목에 낚인 것이다.

시민들이 왜 그리 욕을 해대나 했더니, 동아일보, 한마디로 욕먹을 만했다. 같은 하늘 아래에서 같은 교육을 받고 같은 사실을 바라보면서 살아 온 사람이 이렇게 다른 생각을 할 수 있을까라는 생각에 소름이 돋는다.

특히 “한때 ‘다수’에 도취해 자신이 어떤 일을 했는지 깨닫지 못했던 수많은 사람들도 때가 되면 그 값을 내게 될 것이다. 많은 것을 낼 필요는 없다. 단지 스스로가 부끄러워지는 것으로 족하지 않을까 싶다”라는 끝맺음에서는 분노가 솟구쳤다.

누가 다수인가?

도대체 그가 생각하는 ‘더 많은 사람’과 ‘다수’는 누구일까?

이날 동아일보는 여론조사 결과 “촛불이 계속돼야 한다는 답이 35.5%(에 불과하다)라고 보도했다. 당일의 동아일보 기사대로라면 다수는 공영방송을 지키겠다는 여성을 각목으로 휘두르는 자칭 보수주의자들과 시민이 잡은 현행범을 놓아주는 경찰로 대표되는 공권력, 그리고 폐간을 요구당하는 기회주의 언론들이어야 한다.

그런데 역시 아니다. 글 말미의 경고는 오늘밤도 거리에서 촛불을 밝힐 사람들을 향하고 있음이 분명했다. 제목은 분명 보수주의를 대표한다는 사람들을 다수로 지시하고 있는데, 본문은 보수주의자들에게 공격받는 촛불시민들을 다수라고 부르고 있다. 제목과 글에서 서로 다른 ‘다수’가 등장하는 이 모순을 무엇으로 설명할 수 있을까?

전국단위종합일간지의 중견 기자라는 이가 글의 기본은커녕 사실관계의 기본도 갖추지 않은 글을 쓴 것을 단지 능력 부족으로 치부하기는 힘들다. 더구나 이런 글을 기명칼럼으로 실은 동아일보는 뭐란 말인가. 분명 어떤 저의가 깔려 있을 것이다.

글은 영화 <사운드 오브 뮤직>의 사례를 시작으로 1차 세계대전 당시 프랑스 농민들과 소상공인 이야기로 건너갔다가, 민족주의와 결합한 대중의 열정과 분노가 얼마나 위험한가를 경고한다. 그리고 곧바로 촛불집회의 폭력성을 물고 나온다. “컨테이너를 치우니 경찰버스를 때려부순다”고 하더니, 동아일보사에 스티커를 붙이는 이들을 “용맹스럽다”고 ‘조롱’한다. 이쯤에서 왜 “끝까지 책임을 묻겠다”던 여성경찰의 선무방송 멘트가 떠오를까?

‘진실’ 호도하기 위해 동원되는 ‘사실’

‘사실’은 ‘진실’을 호도하기 위한 수단으로 교묘하게 동원된다. 촛불시위가 인간으로서 가장 중요한 먹을거리에 대한 안전성 문제에서 비롯됐다는 것과 시민들이 대화를 요구하고 있다는 진실은 찾아지지 않는다. 식품 안전성 문제는 오히려 우지 파동 이야기를 물고 나와 최근의 삼양라면 구매하기 운동에 슬쩍 돌을 던지는 것으로 지나간다. 우지 파동은 이미 삼양라면을 작살낸 뒤 대법원이 삼양의 손을 들어줌으로써 끝난 사건이라는 것은 초등학생들도 다 안다. 만두 파동 역시 기회주의 언론의 침소봉대로 영세상인이 자기목숨을 스스로 버리는 비극으로까지 이어졌지만, 용두사미로 끝난 사건이다. 왜 이런 사건을 광우병 소고기 파동에 엮어 넣었을까? 정말 비겁하다. 그리고 치졸하다. 소비자운동으로 번진 조중동 광고주 압박운동을 겨냥하고 있는 속내가 그렇다.

언론이 중요한 것은 유 차장의 인용구처럼 “다수의 열정에 함께 도취하는 것이 아니라 다수의 오만에 저항해” 역사의 발전을 위한 꼭 필요한 목소리를 사회와 역사가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 그래야 인류의 미래가 ‘인간성이 실현된 사회’를 지향하며 발전할 수 있다는 것을 역사가 일러주고 있다.

같은 문맥으로 ‘진실’을 되돌려주면

유 차장의 문맥으로 진실을 되돌려주면 이렇다.

“한때 ‘다수’에 도취해 자신이 어떤 일을 했는지 깨닫지 못했던 수많은 사람들도 때가 되면 그 값을 내게 될 것이다. 국민의 요구에 귀 닫고 여전히 선거당시의 지지도만 믿고 일방향 소통에만 매달리고 있는 이명박 정부와 기득권의 단 맛에 취해 여론을 왜곡하는 조중동(아니면 동조중이라고 하든가)을 향한 역사의 경고다.”

물은 늘 낮은 곳으로 흘러 결국 바다라는 거대한 세계를 이룬다. 어떠한 댐도 결국 물의 흐름을 막지 못한다. 그것이 역사고 법이다.

지금 우리시대의 다수는 과연 누구인가. 그리고 왜 시민들은 이 밤도 촛불을 들고 거리로 나서야 하는가…. 직장인이기에 어쩔 수 없다면 차라리 조용하게 있기를, 그래도 기자라면 제발 부끄러워라도 하기를….

독자들도 유윤종 차장의 글을 한 번 감상해 보시길.

더 많은 사람의 진실2

폰 트랍 대령이 누구인지는 많은 사람이 알 것이다. 영화 ‘사운드 오브 뮤직’의 실제 주인공인 그는 1938년 나치의 오스트리아 병합에 반대해 가족을 이끌고 미국으로 망명했다. 영화에는 그가 공연에서 ‘에델바이스’를 불러 오스트리아인의 애국심을 자극하자 청중 대부분이 따라 부르는 장면이 나온다. 그러나 이는 당시의 분위기에 비춰 볼 때 있을 법하지 않은 장면이다. 나치가 오스트리아를 무력 병합한 뒤 실시한 주민투표에서 99.73%가 병합에 찬성했다. 기자가 우리 사회의 특정 세력을 나치에 비유했다고 생각하지 말기 바란다. 위에 언급한 사실은 ‘분노’와 ‘열정’이 대중의 올바른 선택을 가로막을 수 있음을 증명하는 고전적인 사례일 뿐이다. 오스트리아인들은 대제국이었던 모국이 제1차 세계대전 이후 한낱 소국으로 전락했다는 사실에, 또한 테러의 만연과 혼란에 분노했다. ‘우리는 대(大)독일인이다’라는 민족주의적 열정은 나치의 독(毒)을 들여다보지 못하게 했다.

민족애는 분명 인간의 열정을 끌어내는 데 적합한 도구 중 하나다. 최근 우리 사회를 휩쓴 열정도 그렇다. 우지(牛脂)라면 파동이나 만두파동에서 경험했듯 누구에게나 민감한 식품안전문제에 ‘미국에 빌붙어서…’라는 민족주의적 열정이 결합했으니 그 폭발력은 이해할 만하다.

오스트리아 작가 슈테판 츠바이크는 자서전 ‘어제의 세계’에서 제1차 세계대전 직전 프랑스의 소도시 영화관에서 접한 두려운 현실을 회상한다. 뉴스필름에 독일 황제가 등장하자 순박한 시골 농부들과 소상인들은 일제히 일어나 욕설을 퍼부었다. 그것은 1차 대전이 발발하자 츠바이크가 가장 먼저 머릿속에 떠올린 장면이기도 했다.

요즘 많은 사람들이 ‘다수’에 기대어 분노와 열정을 표출한다. 시위 저지용 컨테이너가 등장하자 “시민과 벽을 쌓겠다는 거냐”며 목소리를 높이더니, 컨테이너가 사라지자 기다렸다는 듯이 경찰 버스를 두들겨 부순다. 마음에 들지 않는 언론사 건물을 딱지로 장식하고 사기(社旗)까지 끌어내리는 그들의 모습은 제법 용맹스러워 보인다.

그러나 그것이 용기일까. 기자는 ‘다수의 열정에 함께 도취하는 것이 아니라 다수의 오만에 저항해 목소리를 내는 것이 용기’라고 배웠다. 앞서 언급한 츠바이크는 1차 대전이 막을 내린 뒤 프랑스 작가 로맹 롤랑 등과 손잡고 국가 간의 연대와 이해를 호소하는 평화주의 운동을 펼쳤다. 그러나 이탈리아와 독일에서 파시스트가 집권하자 그들의 목소리는 묻혀버렸고 츠바이크는 고국을 떠나 떠돌아다녀야 했다. 그들의 용기가 올바르게 평가된 것은 2차 세계대전 이후 ‘하나의 유럽’을 호소하는 목소리가 나오면서부터였다.

모두가 고열에 들떠 있을 때 이성의 목소리는 외면받기 일쑤다. 그 조용하지만 당당한 소리에 귀를 기울이게 되기까지는 시간이 걸린다. 충돌과 소란의 파열음을 힘들게 감당하고 있는 우리 사회도 마찬가지다. 시간이 지나 들뜬 열정이 가라앉고 나서야 한 시대가 마주했던 우행(愚行)이 드러날 것이다.

한때 ‘다수’에 도취해 자신이 어떤 일을 했는지 깨닫지 못했던 수많은 사람들도 때가 되면 그 값을 내게 될 것이다. 많은 것을 낼 필요는 없다. 단지 스스로가 부끄러워지는 것으로 족하지 않을까 싶다. 1980년대 구소련과 동구권의 ‘인간성이 실현된 사회’를 예찬했다가 훗날 그때에 대해 말 꺼내기를 주저하게 된 많은 사람들처럼.

유윤종 국제부 차장 gustav@donga.com

저작권자 © 미디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