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래군, 알 만한 사람은 알고 모르는 사람은 모르는 이름이다. 하지만 당신이 박래군을 아느냐 모르느냐는 바로 지금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 가를 가늠할 수 있는 하나의 기준점이 될 수도 있다. 그는 한국 사회에 그런 이름이다.

그에 대한 설명은 간단치 않다. 한때 그는 ‘재야의 장의사’라고 불렸다. 87년 이후 호헌이 철폐되고 직선제 개헌이 이뤄졌지만 세상이 여전히 ‘열사’들의 분노에 휩싸여 있을 때, 그는 뜨거운 현장이 차갑게 ‘탈취’되는 것을 막아서는 마지막 전선이었다. 그리고 오래도록 한국 사회 인권의 대명사였다. 94년 인권운동사랑방 활동을 시작한 이래 19년 가까이 한국의 거의 모든 인권 현장이 그의 무대였다. 장애인 시설에서 똥바가지를 쓰고, 노동 현장에서 무수한 전경의 발길질과 싸우며 그는 한국 사회의 인권을 넓고 깊게, 그리고 오래 지켰다.

▲ 박래군 소장은 인권운동사랑방의 상임활동가로서 지난 2006년 평택 대추리 투쟁에도 활발히 결합했다.

하지만 이보다 더 그를 잘 설명할 수 있는 것은, 그가 진정한 의미에서 한국 사회 운동의 맏형이란 점이다. 물론 그보다 더 나이가 많은 선배들도 있지만 그를 아는 후배 활동가들은 가장 존경하는 선배가 누구냐는 질문에 십중팔구 그를 꼽는다. 그와 함께 운동을 했던 이들과 선후배들이 금배지를 달거나, 꼭 그렇게 드러나는 출세가 아니더라도 각자의 분야에서 ‘권력’을 논할 수 있는 자리에 올라서는 동안에도 그는 끊임없이 ‘현장’을 더 아래를 넉살좋게 지켜왔다.

참여정부에서도 갇히고 이명박 정부에서도 구속됐던 이 불세출의 활동가가 용산 수배 생활을 끝내고 출감한 이후 문득 이제 현장이 아닌 ‘배후’를 구축하겠다고 나섰을 때, 그래서 모두가 의아해했다. 박래군은 모든 종류의 활동 가운데서도 특히 ‘현장’에 적합한 활동가였다.(특히, 그의 외모는 어떤 투쟁 현장에 가더라도 전혀 이질감이 없는 최적의 맞춤형 조건을 갖추고 있다.) 그리고 2년여 만에 박래군은 ‘인권중심 사람’이라는 한국 사회가 한 번도 가져보지 못한 거점을 선보였다. 그 스스로 “무식해서 용감했다”고 대견해하던 기적 같은 일이다.

드물게 따스한 햇볕이 내리쬐던 3일 오전, 막바지 내부 공사로 분주한 ‘인권중심 사람’에서 그를 만났다. '인권재단 사람'의 상임이사에 이어 '인권중심 사람'의 소장이라는 직함을 하나 더 달게 된 박래군은 “개관 문제로 속이 타서 안 그래도 검은 얼굴이 더 까매졌다”는 농담을 하며 허허 웃어 보였다.

미디어스(이하 ‘미’): 단도직입적으로 묻자. 해야 하는 투쟁은 많고, 인권의 이슈는 점점 늘어간다. 그런데 왜 이런 공간과 거점이 필요하다는 무모한 생각을 하게 됐나?

박래군(이하 ‘박’): 내가 처음 한 게 아니다. 용산 투쟁 때 순천향병원에서 명동성당으로 수배 생활을 하면서 회의를 하려면 사람들이 내가 있는 곳으로 찾아와야 했다. 후배들이 거기서 착상을 했는지 2009년 11월 쯤 인권센터―당시에는 ‘인권 동네’라고 불렀다―같은 공간을 만들면 어떻겠느냐고 제안했다.

생각해보면 국가인권위원회 외에 마땅한 인권 운동의 거점이 없었고, 다른 공간은 대관료와 같은 사용 요금이 비쌌다. 무엇보다 인권단체들이 분화되어 있어 모이기 힘들고 교류하기도 어려웠다. 어떻게 이를 강화하는 역할을 할 것인지가 문제의식의 출발이었다.

미: 막연하게 생각하는 것과 실제 추진하는 것은 달랐을 텐데, 만만치 않았을 것 같다.

박: 돈이 있었으면 쉬웠을 텐데, 우리가 돈이 없었다.(웃음) 시민들을 상대로 대대적 모금을 해 본 경험이나 노하우도 없었다. 그래서 처음에는 인권센터가 있으면 좋겠지만 터무니없고 어처구니없는 발상이라고 생각했다. 당장에 한 푼도 없는데 센터를 만들자는 것이 얼마나 황당한 생각인가.

▲ `용산참사'와 관련 불법 집회 주도 등 혐의로 체포영장이 발부된 이종회, 박래군 용산참사 범국민대책위원회 공동집행위원장과 남경남 전철연 의장 등 수배자 3명이 2010년 1월 11일 오후 명동성당에서 경찰에 자진 출두에 앞서 열린 기자회견을 열고 입장 발표와 나온 유족과 관계자들과 인사를 나누고 호송차에 오르는 모습.ⓒ민중의소리

그런데 2010년 1월에 용산 장례식이 끝나고 경찰에 출두해서 구속된 뒤 감옥에서 4개월 간 있으면서, 인권운동의 현재 상황을 극복할 수 있는 방안 중 하나로서 공간을 확보해야 한다는 생각이 점점 들었다. 시민들이 인권이라는 개념에 접근할 수 있는 장소가 있어야겠다는 생각이었다. 활동가들은 치열하게 현장에서 활동하지만 거기서 만날 수 있는 사람들은 소수다. 그래서 개별 투쟁이 인권의 문제라는 총합적 과정으로는 나아가지 못한다. 이걸 매개하면 고립된 인권운동을 벗어나 인권 의제가 확산되고 시민과 함께하는 인권 운동이 가능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계산도 해 봤다. 만 원씩 내는 사람이 우리사회에 10만 명이 없겠나. 인권이 소중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그 정도는 될 것이고 그러면 10억이다. 이런 단순 무식한 계산.(웃음) 그래서 목표가 10억이 됐다. 그리고 100평정도 있으면 할 수 있겠다. 그래서 100평. 근거 없이 했던 그 생각, 그게 목표가 됐다.

미: 투쟁과 모금은 전혀 다른 성질의 활동인데, 그래서 10만 명을 모았나?

박: 물론 못 모았다. 인권중심 사람에 주춧돌로 참여해 준 사람은 3천 명 정도이다. 돌이켜보면 이런 숫자도 기적이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이 기적이 왜 가능했느냐를 돌아보면 이명박과 현병철 국가인권위원장의 공이 컸다. ‘이명박 정부 들어 인권위가 제 기능을 못하고 그런 인권위를 견제할 힘이 우리에게 있어야 한다’는 설명이 먹혀들었다. 국가적 차원의 인권이 망가지는데 시민적 차원의 견제가 필요하다는 논리가 설득력 있게 전달된 셈이다. 이명박의 도움에 정말 감사하다.(웃음)

인권센터에 참여한 시민들의 열망은 조금씩 다르겠지만 모아보면 ‘우리사회에 아직 그런 것도 없어’의 정서가 있었던 것 같다. 3천 명의 후원자 가운데 천 명 정도는 기존의 인권단체나 인권 문제에 관심을 갖고 후원을 해왔던 이들이지만 대략 2천 명 가량은 새롭게 우리에게 포섭된 이들이 아닐까 싶다. 인권센터 건립 캠페인을 통해 인권운동을 알게 되고, 인권의 문제에 관심을 갖게 된 사람들, 그리고 그 사람들이 만들어낸 이 공간은 굉장히 소중한 자원이고 에너지이다.

▲ 마포구 서교동 주택가 한가운데 위치한 '인권중심 사람'의 건물 외관.ⓒ미디어스
미: 건물 모양새가 여러 가지로 특이하다. 인권 의제에 소수자성이 중요한 만큼 입지선정이나 장소에서도 고심이 있었을 것 같다.

박: 원래 서대문역 근처에 마련하려고 했다. 시내여서 접근성이 괜찮고 전철역이 가까운데 서대문만큼 (지대가) 싼 곳이 없다. 시내를 벗어날 경우에 심리적 거리감이 있다는 점도 고려했다. 그런데 서대문에 영 (마땅한 장소가) 안 잡혔다. 그리고 알아보면 알아볼수록 임대를 하면 참 어렵겠다 싶었다. 한 달에 5~600만원을 월세로 낼 생각을 하니, 어렵게 모은 소중한 돈이 그냥 깨진다는 생각이 들었다. 또 애써 편의시설을 만들었는데, 주인이 임대료를 올리겠다고 나올 경우 어찌될까 하는 숱한 고민 끝에, 작년 9월 ‘땅값도 떨어지는데 무리해서 사 버리자’는 무모한 생각을 하게 됐다. 이렇게 골목 깊이 들어오게 된 배경이다.

미: 서울시내에 장소를 빌리는 것과 건물을 짓는 것은 천지차이다. 자금의 압박이 상당했을 것 같다.

박: 시세보다 싸게 나왔던 이 곳 부지를 매입하긴 했는데, 돈이 3억이 부족했다. 10월 경 안 되겠다 싶어 부랴부랴 ‘3억만 빌려 달라’고 호소했다. 그런데 놀랍게도 딱 50일 만에 3억이 모였다. 그 중에 1억은 안 돌려줘도 된다고 한 돈이었다. 감격했다. 물론 2억 가량은 3년 후 갚아야 하는 돈이다.

집을 지어본 경험이 부족해 시행착오도 많이 겪었다. 명물로 불리는 저 엘리베이터도 아직 잔금이 남아있다. 법인 주소 이전을 하며 절차상 세법을 잘 몰라 세금을 8천만 원 가까이 내기도 했다. 지금도 1억 정도 돈이 모자란다. 아직 집기도 많이 부족하다.

미: 사회 운동의 총체적 후퇴 속에서 이런 거점이 만들어졌단 사실 자체가 유의미한 것 같다. 거점을 확보해내겠단 1차적 꿈을 이뤘는데, ‘인권중심 사람’은 이제 그럼 여기서 무엇을 할 것인가?

박: 구상은 많이 한다.(웃음) 기본적으로 인권단체들이 많이 활용하는 기반시설로 만들고자 한다. 2층 다목적 홀은 영상, 음향 시스템을 갖춰 작은 음악회까지도 할 수 있다. 물론, 아직 뒤에 방음시설을 만들고 에어컨도 달아야 하는 문제는 있지만 말이다.

이 밖에도 PPT를 틀 수 있는 회의실도 있고, 장서 만 권을 목표로 인권 도서관도 구축할 계획이다. 인권도서관 구축에는 단체들에서 내는 자료집들도 다 모아보려고 한다. 그게 운동의 역량인데 아무도 관심이 없어 사장되고 만다.

인권을 매개로 한 다양한 행사, 세미나, 작은 모임들이 여기서 이루어지길 간절히 바란다. 인권센터의 고유 사업으로는 ‘사회적 시민 양성’을 생각하고 있다. 한 마디로 사회경제적 권리를 알리는 시민들의 학교를 만드는 일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자신에게 있는 사회경제적 권리에 대해 잘 모른다. 이 권리들을 알고 의식을 갖춘 시민이 있어야 사회적 연대도 활성화 될 것이다. 활동가 재생산과 관련된 부분도 준비 중이다. 초급 활동가를 위한 일종의 훈련 프로그램이나 인권연구소 창 등 외부 인권단체와 연계한 교육도 기획할 예정이다.

개인적으로는 시민들과의 인권 접점을 늘려가려고 한다. 작년에도 진행했던 ‘인권현장기행’에서는 전쟁 시기 민간인 학살 지역이나 소록도, 서대문형무소, 남산 안기부 터, 남영동 대공분실 등 가까운 서울의 국가 폭력의 현장에 함께 가려고 한다. 평택, 노근리, 거창, 광주, 제주로 이어지는 한반도 평화기행도 생각중이다. 브루스 커밍스를 부르면 흥행도 도움이 될 텐데 어찌될지 모르겠다.(웃음) 노동권과 관련해서도 평화시장이나 구로동 같은 노동인권의 현장들을 시민들과 함께 돌아보며 현장에서 설명하는 프로그램을 생각하고 있다. 인권의 확산을 위해선 백 번 강연하는 것보다 이게 더 효과적이다.

▲ '인권중심 사람'의 박래군 소장.ⓒ미디어스

미: 한국사회의 인권 의식이 많이 성장한 것 같지만 노동자들의 투쟁을 바라보는 시각이나 소수자 문제에 대한 배타성을 보면 상당한 괴리가 느껴지는 것도 사실이다. 인권 개념의 확산을 고민하는 입장에서 어떻게 보고 있나.

박: 인권중심 사람을 통해 궁극적으로 하고 싶은 건 시민들이 스스로 인권활동을 할 수 있게 하는 것이다. 일종의 인권 개념에 기반을 둔 시민 네트워크 만들기이다. 그 동안 인권운동을 하면서 적은 인원으로 열심히 잘해왔지만, 대중적 기획은 좀 부족하지 않았나 싶단 반성이기도 하다. 인권 개념의 확산과 인권에 대한 지지 기반을 만들 여력이 없이 ‘빡세게’ 싸워오기만 한 셈이다. 그러다보니 어떤 문제에 있어선 시민들이 끼어들기가 어렵다. 그런 부분을 넘어서고, 만들어내고 싶다.

미국 시민들은 자발적으로 CIA를 감시하는 모임을 갖는다. 국가 권력의 폭력과 위험성을 시민들이 인식하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라고 해서 이런 모임이 안 될 이유는 없다. 한국의 인권 의식 확산은 개인이 인권침해 피해를 당하고 피해 사실을 구제받는 개념에만 머물고 있는데 이를 넘어서는 인권 시민의 등장을 원한다. 인권의 네트워크를 만들기 위해 넓고 길게 가려고 한다.

‘인권중심 사람’은 지난 29일 개관식을 통해 사람들에게 처음 공개되었지만 아직 제대로 완성되지는 않았다. 1.5층에 위치한 ‘동화 인권도서관’에 비치할 장서는 물론, 회의실과 다목적홀 등 각종 공간을 채울 집기가 부족하다. 또한 교통약자들을 위해 세심하게 설계된 ‘명물’ 장애인용 엘리베이터도 손봐야 할 지점이 많아 멈추어 있다. 이 모든 문제를 아우르는 원인은, 물론 돈이다.

박래군 소장은 “세금까지 해서 앞으로 1억이 더 필요하다”며 “독자들이 이런 데 관심을 갖고 힘을 보태주면 좋겠다. 안 그러면 장애인 엘리베이터를 기껏 만들어놨는데 운행도 못 하고 설지 모른다”고 호소했다.

‘인권중심 사람’의 개관 이후 운영을 도울 수 있는 방법은 ‘주춧돌’이 되는 것이다. 다달이 CMS(자동출금)을 통해 일정 금액을 꾸준히 후원할 수도, 계좌에 직접 일회 기부금을 입금할 수도 있다. 모금 참여는 ‘인권재단 사람’ 홈페이지(바로가기)에서 할 수 있다.

* [인터뷰] '인권중심 사람'의 박래군 소장을 만나다 ② 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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