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어야 사는 여자>라는 영화 제목 말마따나 ‘때려야, 맞아야 사는 남자’가 있다. 그의 이름은 알리. 야간경비원으로도 먹고 살 수 있지만 알리가 삶에서 희열을 느끼는 건 직장이 아닌, 주먹과 주먹이 교환하는 격투의 세계에서다.

하지만 돈을 위해 싸우는 남자가 아니다. 얻어맞으며 버는 피값 치고는 별 볼 일 없는 500유로라는 초라한 금액 밖에 받지 못하는 삼류 격투가이지만 알리는 격투의 세계를 통해서야 자신이 살아있음을 증명할 수 있는 남자다.

알리과 인연을 맺게 될 돌고래 조련사 스테파니는 스스로가 남자의 시선을 끄는 ‘대상a’가 될 때 그녀가 이 세상에 존재하는 이유를 각성하게 된다. 알리가 자신의 존재 가치를 격투에서 찾듯, 스테파니는 자신의 존재 가치를 ‘대상a’가 될 때에야 자신이 생존하는 이유를 찾는다. 남자는 격투라는 남자들의 폭력적인 세계관 속에서, 그리고 여자는 자신이 남자의 욕망의 대상이 되기를 주저하지 않을 때에야 세상에 존재하는 이유를 깨닫는다.

<러스트 앤 본>은 이런 알리와 스테파니가 어떻게 서로를 향한 감정에 다가서는가를 관찰 하게 만드는 영화이면서 동시에 ‘상실’에 관해서도 헤아릴 수 있는 영화다. <안티크라이스트>에서 남자와 여자가 샤워를 하며 나누는 정사는 분명 생명을 태동하기 위한 유전자의 명령을 충실하게 이행하는 부부의 사랑 행위다.

하지만 영화는 생명의 태동을 전제로 하는 남녀의 잠자리라는 전통적인 의미를 전복한다. 사랑을 나누는 동안에 그와 그녀의 아이가 창밖으로 떨어져 세상과 이별한다는 건, 영화 초반부에서는 섹스가 생명의 태동이 아니라 반대로 죽음을 불러들이는 모티브로 작용한다.

섹스가 죽음의 전령사로 돌변하는 <안티크라이스트>처럼 <러스트 앤 본> 가운데서 물은 ‘상실’의 의미를 갖는다. 그토록 생기발랄한 스테파니가 한 순간에 불구가 되는 건 그녀의 직업 때문이다. 범고래가 들이닥칠 때 스테파니의 두 다리는 범고래의 일용한 양식으로 변하고 만다. 만일 스테파니가 물과 관련된 범고래 조련사라는 직업을 갖지만 않았어도 범고래 때문에 두 다리를 잃는 불상사는 겪지 않았을 것이다.

물은 스테파니에게만 상실을 가져다주지 않는다. 알리의 어린 아들 역시 물 때문에 봉변을 당할 뻔 한다. 스테파니와 알리의 아들 두 사람은 물로 말미암아 생명을 상실할 위기에 직면한다.

하지만 물은 상실의 의미 하나만을 가져다주지는 않는다. 상실의 의미 외에도 ‘인연’을 의미하는 매개물로 작용한다. 만일 스테파니가 범고래 쇼에서 두 다리를 잃지 않았다면 알리와의 만남은 단발성에 머물렀을 것이 분명하다. 알리의 아들이 물로 말미암아 곤경을 당하지 않았더라면 알리와 스테파니를 이어주는 인연의 끈은 더 이상 이어지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물은 생명을 앗아갈 뻔하는 생명 박탈자, 상실의 이미지로 나타나지만 종국에는 상실을 가장한 인연의 끈으로 서로가 서로를 맞닿게 만드는 힘으로 작용하는 이중적인 의미를 가진다. 생명을 박탈하는 듯한 위태로움 가운데서 인연이 발생토록 만드는 물의 이러한 양가적 의미로 바라보더라도 흥미로운 영화가 <러스트 앤 본>이다.

늘 이성과 감성의 공존을 꿈꾸고자 혹은 디오니시즘을 바라며 우뇌의 쿠데타를 꿈꾸지만 항상 좌뇌에 진압당하는 아폴로니즘의 역설을 겪는 비평가. http://blog.daum.net/js7kei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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