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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계도 나오기 전에 터파기 시작한 최시중씨[기고] 심석태 전국언론노조 SBS 본부장
심석태 전국언론노조 SBS 본부장 | 승인 2008.06.23 00:58

요즘 마음 급한 사람이 많은 모양이다. 이명박 대통령의 지난주 대국민 사과 가운데 눈에 띄는 구절 하나는 “마음이 너무 급했다”는 고백이었다. 당사자만 몰랐지 국민들은 모두 알고 있던 일이다. 그 시끌벅적했던 인수위 시절을 기억해보라. ‘영어몰입 교육 대소동’을 비롯해 인수위가 나라를 몇 번은 들었다 놓았던 것처럼 비춰진 건 결국 이명박 대통령 자신의 조급함 때문이었다. 지난 정부의 장차관과 고위 관료들을 불러다놓고 호통을 치고 훈계를 할 때만 해도 기분이야 좋았겠지만…. 어쨌든 이 대통령은 스스로의 조급함을 인정했다. 청와대 핵심 참모들이 대거 바뀌었고 총리 이하 장관들도 일괄 사의를 표명한 상태이다. 국민 상당수와 야권은 아직 이 정도로는 성에 차지 않는다는 반응이지만.

그런데 이런 반성과 변화의 시늉조차 하지 않는 곳이 있다. 총리 이하 모든 장관들이 사의를 밝혔는데도 꿈쩍도 않고 버티고 있는 최시중 씨가 위원장으로 있는 방송통신위원회이다. 이명박 대통령과 최 씨가 YTN을 비롯한 여러 방송과 언론 유관 기관에 대선 기간 동안 이명박 캠프의 방송, 언론 특보단을 사장으로 내려보내고 있는 것은 누구나 다 아는 사실이다. 그런데 권력을 동원한 방송 장악만큼 여론의 주목을 받지 못하고 있는 것이 있다. 바로 대자본에게 보도 기능을 안겨주는 등 방송 구조를 통째로 뒤흔들 수 있는 IPTV법 시행령 제정과 방송법 시행령 개정 작업이 그것이다.

   
  ▲ 광우병 국민대책회의와 민주언론시민연합은 지난 21일 오후 3시 방송통신위원회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최시중 방통위원장의 사퇴를 촉구했다. ⓒ서정은  
 
사실 우리 방송법제는 누더기다. 방송개혁위원회를 거치며 한 차례 종합 정비를 받기는 했지만 여전히 온갖 이해관계가 정치적으로 얽히고설켜 원칙과 일관성이 통하지 않기 때문이다. 정권 교체기에 만들어진 IPTV법은 더 말할 것도 없다. 이런 상태에서 방송통신 융합이라는 큰 파도가 몰려왔으니 어지간한 전문가들도 뭘 어떻게 하는 것이 정말 국민을 위한 것인지 잘 판단하기 어렵게 됐다. 그렇다면 전체 판을 잘 따져보고, 방송통신 제도 전반에 걸쳐 뭘 어떻게 해야 국민들에게 이익이 되는 것인지 공론화하는 작업이 먼저다.

그런데 방통위는 전혀 다른 길을 가기로 작정을 한 것임에 틀림없다. 특보단으로 구성된 낙하산 부대를 방송 및 언론 유관기관에 투하하는 한편으로 아무런 공론화 과정도 없이 대기업과 조중동에 보도 기능을 선물하려는 작업을 착착 진행하고 있기 때문이다. 방통위는 보도전문과 종합편성 PP(채널사용사업자)에 대한 대기업 소유 제한을 10조원으로 정하는 IPTV법 시행령을 제정하려 하고 있다. 기존 방송법 시행령상의 기준 3조원과 비교해보면 얼마나 큰 변화인지 알 수 있다. 거꾸로 IPTV법 시행령안을 기준으로 방송법 시행령상의 기준도 10조원으로 올리려 한다. 일각에서는 이보다 더 기준을 완화하려는 시도도 포착되고 있다. 방송-콘텐츠 산업 육성과 여론 다양성 보장이라는 황당한 논리를 들고 있는 것도 가관이다.

대기업 기준이 10조원으로 올라가면 현대, 대림, GM대우, 한진중공업, 현대백화점 등은 물론 신세계, CJ 등도 약간의 자산만 정리하면 보도전문이나 종합편성 PP를 소유할 수 있게 된다. 보도전문과 종합편성PP가 일반 PP와 다른 점은 보도 기능을 갖고 있다는 것뿐이다. 그리고 일반 PP에는 대기업의 소유 제한이 없다. 결국 방통위가 하려는 것은 지금도 광고 등을 통해 언론에 막강한 사실상의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는 대기업들이 직접 보도 기능을 갖도록 하겠다는 것이다. 대기업이 직접 보도 기능을 갖도록 하겠다는 것, 그것이 이명박 정부와 최시중 씨가 생각하는 여론 다양성인 셈이다. 우리는 이미 삼성과 현대가 갖고 있던 신문들을 통해 대자본이 보도 기능을 갖는 것이 어떤 문제가 있는지 충분히 경험한 바 있다. 신문에서도 퇴출된 대자본의 보도 기능을 그보다 훨씬 높은 공공성, 공익성이 요구되는 방송에서 갖도록 하겠다고? 한마디로 퇴행적이다.

국제적인 콘텐츠 경쟁력 얘기는 또 뭔가. 우리나라에서 제작되는 보도 프로그램이 국제적인 경쟁력을 가지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이미 언급했듯이 대기업들은 일반 PP들에 이미 진출해 있고 사실상 드라마나 다큐멘터리나 오락 프로그램이나 뭐든 만들 수 있다. 지상파 방송에 비해 훨씬 행정적 규제도 적게 받고 있다. 국제적인 콘텐츠 경쟁력을 가지려면 그야말로 콘텐츠 산업에 사명감을 갖고 더 연구하고 투자하면 될 일이다. 보도 기능이 없어서 국제적 콘텐츠 경쟁력을 키우지 못한다?

   
  ▲ 지난 20일 서울 광화문 방송통신위원회앞에서 열린 언론노조의 '최시중 방통위원장 퇴진 농성돌입' 기자회견 ⓒ 정영은  
 
사실 하나 하나 들여다보면 말도 안 되는 방통위의 주장을 여러 흐름과 연결해 보면 비로소 그림이 조금 보인다. 이러한 대기업 기준 완화와 신문-방송 겸영 허용 문제, MBC와 KBS 2TV 등 공영방송 민영화 문제 등을 함께 놓고 보자. 결론은 노골적으로 방송 진출 욕심을 드러내고 있는 조중동 족벌 신문이 방송에서 보도 기능까지 가지려는 대자본과 결합할 경우 방송 체제 전반이 바뀌게 된다는 것이다. 공영 중심으로 돼 있는 전반적인 우리 방송의 틀이 자본과 조중동 중심으로 재편될 가능성이 크다는 것이다. 장기적으로 우리 방송을 꼭 다공영 1민영으로 가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논의가 있어야겠지만 지금 이 정부 하에서 소리 없이 진행되고 있는 방송 구조의 일방적인 변화 시도는 결코 국민들의 동의를 받아내지 못할 것이다.

이러한 방송 구조의 근본적인 변화는 장기간의 공론화 과정을 거쳐 국민적 합의에 근거해야 한다. 국민여론 형성에 큰 영향을 차지하는 방송 제도의 변화는 이 땅의 민주주의 자체에 큰 영향을 미칠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한나라당이 하려는 것처럼 뻔한 결론 내려놓고 몰아가는 것은 안 된다. 정말 객관적이고 중립적인 인사들에게 방송 구조에 대한 연구와 논의를 맡겨야 한다. 이미 정체가 백일하에 드러난 여권 친위 조직은 이런 논의에 낄 자격이 없다.

이런 근본적 논의 없이 방송 구조를 슬그머니 어떻게 해 보려는 것은 설계도 없이 대형 빌딩을 짓겠다는 것이다. 최시중 씨는 이미 터파기 공사를 시작한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이미 촛불을 통해 원기를 회복한 시민사회가 그대로 놔두지는 않을 것이다. 자칫 고집을 부리다가는 건물은 못 올리고 흉한 웅덩이만 파놓는 결과를 빚을 것이다. 자신이 하는 일의 중대성을 진심으로 이해하고 있다면 최시중 씨는 조급함을 반성하고 새롭게 시작해 보겠다는 대통령의 각오에 누가 되지 않도록, 이번 각료들의 일괄 사의 표명에 맞춰 스스로 물러남이 옳다.

심석태 전국언론노조 SBS 본부장  webmaster@mediau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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