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영화 <지슬>을 보자. 아시다시피, 이 영화는 제주 4.3의 비극을 위령하고 있다. 지난 3월 21일 개봉이래, 13만여 명에 달하는 관객이 제사에 참여하였다. 양익준 감독의 <똥파리> (12만3천36명) 이후, 4년 만에 그를 넘어서는 흥행이라 한다. 독립 (극) 영화사상 초유의 기록. (오멸 감독은 ‘제주’의 독립영화로 불리길 바라는 듯 하지만) 선댄스 영화제, 심사위원 대상의 기대와 더불어, <지슬>은 항쟁의 기일에 찾아왔다. 제주의 대지에 잠든 비극의 기억은 진혼되지 않았다. 영화 바깥의 상황과 영화 안 편의 함량, 그 호응과 공명. <지슬>은 독특한 영화적 지향으로 관객들의 발길을 잡아채었다. 제의의 행렬은 아직도 면면히 꼬리를 물고 있다.

 

다시, 영화 <지슬>에 관한 비평을 보자. 개봉 후, 한 달이 지났다. 뭍 평자들이 <지슬>의 새로움과 찬연함을 발굴하는데 진력하였다. 변성찬 평론가는 오멸 감독의 전작들을 반추하며, “역사적이면서 동시에 영화적인 영점으로의 회귀 시도”로서 <지슬>의 영화적 감동을 짚어내었다. (씨네 21 896호, <변성찬의 독립영화비행> “원시의 리듬으로 - 오멸의 영화세계(2): 영화적 연극성과 유물론적 영화”) 장병원 평론가는 이렇게 말했다. “극도의 단순성을 가지고 비극적인 결말을 향한 오디세이를 보여주는 <지슬>은 다큐멘터리적인 리얼리즘을 배제하고 시적이고 신화적인 차원으로 제주의 비극을 끌어올리려 한다.” (씨네21 897호, “관성 벗고 실존으로 도약”) 김지미 평론가도 말했다. “희극 안에 비극이, 웃음 안에 아픔이 공존하는 것, 이 점이 영화 <지슬>이 가진 가장 중요한 미덕이다.” (씨네21 897호, “희비극의 미덕”) 이상용 평론가는 독립 영화 <지슬>의 맥락과, 감독의 의도를 진단한 후, 그에 맞추어 결어를 맺었다. “많은 부분을 관객에게 던져주는 <지슬>은 감정의 공유를 통해 사건과 역사의 공유로 나아가기를 희망하는 한국의 새로운 영화이다.” (플랫폼 39호, “역사를 보여주는 법에 관하여”)

 

그러나 여기 두 편의 비평에, 나는 주목하고 싶다. 우혜경 평론가와 허지웅 평론가의 논평이다. (이후 존칭 생략) (우혜경 : 씨네21 899호 <영화탐독> “영화는 사진집이 아니다.”) (허지웅 : 월간방송작가 “지슬: 귀신이 온다” 및 경향신문 <허지웅의 영화로 세상읽기> “서로에게 상처주는 ‘정의로운 폭력’”) 생각건대, 두 비평은 어떤 대극에 서있다. 두 평자는 동일한 테두리 안에서 영화를 살피는 듯 보인다. 찬찬히 뜯어보면, 실은 갈래를 나누어 판가름 지음을 알 수 있다. 갈래가 나뉜 다는 말은, 두 가지를 뜻한다. 그 들은 <지슬>에 관한 영화적 판단에 있어 맞은편에 서있다. 단, 우혜경은 영화의 영토에서 시작해, 영화의 영토 안에서 끝을 맺지만, 허지웅은 영화적 판단의 끈을 공론의 영역에 잇대고 있다. <지슬>은 신령하고 진심어린 ‘제의’다. 나는 뭍 평론가들의 의견에 동의한다. 말하고 싶은 건, 반대의 의미에서 여기엔 어떤 당착이 숨어있지 않냐는 거다. 두 편의 평론은 그를 드러내는데 알맞은 길잡이가 될 터이다.

 

이미지의 배열에 숨은 반제의적 당착

 

우혜경은 뭇 평자들과 완전히 의견을 달리한다. 아마 <지슬>을 향해 제출 된, 유일한 비판 일게다. 그래서 흥미로운 면모를 지닌다.

“그러나 그 이야기들이 영화적으로 아무것도 해결되지 않았다는 점은 나를 이 영화 앞에 멈추어 서게 만들었다. 이 영화는 무언가 제대로 진행되지 않고 있다 … 이렇듯 영화에서 숏이 이미지화 될 때, 숏은 힘을 잃고 영화는 작동을 멈춘다 … 만약 이러한 숏이 한 장의 흑백 스틸 사진이라면 아름다울 수 있었겠지만 영화는 사진집이 아니다 … 이야기와는 동떨어진 ‘이미지 숏’들이 마치 영화가 불러낸 귀신처럼 영화 속을 떠돌 때, <지슬>은 영화로서 작동하기를 스스로 포기한 것처럼 보인다.”

영화는 이미지의 나열이 아닌, 영화적인 논리로 구동되어야 한다는 요지다. 평문의 제목이 모든 것을 말해주고 있다. “영화는 사진집이 아니다”. 예리하고 일리 있는 지적이다. <지슬>의 이미지들은 제대로 얽혀있지 않다. 나 역시 그리 느꼈다. 이미지와 서사의 총체를 따졌을 때, <지슬>은 산만하고 비유기적인 영화다. 그의 의견 위에 서술을 덧붙여 보자.

말하자면 숏의 문제. <지슬>의 숏은 제대로 매치되지 않는다. 사건과 인물을 매개하는 숏의 거리가 멀고 듬성하다. 몇몇 장면에선 숏과 숏의 충돌이 고장 난 상태다. <지슬>의 서사에는 어떤 결정적인 장면들이 있다. 그 중 하나. 마을에 남은 할머니가 지슬(감자)을 부둥키며 죽음(살해)을 맞는다. 이 장면은 이 후, 아들의 통곡 장면으로 가기 위한 중간단계다. 그 선행단계가 도입 시퀀스에서 (‘신위’ 이전의) 노모를 남겨 둔 채, 아들 내외가 피신하는 장면이다. 선행단계와 중간단계는 러닝타임 상으로나 구성상으로나 굉장히 멀찍하다. 그 공백 동안 노모-아들에 대한 서술이 누락돼 있다. 최종 단계인 통곡 장면은 노모가 숨진 방안이 아닌, 야외의 폐허로 단절-연결된다. 토속적이고 고대적인 재단을 연상케 하는 미장센은 두드러지게 웅혼하고 연극적이지만, 그래서 중간단계의 평이한 뉘앙스와 접착되지 않는다.

 

클라이맥스 동굴토벌 장면 역시 하나의 증좌다. 매캐한 연막 속에서 토벌이 완료된 직후, 재차 토벌이 개시된다. 주민들이 앞 다퉈 동굴을 빠져 나가고, 어느 아낙이 홀로 남겨질 땐, 이들이 조를 나누어 두 개의 동굴에 피신해있던 것인가, 어리둥절해진다. 이는 ‘연막에 갇혀 울고 있는 귀신들 - 성스럽게 제단에 누운 영령(동굴에 남겨진 아낙)’의 이미지를 배치하기 위해, 숏의 논리를 희생한 결과다.

 

이런 장면들을 몇 가지 더 제시할 수 있다. <지슬>은 눈부신 이미지의 얼개로 엮여있지만, 그 매듭이 헐거운 영화다. 이미지를 위해 존재하는 듯한 이미지들이 도처를 배회하고 있다. 우혜경의 지적대로, <지슬>은 관람 후, 순차적으로 복기하기가 매우 힘든 영화다. 한 눈에 파악되지도, 잔존되지도 않기 때문이다. 이런 관점에서, <지슬>은 아름답지만, 충분히 영화적이진 않다. 이를 ‘매치되지 않는 숏’(unmatched shot)을 이용한 ‘거리두기’의 문제로 사유할 수도 있다. 제의적인 정서의 조성과 관객의 환기를 위해서 말이다. 어느 쪽을 택하더라도, 나는 비관적이다. 그러한 관점을 인정할 때, 진정한 균열이 발발하기 때문이다. 이미지-제의를 가로막는 당착의 발생.

여기엔 우혜경이 미처 증명하지 않은 구석이 있다. 문제는 단지 이미지의 '나열'에 있지 않다. ‘과잉’과 ‘재현’이 결부돼 있다. 미학적인 동시에, 윤리적이고 나아가선 정치적인 쟁점. 나는 <지슬>을 보며 두 번 멈춰 섰다. 하나는 진압군 간부들이 순덕을 범하는 장면. 하나는 고중사가 마을에 남은 할머니를 살해하는 장면.

우선 순덕의 장면을 살펴보자. 우혜경 평론가는 순덕의 나신과 제주의 대지가 오버랩 되는 이유를 알 수가 없다고 말한다. (“아무리 생각해도 나는 여전히 순덕을 흠모하는 마을 청년이 그녀의 죽음을 비통해하며 내달리는 언덕이 왜 순덕의 벗은 몸이 되어야 하는지 잘 모르겠다.”) 거칠게 정리하면, 은유와 상징에 치우쳐 숏의 근거가 부재하다는 말씀일 터. 허나 이전의 성폭력 장면에서 순덕의 나신이 제시되었다. 요식적이나마 오버랩의 근거는 마련돼 있는 셈이다.

요는 그 '근거'에 있다. 이 오버랩은 두 가지 문제를 안고 있다. 순덕의 젖무덤-제주의 대지, 이 상징은 너무나 도식적이고 직접적이다. 제주의 모성을 표현하기 위해, 이미지 하나로 충분했다 여긴다면, 다소 안이한 판단이다. 다른 하나가 ‘과잉’과 ‘재현’의 결합이다.
 

말하였듯, <지슬>의 숏 사이엔 빈 공간이 있다. 그를 메우기 위해 동원 되는 게 ‘사운드’의 과잉이다. <지슬>은 종종 장중하고 비장한 현악을 숏의 공백에 집어넣는다. 숏과 숏만으로 연결되지 않는 정서를 사운드로 봉합하는 것이다. 예컨대 오프닝 시퀀스를 보라. 김상사가 민가의 문을 연다. 학살자들은 널 부러진 시체를 무심히 배경삼아, 과일을 깎아 먹는다. 다음 숏으로, 바람에 흔들리는 헐벗은 나뭇가지가 할당된다. 이 두 숏은 엄밀한 화학작용을 일으키기엔 다소 부족하다. 이 때, 게걸스레 과즙을 씹어 삼키는 소리가 화면의 바깥에서 아이러니의 내포를 조력한다.

 

영화를 눈여겨 본 이들이라면 알 수 있다. 이렇게 말해서 송구하지만, 순덕이 능욕 당하는 장면의 뉘앙스는 어딘가 외설적이다. 먼저 순덕의 젖가슴이 제시되고, 고중사의 나이프가 그 위를 은밀하고 위험하게, 훑어간다. (유린당하는 제주의 대지) 화면이 전환 되며, 역시 프레임 바깥에서 ‘소리’가 들려온다. 이 때, 순덕이 내는 신음소리는 굉장히 미묘하다. 그녀는 거세게 저항하거나 울부짖지 않는다. 나직하게 비집고 나오는 엷고 성마른 비성. 나는 얼마간 놀랐고 또 의아했다. 여기서 작가의 선의를 의심할 순 없다. (무엇보다, 오멸 감독 자신이 제주 출신이지 않은가)

내가 묻는 건 의도가 아닌 결과다. 이는 결국 재현의 균질함의 문제다. 미학적인 균열로 이어진다. <지슬>은 초혼극이다. 말 그대로 귀신들을 불러내 재현을 부탁하는 영화다. 다름 아닌 오멸 감독의 코멘트. 왜 다른 망자들과 달리 순덕에겐 그 정중함을 충분히 배려치 못했을까. 추정하자면, 작가적 지향의 고수를 위해서다. 많은 이들이 평가하듯, <지슬>은 호소하고 선동하는 영화가 아니다. 애잔하고 섬뜩한 한편, 담담하고 투명하다. 오멸 감독은 ‘정서’의 과잉을 원치 않았다. 순덕이 처절하게 반항하고 발버둥 쳤다면 그 옅은 농도는 흐려질 터이다. 만약, 특정한 이미지와 정서적 균일함의 구현을 위해 발생한 사태라면, 제사상의 홍동백서를 지키지 않은 것과 같다. 두 가지로 당착적인 연출이다. 모성의 부각을 위해, 여성을 희생했다는 점. 지엽적인 비전의 관철을 위해, 최종적인 비전을 배반한다는 점에서도 그러하다.

관조의 서사에 깃든 정치적 난맥

<지슬>을 보다 두 번 멈춰섰다, 앞서 이렇게 일러두었다. 그 나머지 하나. 고중사가 마을에 남은 할머니를 살해하는 장면. 여기서 나는, 우혜경과 이별하고 허지웅과 만난다. 허지웅 평론가는 전적으로 <지슬>을 지지하고 있다. 그의 판단은 영화 안 편을 거쳐 바깥에 도착하고 있다.

“나는 최근 미학적인 차원의 매력이나 이야기를 구성하는 방식의 미감, 연기의 균질함을 통제하는 지도의 문제에 있어서 <지슬>만큼 도전적이고 독창적이며 완전히 제어된 영화를 본 적이 없다. <지슬>은 지금 이 시점에 극장을 찾아 스크린으로 볼 수 있는, 가장 아름다운 영화다.” (월간방송작가 “지슬: 귀신이 온다”)

이는 영화의 영토 안에 근거한 평가다. 나의 의견과는 궤를 달리하지만, 이런 평가에도 나름의 이유가 있다고 수긍한다. “연기의 균질함” “미학적인 차원의 매력” 이라는 언급은, 대체로 혹은 부분적으로 존중할 수 있는 얘기다.

 

“…단지 어떤 소재를 다루었다는 이유만으로 만듦새에 관한 평가는 유보되고, 관객이든 언론이든 평단이든 그 영화에 대해 발언하는 것으로 시대와 사회에 동참하고 있다고 자족하는 판타지가 존재하는 것을 부정할 수 없다. …“가슴이 먹먹합니다” “잊지 맙시다” “기억합시다”와 같은 피드백이 뒤따른다 … <지슬>의 사례는 진영의 테두리 안에서 ‘정의로운 폭력’을 서로에게 행사하는 일이 결국 사안의 본질과는 아무런 관계없이 이루어지는 증오의 강강수월래 같은 것이라는 사실을 드러낸다.“ (경향신문, <허지웅의 영화로 세상읽기>, “서로에게 상처주는 ‘정의로운 폭력’”)

 

중요하고 적실한 지적이다. 정치 영화를 소비하는 영화 밖의 현실에 관한 진단이다. 작년 한 해, 충무로는 집회의 거리를 방불케 했다. <두 개의 문> <mb의 추억> <남영동 1985> <26년>. 숱한 영화들이 정치를 말하며 역사와 사회를 고발했다. 분명 소재주의적 함몰이 존재했다. 영화가 아닌 소재에 방점을 찍으며 호의를 건네거나, 비록 영화를 말하더라도 면밀한 평가가 누락되는 아쉬움이 있었다. 개별 영화들 역시, 투철한 목적의식과 진영적 실천에 복무한 감이 없지 않다. 정확히 이런 흐름 안에서, <지슬>은 그 태도와 호흡이 변별되는 영화다. 여기엔 파토스와 원한의 서사가 부재하다. <지슬>은 작가의 감정 안에 관객을 가두지 않는다. 관객에게 많은 부분을 선택케 하는 영화다.

숏의 거리는 소유권의 문제다. 숏의 초점이 가까울수록, 감독에게 소유권이 넘어간다. 반대의 경우, 관객에게 판단의 소유권이 넘어간다. 그렇기에 클로즈업과 익스트림 클로즈업은 주관적 숏인 동시에 상징적 숏이다. 이 경우, 해석의 경로가 확정된다. 대개 미디엄 롱 숏 이상 일 경우, 숏의 의미가 개방된다. 피사체가 멀어지고 구도가 확장될 때, 숏은 투명해진다. 관객은 중립의 위치에서 재현된 '현실'을 인식한다.

이미 앞서 제출한 비평에서 언급했듯, <지슬>에는 '적당한' 거리가 없다. 간혹 인물의 얼굴을 따고 들어가며 방점을 찍지만, 대부분 멀찍이 떨어져 롱테이크로 매개한다. 오멸 감독의 말에서도 알 수 있듯, 필름에서 정념과 주관을 건조시켜, 제의의 통로를 넓혀두기 위함이다. (“사람들이 강렬한 이야기를 원한다고 느꼈다. 그런데 이 영화가 선동하는 작업이 되길 원하는 분들은 4.3을 역사적으로 인식하고 있는, 역사에 분노를 느끼는 분들일 거다. 나는 그렇지 않은 분들한테 말을 건네야 한다고 생각했다.)

나는 이런 태도가, 정치영화의 현재적 지형 안에서 의미를 가진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다음과 같은 입장에는 유보적이다.

“이 영화는 그 모든 군상들이 균질한 흑백의 이미지 안에서 결국 동류일 수밖에 없음을 조용히 드러낸다. … <지슬>은 공동체의 과거를 돌아보며 그에 소속된 개인이 사유할 수 있는 가장 강력한 연민과 객관성을 동시에 실험하는 영화다. 이 영화를 모두에게 추천한다. 과거를 돌아보고 미래를 염려하는 삶의 비전은 칼라필름이 아닌 흑백필름과 같아야 한다.” (월간방송작가, “지슬: 귀신이 온다.”)

나는 <지슬>이 영령들에게 말을 붙이고, 위령하는 몫을 가진 영화라 동의한다. 가해의 진영에 초점을 맞추었을 땐, 어떠할까?

여기에 “선과 악”의 단순화는 발생하지 않을지 모른다. 그러나 가해와 피해는 손쉽게 분리되고 있다. 권력의 폭력을 사유하는 정치 영화의 유효한 전략은 위계의 설정이다. 예컨대 <남영동 1985>는 고문의 집행자들에게 저마다 층위를 설정한다. 범상하지만 제 각각의 면모를 지닌 하수인들에서 시작해, 아무런 폭력을 구사하지 않고, 암묵적으로 지시하는 서장이 있다. 용산 참사를 다룬 <두 개의 문>은 진압 특공대의 시선을 경유해, 현장에 부재하는 범죄의 진범을 암시한다. 가해자들이 담지한 폭력의 위계를 따라, 권력을 추적하는 사다리가 설치되는 것이다. 위계의 바닥에 선 가해자들은 ‘폭력’에 ‘가담’해 있지만, ‘권력’이 아닌 자들이다. 여기엔 권력의 ‘지시’와 더불어 악의 입체성, ‘악의 평범성’을 드러내는 효과가 있다.

<지슬>은 위계의 설정을 단순하게 (혹은 잘못) 디자인하고 있다. <지슬>에서 위계의 말단은 박일병과 김이병이다. 이들은 위계적 진영에 소속돼 있지만, 시종일관 ‘폭력’에의 동참, 범죄의 공모를 거부한다. ‘빨갱이 폭도’들에게 총을 쏘는 것을 마지막까지 거부하여 배식을 금지당하고 얼차려에 처해진다. 사실상 폭력의 진영에 속하는 이들이 아니다. 일찌감치 그 폭력의 피해자로 숨지거나 (박일병) 주민들의 진영에 투신하는 이들이다. (김이병) 그러므로, 진압군 진영은 백상병을 기점으로 단선화 된 가해자로 호명된다. 덩어리처럼 엉겨 붙은 가해의 위계 속에 권력의 ‘라벨’을 부여받은 이는 약쟁이 광인, 김상사다.

 

<지슬>이 결과적으로 노정하는 건, 악의 '불가해성'이다. 시시각각 정신줄을 잡았다 놓치며 미쳐가는 살귀를 어떻게 이해할 수 있는가. 흑과 백이 정말로 동류라면, '동류'라는 ‘현상’에 그쳐선 안 된다. 이는 그저 작위성과 전형성의 발로다. 왜? 라는 질문. 왜 그들이 동류라는 것인가. 그 들이 다르지 않다는 설득. 이에 대한 근거를 영화 외부의 반대 사례에 의지해선 안 된다. 영화 내에는 이 질문의 절차가 부재하다. 그렇다면, 설령 주민과 진압군이 동류라고 한들, 내적인 의미를 부여할 수가 없다.

고중사가 마을에 남은 할머니를 살해하는 장면을 보자. 첫 번째 숏. 고중사가 피 묻은 식칼을 주섬 거린다. 숏 전환. 할머니가 말한다. "자네 몇 살인가. 우리 아들도 자네만한 나인데" "우리 어머니는 빨갱이한테 돌아가셨으요." "우리 아들 잘 지내나 모르겠네" "얘들아, 할머니 방에 불 좀 넣어드려라." 다시 숏 전환. 창상을 입은 노구의 복부가 확인된다. 할머니는 지슬(감자)를 부둥키며 쓰러진다. 장면은 끝난다. 이 신에 대해선 짧게 정리할 수 있다. 상투적이고 작위적이다. 나는 이것이 선과 악의 피상적이고 강제적인 화해라고 느껴진다. 그만큼 부당하고 위험하다고 생각한다.

영화는 정치를, 우리는 지슬을, 어떻게 사유해야 할까

 

나는 서두에서 이렇게 말했다. “여기엔 반대의 의미에서 당착이 숨어있다.” 우리는 우혜경의 비평을 나침반 삼아, 영화의 제의성에 잠복한 반-제의적 당착을 확인하였다. 허지웅의 비평을 통로삼아, 반-원한의 서사 이면의 약점을 확인하였다. 한 가지 더 첨언을 하고 싶다. 비극을 관조하는 <지슬>의 태도는 고유의 미덕으로 인정할 수 있다. 특히나, 파토스와 프로파간다에 필름이 절임 된 현 지형 속에선 말이다. 파토스와 원한의 소거는 <지슬> 전반을 장악하는 일종의 구조화된 정서다. 그러나, 그 일관된 지향으로 인해, 적절하고 효과적으로 재현되지 못한 장면들이 있다. 순덕의 고초와 할머니의 죽음. 역사의 개별적이고 미시적인 사건은 미지의 영역이다. 재량과 상상이 요구되는 국면에서 비극은 공정하게 재현되어야 한다. 그 공정함은 피해와 가해의 등가성을 전제한 기계적 형량은 아닐 터이다. 참상과 고통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는 편이 공정할 수도 있다. 그러므로 역사와 정치를 모색하는 영화의 지향은 상황에 따라, 입체적으로 구성되어야 한다.

<지슬>은 작가적 지향이 뚜렷한 영화다. 일찍이 역사를 이러한 방식으로 사유한 영화는 없었다. 거리두기와 아이러니에 의거, 지역적이고 제의적인 정서를 자아내는 점에서도, <지슬>은 독특하고 새로운 영화다. 일렀듯이, 그 간 많은 비평들이 제출되었다. <지슬>의 미덕과 장점은 충분히 발견되고 회자되었을 터이다. 나의 의문은 그러한 분석들이 아직 거쳐 가지 않은 구석에 있었다. 영화를 재삼 관람하는 동안 끝내 해소되지 않은 고민들. 이 평문이 삼면의 각도에서 효력을 발휘하길 원한다. 그간 제출 된 많은 평론들과 함께 읽히며, 보론의 역할을 하길 바란다. 그리하여, 관객들에게 영화-정치의 미세한 입자들을 관찰케 하는 현미경이 되길 바란다. 마지막으로, 오멸 감독에게 적으나마 쓸모가 있는 되먹임이기를 바란다. (그가 이 평론을 본다는 전제 하에) 논의의 디딤돌이 되어 준 두 평자의 비평에 감사드리며, 다시금 존중을 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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