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인터뷰] '인권중심 사람'의 박래군 소장을 만나다 ① 에서 이어집니다. (기사 바로가기)

▲ 인권중심 사람 박래군 소장은 인터뷰 내내 '기존 운동의 관성을 버려야 운동의 활력을 찾을 수 있다'고 강조했다. ⓒ미디어스

미디어스(이하 ‘미’): 박래군하면 ‘인권운동사랑방’인데, ‘인권중심 사람’을 개관하면서 단체 활동을 정리했다. 현장을 떠난다는 의미일 수도 있고, 개인적으로 보더라도 20년이 정리되는 큰 변화일 것 같다.

박래군(이하 ‘박’): 무엇보다 똥차가 후배들에게 부담 주면 안 되는 것 같았다.(웃음) 실제로 재단 일을 계속 하다 보니 사랑방의 원칙, 정신과는 안 맞는 부분이 발생했다. 얼마 전에 서울시인권위 부위원장을 맡았는데, 이런 활동이 재단에서는 문제가 안 되지만 어찌되었건 국가 기구에서 활동한다는 것이 사랑방의 원칙과는 맞지 않는 부분이라고 판단했다.

사랑방 활동은 진작부터 정리할 생각은 가지고 있어서 별 다른 감정적 동요가 없을 줄 알았는데, 막상 후배들이 쫑파티를 해주니까 많은 생각이 들었다. 94년 8월 1일부터 올해 2월까지. 벌써 18년 6개월이 흘렀다. 거기 내 인생이 묻혀 있고, 거기서 인권 운동을 배웠고, 인권운동의 많은 것을 새롭게 개척하는 행운을 누렸다.

개인적으로 현장에서 활동하고, 현장에 있는 게 제일 좋다. 살아있음도 느껴지고. 그런데 최근에는 대한문 쌍용차 농성장 외에는 의식적으로 현장에 별로 안 가려 한다. 여러 군데 현장에 결합하고 싶은 마음이야 굴뚝같지만, 사람이 다 할 수는 없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으로 마음을 다잡고 있다.

미: 인권활동가가 현장을 떠난다는 것의 의미는 어떤 것일까. 인권 개념의 제도화와 인권 운동의 현장은 여전히 거리가 있는데.

박: 인권운동을 20년 넘게 하면서, 원했건 원치 않았건 나도 이 판에서는 권력화 되는 측면이 있었다. 그리고 나이가 들고 인권운동의 전체를 바라보며 ‘내가 해야 하는 일이 있는 것이 아닐까’, ‘개인적 의도대로만 움직여선 안 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역할에 대한 고민을 하게 됐다. 현장에서 열심히 싸우는 후배들이 못하는 일이 바로 내가 해야 하는 일이 아닌가 하는 부분이다. 인권중심 사람으로 거점을 만드는 것도 그런 일이고, 돈을 모으고 인권 활동의 저변을 넓히는 일도 중요하다는 생각이다. 그리고 한국 사회 운동의 큰 문제로 물러설 때가 된 선배들이 물러서지 않으며 후배들이 자기 책임을 갖고 일을 한다는 생각을 못하게 된다는 부분도 있다.

미: 현장의 운동은 언제나 그 현장의 당위가 있다. 이건 선명한 것이고 그걸 지키는 것만으로도 운동이 된다. 그런데 제도 안에서의 운동은 옳고 그름의 경계가 분명하지 않다. 현장 중심의 활동을 떠난 다는 건 그래서 운동의 일선에서 떠난다는 느낌을 줄 수도 있다.

박: 지금도 현장에서 오는 요구들이 많다. 그리고 무엇보다 언제든지 돌아갈 수 있다는 생각도 한다. 사실, 그러는 게 제일 속도 편하고 깨질 땐 깨지고 잡혀갈 땐 잡혀가도 살아있는 것 같다. 그러나 현안 싸움도 중요하지만 한편으로는 멀리 보고 토대를 만들며 가는 것도 필요하다. 당장에 인권활동가들이 충원이 안 되는 구조이다. 이걸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 이런 고민이 필요한데 아무도 구체적으로 못한다. 예컨대, 사랑방의 경우에도 예전에는 활동가 구하기가 쉬웠는데 요즘은 상임 활동가는 안 하려고 한다. 경제적 문제가 워낙 있으니까. 이런 부분을 극복하면서 지속 가능한 인권운동을 고민하는 사람이 있어야 한다면 그게 내 역할이라고 생각한다. 인권단체 활동가들의 4대 보험을 어떻게 보장할 것인지, 최저생계비 이상을 어떻게 주어야 하는지 구체적으로 고민하고 있다.

▲ 인권 변호사 출신 박원순 서울시장은 '서울특별시 인권위원회'를 구성해, 각계의 인권 인사들을 위원으로 임명했다. 여성, 장애인, 이주민 등 인권 관련 전문가 총 15명으로 구성된 인권위원회는 시정 전반에 걸쳐 인권에 영향을 미치는 주요 시책, 법규 등을 심의하고 자문하는 등 인권정책을 추진할 계획이다. ⓒ뉴스1

미: 서울시 인권위원회 부위원장을 맡기도 했지만, 요새 부쩍 인권 개념의 제도화 움직임이 많은 것 같다. 그런데 인권조례 파문에서 보듯 준비가 부족한 상태에서의 제도화가 가져오는 문제도 만만치 않은 것 같다.

박: 제도화 이후 가장 큰 타격을 입은 게 이주노동운동이다. 현재 명맥만 유지하고 죽다시피 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국가 차원에서 지자체 차원에서 다문화가족 지원법을 만들고 센터들을 만들었다. 누군가는 거기서 일을 해야 하니 이주노동 운동하던 사람들이 빨려 들어갔다. 사람이 들어가니 운동 자체가 아예 제도 안에 흡수되어 버렸다. 주어진 역할을 하기에 바쁘니 무언가를 관철하거나 변화시키지 못했다. 다문화라는 개념 자체가 외국인을 한국 문화에 동질화시키는 것이었는데, 근원적 저항은 제도화 과정에서 놓쳐 버렸다. 결과적으로 애초 이주노동운동이 가진 활력과 지향을 많이 잃었다. 장애인 운동도 마찬가지다. 정부에서 센터를 만들면 이걸 유지하는데 급급하고, 운동 역량이 성장하는 게 아니라 시설을 커버하는데 역량이 소진되는 경우가 많다.

인권운동 역시 이런 우려가 있고, 경계하고 극복하며 가야 한다. 인권 개념이 제도화될 때 어떤 전략을 취햘지, 거버넌스가 확대되는 데 대한 준비를 어떻게 해야 하는지 시급하게 논의해야 한다. 여기서 가장 중요한 것은 운동적 지향을 잃지 않으면서 끌고 갈 수 있는 젊은 ‘선수’들이다. 이게 준비돼야 한다. 당연한 얘기인데, 현안 싸움을 하는 단체나 활동가들은 필요하다고는 생각하지만 이런 준비를 못한다. 이 준비를 하려고 한다.

미: 사회운동 얘기를 좀 해보자. 이명박 정부 이후 전반적으로 운동의 퇴조 현상이 역력하다. 활동가 재생산이 안 되는 차원이 아니라 총체적 위기인 것 같다. 박근혜 정부 들어서도 전반적으로 무기력한 모습이다.

박: 사실, 2007년 대선에서 민주노동당이 깨지고 2008년 분당되었을 때, 우리 사회가 가진 운동의 바닥이 다 드러났던 것이 아닌가 싶다. 물론, 그 때도 다들 위기를 이야기했지만 2008년 5월부터 갑자기 촛불이 타오르면서 착시가 발생했다. 정파 문제가 운동의 판을 깨는 상황에 대해 대수술을 했어야 하는데 촛불에 환상을 가지면서 5년 간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우연 발생적인 시민들의 폭발적인 힘에 끌려오다시피 했다. 모든 것을 끌어모았지만 이번 대선에서 박근혜가 당선된 것은 이 초라한 실체를 적나라하게 드러낸 사건이었다. 박근혜 당선으로 그래서 다들 ‘멘붕’에 빠졌고, 정서적인 부분은 아직도 다 극복이 되지 않는 것 같다. 진보운동 진영에서는 문재인이 돼봤자 똑같다고 했지만 현실적으로 그렇지는 않았다. 다 끌어모아 봤지만 48%였고, 그래도 졌다는 건 오래 남을 것이다. 정권 교체에 대한 열망이란 것이 세상이 변화할 것이란 가능성에 대한 기대이기도 하다. 변화의 가능성이 상실되면서 발생한 멘붕은 오랜 상처로 남을 것이다. 당장에 대한문 앞만 보더라도 작년 같지 않다. 대선 전에는 호응과 열기가 있었다. 지금은 참가자도 절반 이하로 떨어졌고, 감정싸움만 남은 고립된 투쟁이 이어지고 있다.

▲ 대한문 앞 농성장은 하루하루 위태로운 상황에서 힘겨운 투쟁을 이어가고 있다. 진보의 실패가 운동의 위기를 부르고 운동의 위기가 투쟁의 고립으로 이어지는 악순환을 끊어내기 위한 과제는 무엇일까? ⓒ뉴스1

미: 진보의 실패 이유는 무엇인가?

박: 진보운동은 두 가지 차원에서 패배했다. 우선은 이데올로기 전선이다. 사회복지국가 개념은 진보진영의 오래된 담론이었는데, 이걸 새누리당이 국민행복시대라며 자기 걸로 만들었다. 이 때 이쪽에선 아무런 대응도 대안도 없었다. 우리 사회가 어디로 가야한다는 담론을 제시하지 못했고 오히려 잃어버린 것이다. 이게 컸다고 본다. 그 과정에서 ‘종북’으로 밀리고 이걸 방어할 힘도 대오도 없었다. 또 하나는 조직적 기반이 다 무너진 것이다. 한국 사회 운동을 이끌던 대중조직이 다 무너졌다. 민주노총뿐만 아니라 농민운동, 빈민운동 등 대중적 기반을 갖던 운동이 다 붕괴했다. 여기서 출발할 수밖에 없다고 본다. 다시, 대중적 기반을 만들어 가는 것, 이를 차근차근 준비하는 것을 해야 한다. 이 준비는 단순히 했던 것을 다시 회복하자가 아니다. 멀리 보고, 어디서 어떻게 만들 것인가부터 새로 해야 한다. 노조도 사회민주주의국가인 북유렵의 그것처럼 지역에서 주민들과 함께하는 기반에서 토대를 바꿔 가야 한다. 어용까지 합치더라도 조직율이 10%도 안 되는 노조들이 중앙에서 아무리 뭘 해봐야 힘이 없다. 지역사회를 바꾸는 힘으로 결집을 할 수 있어야 한다.

미: 지역에 대한 고민이 운동의 돌파구가 될 수 있겠지만, 그게 또 전부가 될 순 없단 생각도 든다.

박: 생활의 기반이 되는 지역 사회의 결집, 이런 걸 차근차근 만들며 진보정당의 재건을 고민해야 할 것이다. 진보정당 원내 진입 이후 정당운동도 우리가 권력만 잡으면 될 것처럼 생각하지만 막상 그런 권력 잡기도 어렵고 잡아도 컨트롤을 못 할 가능성이 크다. 운동은 선순환 구조여서, 사회운동이 강해야 정당도 제대로 가고 그래야 정당이 권력을 잡아도 제대로 운영할 수 있다. 운동이 크지 않는데 정당 중심으로 가면 무너지는 건 금방이다. 그러기 위해선 기존의 조직 방식으로는 안 된다. 80년 식 조직관과 방식으로는 이제 어렵다. 대중을 가르치는 운동이 아니라 대중이 주체가 되어 참여하는 열린 방식이어야 한다. 희망버스의 사례에서 보듯 사회의 변화를 염원하는 에너지는 지금도 출렁출렁한다. 이걸 폭발시키는 것은 ‘내가 대상이 아니라 주체’라는 느낌이 오는 순간이다. 단 돈 만원을 내더라도 내가 주체이다는 생각을 가질 때, 움직이는 것이 대중이다. 우리가 다 해놨으니 여기 참여하라는 방식의 기존 운동 문화와 관점을 다 버려야 한다.

미: 대중의 주체성을 말했지만, 이명박 정부에서 흥했던 일련의 운동적 흐름을 보면, 운동권이 매체 환경의 변화에 너무 둔감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운동이 축적한 결과보다는 변화한 미디어 환경 속에서 대중이 반응한 이슈만 타올랐단 생각이다.

박: 맞다. 인권센터 만들 때 SNS덕을 많이 봤다. 더 이상 사람들에게 이게 중요하고 무언가를 하는 게 절박하니까 도와달라는 방식으로 접근해서는 안 된다. 이게 무엇인지, 어떤 진정성이 있는지, 지위보전을 하려는 것인지 누가 출세를 하려고 하는 것인지 다 나름대로 각자 판단을 한다. 예컨대, 희망버스의 경우 한진중공업 사태의 본질적 대의가 아닌 SNS에서 김진숙 지도위원의 맨션이 사람의 마음을 움직였던 것이었다. 이 사이에 운동이 한 일은 없다. 운동권의 가장 큰 고민은 그 소통이다. 소통의 장을 어떻게 만들 것인지의 여부다. 나부터도 낡았다. 민주노총이 내는 성명에 단체들이 발표하는 입장에 대중이 얼마나 관심을 갖겠는가? 이렇게 얘기하면, 점점 기존 운동권은 안 된다가 되는데(웃음) 강조하고 싶은 것은 새롭게 만들어야 한다는 점이다.

미: 기존 운동권은 안 된다는 얘기는 꽤 오래된 얘기다. 그만큼 운동의 혁신이 어렵다는 얘기이기도 하다.

박: 그렇다. 한편으로는 조직을 계속 만들고, 누군가는 단련을 열심히 하고 누군가는 확산하는 과정이 동시 발생해야 하는데 그걸 못 한다. 어렵다. SNS를 통해 이슈가 확산하는 부분역시 조직된다기 보단 막연하게 ‘때가 되면 누군가 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최근 들어 몇 개 사례는 가능성을 보여주고 있다고 생각한다. 서울 희망연대노조나 씨앤엠 노조, 서울시 다산콜센터 같은 경우들이다. 그런 노조들의 경우 노조 만들며 초기부터 지역사회를 고민하는 활동을 병행하고 있다. 씨앤엠 지부가 서울 곳곳에 있는데 노조를 만들면서 아예 초기부터 지역단체들과 연계한 활동을 설계했다. 낮은 수준에선 지역 사회의 자원봉사도 하고 지역 단체들에 대한 다양한 후원도 한다. 지역에 공부방 열리면 자기들도 후원금 내고 자원봉사 하는 방식이다. 이게 아무것도 아닌 것 같지만 그러면서 다져진다. 상징적인 장면은 노조총회를 하는데 지역 사회에서 온다. 지역 내 사회단체 대표들 와서 인사하고 같이 하는 게 쌓이면 운동의 선순환이 된다. 그리고 국제연대도 한다고 한다. 네팔에 학교 지어주고 후원하고 가서 봉사도 하고 이런 일을 하면서 국제적 연대 틀도 만들어가는 것이다. 노조의 활동이 이런 식으로 바뀌어 간다면 상황이 많이 달라질 것이라고 본다. 지역적으로 보면 인권중심 사람이 있는 마포 쪽은 각양각색 실험 이루어진다. 생협, 도서관 등등 거점은 많다. 그런데 힘을 결집할 수 없다. 역시 정파가 문제다. 운동이라는 게 대의를 가지고 하는 것이니 불가피하게 정파가 있을 수 있다. 그런데 정파가 정파의 눈앞 이익을 위해 뭘 한다는 건 사회운동이 아니다. 근데 마포만 보더라도 지역 활동을 하면서 끊임없이 정파 싸움을 한다. 그걸 어떻게 통합하느냐가 문제인데, 이건 또 기성 운동권의 문제로 환원되는 건가.(웃음)

미: 한국 사회에서 제일 후배들이 가장 좋아하는 활동가 중 한 명이었고 많은 이들이 운동을 떠나 유명한 정치인이 되는 현실에서도 운동의 네트워크 저변을 구축하는 활동을 시작했다. 활동가가 아닌 사람 박래군의 개인적인 꿈은 무엇인가?

박: 내 꿈은 인권운동이 지속 가능하도록 토대를 만드는 것이고 운동이 누구 한 사람이 있다고 해서 잘 되고 없으면 안 되는 구조를 탈피하는 것이다. 돌이켜보니, 내가 이 바닥에서는 권력이다. 많은 걸 독점하고 있었다. 그래서는 안 외고 나누어야 했는데 부족한 부분이 많았다. 그래서 지속 가능한 운동, 한 사람이 하는 것을 열 사람이 하고 그 이상이 같이 할 수 있는 운동을 만들었으면 좋겠다. 그래서 진보운동 전체가 아까 이야기한 것처럼 기본으로 돌아갔으면 좋겠다. 60살이 되기 전까지는 그걸 보고 싶다. 그 다음으로 개인적으로 하고 싶은 건 운동한다고 미루던 소설 쓰기이다. 60부터 70까지이 불후의 명작을 쓸 것이다.(웃음) 아직 우리 사회는 용산참사 나도 난쏘공을 보는 형편이다. 난쏘공 이후 재개발을 다룬 소설이 볼 만한 게 없기 때문이다. 물론 당시나 지금이나 재개발 방식이 크게 다르지 않기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용산참사를 제대로 다룬 소설이 왜 없나는 고민해볼 부분이라고 생각한다. 현장 경험과 감을 가지고 리얼리즘 소설을 재미있고 섹시하게 쓰고 싶다는 꿈을 갖고 있다. 7~80년대 문학의 전통이었던 리얼리즘이 90년대 들어 포스트모더니즘의 공격을 받으면서 그냥 사라져 버린 상황에서 다른 방식의 리얼리즘을 고민하는 소설을 써보고 싶다. 그게 인생 3막의 꿈이다. 그리고 운동적으로 봐도 60정도 되면 떠나야 한다. 그 때가 되면 집행위원장, 대표에서 물러나지 않고 있는 선배들도 다 앉고 떠나겠다.(웃음) 50대 초반인데도 나이를 먹으니 확실히 보수화된다. 지킬 것이 많아지고 재는 게 많다. 판단력도 빠르지 않다. 60살이 되면 단체에서 복사도 하고 전화도 받아주는 자원봉사를 하고 싶다. 언제까지 꼰대 노릇을 할 순 없지 않은가.(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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