헌법은 평소 그 위상에 걸맞은 관심을 끌지 못한다. 자연계의 공기 같은 존재여서일 것이다. 그러나 사회가 헌법적 안정성과 관련해 어떤 중대한 사태를 맞을 때 헌법은 시정의 거리로 호출된다. 예를 들어 성문헌법의 축자 해석으로 먹고사는 대한민국 헌법재판소가 자살골 넣듯 ‘관습 헌법’을 인정할 때, 세간의 관심은 일제히 헌법으로 쏠리게 된다.

제헌 이후 대한민국 헌법 1조가 요즘처럼 큰 관심을 끈 적이 일찍이 없었다고 한다. 현 시국이 가장 강력한 헌법기관인 대통령과 밀접하게 연관됐음을 방증한다. 촛불집회의 의제가 광우병 쇠고기에서 다른 영역으로 빠르게 확장하고 있는 만큼, 머잖아 관심을 끄는 헌법 조항도 그만큼 많아질지 모른다. 제21조 ①항도 이들 유력 후보 가운데 하나다.

▲ 지난 16일 다음 아고라 누리꾼과 시민들이 KBS 본관 앞에서 '굳세어라 KBS, 민주시민이 지킨다' 등의 구호가 적힌 현수막과 손팻말을 들고 촛불집회를 하고 있다. ⓒ서정은
“모든 국민은 언론·출판의 자유와 집회·결사의 자유를 가진다.”

시국이 시국인 만큼, 이 짧은 문구 안에서 ‘언론의 자유’와 ‘집회의 자유’가 나란히 어깨동무하고 있는 모습을 특별히 눈여겨볼 필요가 있다. 언론의 자유를 구가하는 방송사 앞에서 집회의 자유를 관철하는 행위가 연일 펼쳐지고 있기 때문이다. 이를 테면 언론사 앞 데모는 가장 ‘헌법 제21조 ①항스러운’ 퍼포먼스라고 할 수 있다.

‘표현의 자유’ 범주 안에 드는 두 ‘자유권’이 한 자리에서 경합하는 이런 형국은 낯설지 않다. 여론을 모으고 전파하는 방송사 앞에 여론의 오프라인 직거래장이 서는 건 오히려 자연스럽다. 하지만 방송사 앞에서 전혀 다른 목소리의 집회 2개가 동시에 경합하는 지금의 장면은 낯설다. 그 양상은 헌법 제21조 ①항을 둘러싸고 매우 복잡하게 전개되고 있다.

모든 자유는 경합의 관계에 놓인다. 나의 자유는 타인의 자유 앞에 멈춰서야 한다. 멈춰선 지점 위에서 비로소 자유의 경계는 그어진다. 헌법 21조 자유 조항도 예외가 아니다. 언론의 자유는 다른 언론의 자유를, 집회의 자유는 다른 집회의 자유를, 또 언론의 자유는 집회의 자유를, 집회의 자유도 언론의 자유를 보장할 때 비로소 인정된다.

▲ 고엽제전우회 회원들이 지난 13일 KBS 본사 앞에서 '정연주 사장을 끌어내라'고 외치고 있다. ⓒ곽상아
지금 서울 여의도 방송사 앞 풍경은 어떤가.

“공영방송 사수!” 먼저 한쪽이 촛불을 밝힌다. “선동방송 타도!” 다른 한쪽이 가스통으로 맞선다. 맞설 만하니까 맞섰다고 치자. 집회에서 뭐라 떠들든 그건 자유다. 이 와중에도 방송사는 묵묵히 보도기능을 수행한다. 방송사의 언론의 자유는 “선동방송 타도”의 날선 구호 앞에서도 온전하다. 그렇다고 언론 보도가 촛불이나 가스통 어느 쪽의 집회의 자유를 침해하는 것도 아니다. 침해할 수도 없다.

문제는 구호보다는 집회 행태다. 촛불과 가스통의 집회 행태는 맞섬이 아니라, 심각한 비대칭이다. 가스통 집회는 ‘내용과 형식의 완벽한 조화’라는 감탄이 절로 나오게 한다. 모든 경합자를 타도(때려 넘어뜨림)할 태세다. 반면 촛불은 ‘비폭력-불복종’이라는 간디의 실천방식을 닮아 있다. 그 비대칭 위에서, 언론의 자유는 물론 집회의 자유도 불안하게 흔들리고 있다. 폭력의 자유도 스스로 끝없는 폭력의 우위에 서지 않는 한 자유를 잃게 된다. 싸늘하지만, 그게 자유의 쿨한 원리다.

물론, 어떤 구호는 내용 자체가 자유 억압의 성격을 띨 수 있고, 내용이 실현되면 그 자체가 억압이 될 수도 있다. 그럼 “선동방송 타도”는 어떤가? ‘타도’가 폭력 등 물리적 강제력을 수반하지 않는 수사(修辭), 이를테면 ‘낙후’ 또는 ‘고립’ 정도의 의미라면, 2가지 경우의 수가 있다. 그 방송이 언론 자유의 적이냐, 아니냐로 갈린다. 언론의 자유를 누리는 언론이 언론 자유의 적이 될 수도 있는 역설은 현실에서 얼마든지 존재한다. (2편에서 자세히 살펴보자.)

▲ 지난 13일 오후 6시 MBC 본사에 난입한 보수단체 회원들. ⓒ정은경
지금 방송사 앞에서 명백한 반 언론자유적 구호는 정작 따로 있다. “공영방송 민영화”다. (20일 집회에 실제 등장했다). 민영방송 자체는 가치배제적일 수 있다. 그러나 공영방송 민영화는 사정이 다르다. 사적 이윤만을 좇는 무한 시장경쟁의 현실에서 공익을 존재목적으로 하는 방송은 언론 자유의 허파다. “공영방송 민영화”는 그 허파를 떼어내라는 요구다. 설령 병든 허파라도 없는 것보다는 낫다.

또 하나의 구호는 (화형식과 함께 하는) “○○○ 사장 타도”다. 이 구호 역시 그 호명 대상이 언론 자유의 적이냐 아니냐로 판단이 갈릴 수 있다. 하지만 이조차도 공영방송이 정치권력으로부터 독립이 보장되는 경우로 제한된다. “○○○ 사장 타도”가 “청와대 낙하산 사장 환영”을 배후에 둔 정지작업의 구호라면 (설령 ○○○ 사장이 언론 자유의 적이더라도) 언론의 자유를 억압하는 셈이 된다.

2008년 6월, 여의도 방송사 앞에 헌법 21조의 적이 있지는 않은가? ‘자유’자가 붙는 이름을 유난히 선호하는 어떤 단체들이 자꾸 눈에 밟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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