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공이라는 건 무술 고수, 혹은 전문가만 갖추는 건 아니다. 우리 모두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내공을 갖추고 있는 게 분명하니까. 우리 모두가 가진 내공은 고통에 대한 내공이라고 표현하는 것이 더욱 적절할지 모르겠다.

어린 시절 아팠던 경험은 한두 가지 이상 갖고 있을 것이다. 어린 시절에는 혹은 청춘에는 아파서 죽을 것만 같던 그 고통이 지금 와서 보면 참을 만한 고통이었거나 혹은 아름다운 추억으로 남아 있으니 말이다. 이건 고통에 대한 면역을, 살아가면서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터득한 결과다. 세월이 흐르고 나이가 들어서도 고통에 대한 내공이 생기지 않는다면 아마 우리는 험난한 이 세상의 고통에 휩쓸려 실종되었을 것이 분명하다.

<월플라워>는 누구나 한 번 이상은 겪었을 법한 청춘의 아픔, 정확하게 표현하면 질풍노도의 시기 가운데서 겪어야 했던 성장통에 관한 영화다. 주인공 찰리(로건 레먼 분)는 착실한 범생이지만 사교성이 떨어져 고민인 학생이다. 아마 한국사회에서라면 사교성은 뒤떨어져도 공부 고민은 없으니 행복한 걱정이라 할지도 모를 일이다.

하지만 찰리로선, 공부가 뒤떨어진 학생이 어떡하면 공부를 잘할 수 있을까 하는 고민 이상으로 친구 만들기 프로젝트가 골칫거리다. 오죽하면 학교 졸업까지 걸리는 날짜를 하루하루 셀 정도일까. 친구 하나 없이 투명인간으로 사는 범생이 찰리에게 고등학교는 그저 통과해야할 하나의 관문에 불과하다.

이러던 찰리가 새로운 광명을 찾는다. 친구가 한 명 생기면 친구의 친구를 알게 되어 친구가 꼬리에 꼬리를 물고 늘어나는 것처럼 찰리에게 한 명의 친구가 생기자마자 친구는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난다. 힘든 인간관계여, 이제 그만! 크리스마스 파티와 송년 기념 파티에 참가하지 못해 방바닥을 긁을 필요는 이제 사라진다.

하지만 <월플라워>가 통상적인 청춘 영화의 범주에 머물렀다면 소설 원작이 북미 백만 독자에게 영향을 끼치긴 힘들었을 것이다. <월플라워>는 찰리의 친구 만들기 프로젝트 대성공에 머무르는 층위의 청춘 영화가 아니다.

글의 처음에서 다루었던 고통의 문제로 돌아가 보자. 찰리는 자살한 친구와, 유명을 달리한 이모에 대한 트라우마가 짙게 드리운 청소년이다. 샘(엠마 왓은 분)은 자존감이 부족한 나머지 자신의 모든 걸 사랑해주는 남자보다 그녀의 아름다움에 혹해 어떡하면 침대에 눕힐까를 생각하는 남자들에게 쉽게 몸을 허락한다. 찰리의 맨 처음 친구가 되어준 패트릭 역시 성 정체성에 혼란을 겪는다.

찰리에게만 아픔이 있는 것이 아니다. 찰리의 절친조차도 ‘아프니까 청춘이다’를 외치고 있었다. 보리농사를 망치지 않으려면 겨울에 눈이 많이 내려야 한단다. 패트릭이 십대 시절 이토록 찬란한 아픔을 모른 척하고 보통의 또래처럼 어물어물 십 대를 관통했다면 고통을 견디는 내성이 얼마나 생길 수 있었을까?

아픈 만큼 성숙해진다고, 찬란한 십 대의 아픔을 겪은 이들 세 남녀가 이십 대, 삼십 대라는 인생의 터널을 통과할 때에는 남들보다 유별난 십 대의 통과의례를 거친 덕에 완숙한 인생의 내공을 갖게 되지 않았을까? ‘일찍 맞는 매가 낫다’는 말은 영화 <월플라워>를 두고 하는 말이다.

늘 이성과 감성의 공존을 꿈꾸고자 혹은 디오니시즘을 바라며 우뇌의 쿠데타를 꿈꾸지만 항상 좌뇌에 진압당하는 아폴로니즘의 역설을 겪는 비평가. http://blog.daum.net/js7kei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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