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에는 숱한 종류의 중독이 있다. 도박 중독, 술 중독, 마약 중독, 니코틴 중독, 게임 중독 등 돈과 건강, 시간을 갉아먹는 다양한 종류의 중독은 지금 이 시간에도 먹잇감이 될 사람을 끊임없이 물색하고 있다. <셰임>은 영화배우 데이비드 듀코브니를 괴롭히던 ‘섹스 중독’에 빠진 어느 남자의 이야기를 그린다.

주인공 설리반(마이클 패스벤더 분)은 ‘앉으나 서나 당신 생각’이 아니라 앉으나 서나 온통 섹스 생각뿐이다. 회사 화장실과 집안 샤워실은 생리를 위한 공간이 아니라 자위를 위한 공간이 되고, 설리반의 회사 컴퓨터가 바이러스에 감염되어 하드를 복구하고 보니 온통 음란 동영상 투성이다. 개인 노트북은 음란채팅의 도구가 된 지 오래이고, 집안 곳곳에는 음란 동영상과 도색잡지가 숨바꼭질하고 있다.

되는 놈은 뭘 해도 된다고, 술집에서 여자를 꼬시기 위해 온갖 애를 쓰는 직장상사는 헛돈만 쓰는 반면, 설리반에게는 상사가 작업하던 여자가 얼씨구나 하고 제 발로 달려든다. 음란물의 바다에 휩싸여 자위행위를 하지 않으면 여자와 배를 겹치기 일쑤고, 여자를 꼬시지 않는 날에는 콜걸을 불러대니 설리반의 주위는 온통 여자와 떡을 치는 ‘떡방앗간’이 되고 만다.

그런데 여기서 특이한 점이 하나 발견된다. 설리반이 잘 수 있는 여자는 즉석에서 만나는 여자라는 공통점을 갖는다. 돈을 주고 화대를 지불하는 콜걸이나, 아니면 원 나잇 스탠드용 여자와만 관계를 갖는다. 그렇다면 사랑하는 여자와는 관계를 하지 않는가?

설리반의 문제는 사랑하는 여자 혹은 교제를 바라는 여자와는 잠을 자지 않는다는 점이다. 아니 못 잔다고 표현하는 것이 더욱 적절한 표현일 것이다. 일회적인 만남에서 멀어지고자 설리반은 사내 연애를 감행한다. 점 찍어둔 사내 직원 마리안과 진지한 연애를 바라고 그녀와의 잠자리를 시도하지만 이상하게도 콜걸과 누울 때와는 달리 마리안과는 한 침대에 누울 수 없다.

하룻밤을 같이할 여자와는 소통이 필요 없다. 다시 볼 일 없이 그저 하룻밤만 즐기면 되고 다음날까지 인연을 이을 이유가 없기에 소통은 필요하지 않다. 하지만 사랑하는 여자와는 소통이 반드시 필요하다. 서로의 감정과 생각을 나누고 교감하는 가운데서 상대에 대한 이해의 폭을 넓힐 수 있기 때문이다.

설리반은 소통이 필요한 여자와는 잠자리를 하지 못하는 딜레마를 겪는다. 여동생과도 긴밀한 소통이 필요하지만 여동생과의 소통 역시 원활하지 못하다. 반대로 소통이 필요 없는 여자에게는 육체가 알아서 반응한다. 직장 동료 마리안과의 정사가 실패로 끝난 후에 설리반은 언제 그랬냐는 듯 콜걸들과 뜨거운 사랑을 나눈다.

설리반은 육체의 쾌락은 알았지만 육체의 ‘소통’은 모르는 남자일 테다. 아니, 여동생과의 소통에도 그저 서툴기만 하니 정신적인 소통 또한 서툰 남자일지도 모른다. 소통을 나누어야 할 사랑하는 여자와는 잠을 자지 못하는 이 남자, 소통이 필요한 상대에게는 정작 몸이 반응하지 않는 설리반의 비극은 그 옛날 금만 탐닉하다가 딸까지 잃고 마는 비운의 왕 마이더스와 유사하지 않는가.

색골이 다가 아니다. 설리반이 나누는 소통 없는 하룻밤은 영혼의 바닷물을 계속하여 들이키는 행위와 다름없다. 설리반의 끊임없는 색정의 탐닉은, 소통을 간절히 필요로 하는 몸의 왜곡된 반응으로 해석할 수 있을 것이다.

늘 이성과 감성의 공존을 꿈꾸고자 혹은 디오니시즘을 바라며 우뇌의 쿠데타를 꿈꾸지만 항상 좌뇌에 진압당하는 아폴로니즘의 역설을 겪는 비평가. http://blog.daum.net/js7kei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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