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등학교 2학년, 8살, 1990년의 일이다. 2학기 중순 쯤 전학을 왔는데 여기 친구들은 이전 학교 친구들과는 달리 모두 다 야구를 즐기고 있었다. 그들은 모두 야구를 했고 야구를 보았다. 나는 그 이전엔 프로야구의 존재도 몰랐다. 그들에게 “어느 팀이 야구를 잘하느냐”라고 했더니 ‘우리 팀’이 제일 잘한다고 했다.
대전의 소년들에게 ‘우리 팀’이란 물론 빙그레 이글스를 의미했다. 당시로부터 4년 전인 1986년부터 리그에 참여한 그 팀이 1988년과 1989년 연속으로 한국시리즈에 진출했고 1989년엔 정규시즌 1위를 차지하기도 했으니 “우리 팀이 제일 잘한다”는 말도 아주 빈말은 아니었다.
나는 처음부터 프로야구를 좋아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또래들과 어울리기 위해 야구는 해야만 했다. 물론 테니스공과 나무배트를 썼고, 투수가 ‘아리랑볼’을 던지는 그런 야구였다. 초등학교 4학년 정도부터는 ‘직구’란 걸 던지기도 했다.
나는 직구는커녕 아리랑볼도 잘 치지 못하는 열등한 야구소년이었다. 내가 타석에 들어서면 수비수들은 다섯 걸음 앞으로 전진했다. 야구를 잘 못하니 공을 주우러 다니는 일이 많았다. 그런 내게 친구나 선배들은 “짜샤 열심히 해. 장종훈도 한때는 ‘볼보이’였어!”라고 했다.
“장종훈도 한때는 볼보이였다”. 그것은 대전지역 소년들에겐 하나의 격언과도 같았다. 나는 당시 장종훈이 얼마나 위대한 타자인지, 그의 ‘연습생 신화’가 무엇인지를 제대로 알지 못했다. 그럼에도 스스럼없이 따라하게 되는 것이 그 격언이었다. 1990년대 초반에는 일본만화 번안물이 <4번타자 왕중훈>이란 제목으로 나왔을 정도니 그 당시 장종훈의 위상을 능히 짐작할 수 있다.
▲ 빙그레 이글스 시절의 장종훈 선수. 그는 한때 한국야구를 대표하는 홈런타자였고, 35번은 한화 이글스의 첫번째 영구결번이 되었다.
내가 처음으로 몰입해서 본 야구경기는 1991년의 한국시리즈였을 것이다. 1988년과 1989년에 이어, 해태 타이거즈와 치른 세 번째 한국시리즈였다. 당시 해태 타이거즈야 한창 물오른 ‘해태 왕조’ 시절이었다. TV 방송을 보며 열과 성을 다해 응원했지만 결과는 0승 4패, 가장 잘 한다던 ‘우리 팀’은 한 경기도 이기지 못했고 소년은 눈시울을 붉혔다. 또 9살 소년은 TK 태생 부모들이 ‘우리 팀’의 패배에 심드렁한 걸 보고 그들과 자신이 정체성이 다름을 깨달았다.
아마 그 경기에서 ‘우리 팀’이 우승컵을 들었다면 나는 시즌 경기까지 챙겨보는 야구팬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최초로 몰입한 경기에서 맛본 좌절은 내가 야구에 대해 ‘불가근 불가원’의 자세를 취하게 했다.
지역 야구팬은 야구를 잘 모르고 거의 야구를 보지 않는 것 같으면서도 언제나 신문이나 뉴스를 통해 ‘우리 팀’의 승패와 스코어와 순위를 확인한다. 훗날 나는 2008년 ‘베이징 올림픽 브레이크’ 이후 몰락하는 한화 이글스를 보며 잠깐 야구를 끊었고 2009년과 2010년 내내 류현진의 승수와 탈삼진 숫자, 최진행의 홈런 개수만 뉴스에서 확인했다.
사실 ‘빙그레 이글스의 전성기’는 한화 이글스팬에겐 안타까운 추억이다. 회상할만한 몇 안 되는 시기이지만 결국엔 ‘준우승의 전성기’였기 때문이다. 장종훈에 대한 내 기억 중의 하나는 그가 한국시리즈와 한일슈퍼게임에선 유난히도 부진했다는 것이다.
내가 처음으로 한국시리즈에 몰입했던 이듬해인 1992년 정규시즌 1위를 또 한번 차지한 막강 빙그레 이글스에 맞서, 롯데 자이언츠가 해태 타이거즈를 꺾고 한국시리즈에 올라왔다. 그해 장종훈은 홈런을 41개나 때렸다. 당시로서는 넘보기 힘든 ‘넘사벽’의 기록이었다. 이강돈-이정훈-장종훈의 이름만 적어도 파괴력이 느껴지는 ‘다이너마이트 타선’과 송진우 정민철 이상군이 분투한 투수진은 역대 최강급이었다. 대전 사람들은 이번에야말로 우승을 확신했지만 왠지 나는 예감이 안 좋았다. 애써 시청을 피한 한국시리즈 결과는 또 한 번의 패배였다.
▲ 빙그레 이글스 시절의 유니폼. 장종훈의 35번이다.
훗날, 한국 프로야구가 개막된 1982년에 태어난 홍진호란 이름의 프로게이머는 꽤 인상적인 전성기를 보냈음에도 스타리그에서 준우승만 다섯 번을 차지해 자신의 이름을 ‘2인자의 대명사’로 만들었다. 그는 각종 커뮤니티에서 그의 성을 좀 되게 발음한 ‘콩’이란 명칭으로 요약되었는데, 그후 준우승을 자주 차지하는 게이머는 어김없이 ‘콩라인’이란 평가를 받게 되었다.
그리고 ‘콩’이 준우승의 대명사가 된 2천년대 중반 이후 야구팬들은 특정시기를 추억하며 ‘콩성’과 ‘콩그레’란 말을 만든다. 1986년에서 1993년까지의 8년 간, 한국시리즈 준우승은 삼성(4회)과 빙그레(4회)의 몫이었다. 해태가 6번 우승하고 롯데와 LG가 한번씩 우승하는 그 시기 동안 삼성과 빙그레는 줄기차게 준우승만 해댄 것이다. 내가 프로야구를 처음 본 그 시기가 바로 '콩그레'의 시기였던 것이다.
그리고 ‘빙그레 이글스의 전성기’는 거기까지였다. 1993년부터 독수리는 하강했고 이름도 ‘한화 이글스’로 바뀌었다. 11살 소년은 빙그레라는 제과회사와 한국화약이라는 회사 사이의 연관성을 발견해낼 수 없었다. 세월이 흘러서야 빙그레 회장님과 한국화약 회장님이 혈연관계에 있고 ‘다이너마이트 타선’이란 별명도 한국화약의 이미지에서 차용되었음을 알게 되었다.
‘우리 팀’의 하강을 보며 잠깐 야구에 관심을 끊었지만 몇 년 지나지 않아 나는 ‘내 인생의 선수’를 만난다. 14살이 된 1996년, 장종훈과 송진우와 정민철에 결코 뒤지지 않는 능력치와 스타성을 가진 선수의 잠재력이 폭발했다. 그해 구대성은 18승 3패 24세이브 139이닝 평균 자책 1.88의 성적으로 다승왕과 구원왕을 동시에 석권했다. '대성불패'란 별명이 탄생한 시즌이었고, 그후 십 여년 한미일 프로야구에서 족적을 남긴 한 남자의 비상이었다.
그해 한화는 준플레이오프에서 패배했지만 자기 공이 먹히든 그렇지 않든 특유의 시크한 표정으로 특이한 폼으로 공을 뿌려대는 그 투수를 좋아하지 않을 수 없었다. 구대성 때문에, 나는 그 후 몇 년 동안이나 마무리 투수란 건 7회쯤 되면 올라오는 것인줄 알았다. 또 톱타자 이영우와 외야수 송지만 등, 내가 ‘빙그레 이글스의 전성기’보다 훨씬 친근하게 기억하는 그 선수들이 그때쯤부터 활약하기 시작했다.
▲ 구대성은 훗날 2000년 시드니 올림픽 동메달 결정전에서 완투승을 이끌어낸다. 좌완인 그는 돌아서 던지는 투구폼으로 2루를 여유있게 보고 시작하는지라 도루도 거의 불가능했고 좌타자들에겐 극악이었다. 이승엽조차도 현역 내내 그의 공을 제대로 때리지 못했다. 방송화면 캡처.
1998년, OB베어스의 용병 타자 타이론 우즈가 장종훈의 위대한 ‘41홈런’ 기록을 깨뜨리고 42홈런을 때렸다. ‘빙그레 이글스의 전성기’는 흐릿해져만 갔다. 1999년엔 전해 우즈와 홈런왕 경쟁을 하다 2위(38홈런)로 시즌을 마친 이승엽이 54홈런을 때려대며 ‘넘사벽’ 홈런타자의 신기원을 이룩했다. 처음으로 장종훈을 흐릿하게 만든 건 30(홈런)-30(도루)클럽 시대를 열어젖힌 호타준족 박재홍(현대 유니콘스, 1996년)이었지만 결국 이승엽의 등장이 더욱 결정적이었다.
이해엔 한화 이글스의 용병타자인 댄 로마이어도 45홈런을 때리며 장종훈을 넘어섰지만 이미 깨진 기록이었는지라 한화팬들도 더는 신경쓰지 않았다. 1999년은 이글스 역사상 유일한 한국시리즈 우승의 해이지만 조금 뜬금이 없었다는 기억이 있다. 17살이 된 나는 더 이상 상처를 두려워해 경기 시청을 피하거나 하지는 않았지만 당시 팀 전력 자체는 1992년 쪽이 더 강했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자팀우승을 폄하할 필요야 없지만 잠시 시행된 양대리그가 아니었다면 가능하지 않을수도 있었던 우승이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어쨌든, 제이 데이비스-댄 로마이어-장종훈의 막강 타선과 선발 송진우 정민철 전천후 마무리 구대성의 활약으로 한화는 롯데를 비교적 쉽게 이기고 우승했다. 로마이어의 3루타와 장종훈의 희생플라이로 경기는 마무리되었는데, 그해 전성기를 이미 약간 지난 장종훈의 활약이 그렇게 눈물겹고 눈부셨다. 우승을 차지한 그날 한화 선수들은 좀 과하게 울었다. ‘콩그레’의 역사와 한이 실린 울음이었으리라.
나는 꿈이 소박한 편이었던 지라, ‘우리 팀’이 한번 우승하게 되자 이 팀 성적에 큰 욕심을 내지 않게 되었다. 훗날 남아공 월드컵(2010년)에서 한국 축구가 ‘원정 16강’을 하게 된 후 국가대표 축구팀에 대한 관심이 식은 것과 비슷한 상황이었다.
좋은 일은 계속 이어졌다. 2000년 시드니 올림픽 동메달 결정전 일본전에서 구대성은 '전설의 156구 완투승'으로 2타점 적시타의 이승엽과 함께 후배들의 병역을 책임졌다. 리그를 씹어먹은 기억이 별로 없는, 인구가 적은 지역을 연고로 한 비인기팀인 이글스의 스타들은 전국적으로 유명한 경우가 별로 없었다. 하지만 구대성은 국제대회에서의 승승장구로 다른 레전드들 이상으로 유명해졌다.
▲ 당시 완투승 직전의 구대성의 모습. 방송화면 캡처.
해외진출을 노린 그는 뉴욕 메츠로 갈 수도 있었지만 한화 이글스의 사정 때문에 거액의 이적료를 팀에 남기고 오릭스 블루웨이브로 떠나갔다. 그는 몇 년간 일본에서 선발투수로 그럭저럭 활약하다가 메이저리그에 다시 도전해 잠깐 불펜투수로 뛰다 2006년 시즌 전 한국으로 돌아온다.
그 시기 나는 구대성 소식만 가끔 챙길 뿐 야구를 열심히 보지 않았다. '내 인생의 선수'는 리그를 떠나 있었고, 한화가 그리 좋은 성적을 찍지 못하던 시기이기도 했다. 이십대 초반 청년에게는 야구 말고도 즐길 것들이 많았다. 2005년엔 군대에 갔고 뉴욕 메츠 불펜투수가 된 구대성이 랜디 존슨을 상대로 2루타를 때리고 홈스틸로 점수를 내 주간 MVP가 되었다는 소식을 전화기 너머 호들갑스런 친구의 목소리로 전해들었다.
그리고 2006년에 한화 이글스는 6번째로 한국시리즈에 나간다. 이글스는 그후로 지금까지 한국시리즈에 진출한 적이 없으며, 마지막 포스트시즌 진출은 2007년이다. 류현진이라는 고졸신인이 나타나 리그를 씹어먹고 메이저리그에서 복귀한 구대성이 대활약한 2006년은 한화팬들에게 1992년이나 1999년에 비견될 정도로 인상적인 시즌이었다.
2006년 준플레이오프 상대는 기아였다. 경기기록지를 다시 살펴도 언제쯤인지 감이 안 잡히지만, 구대성이 불을 끄러 올라왔는데 이종범이 타석에 선 순간이 있었다. 말년병장이던 나는 TV 볼륨을 높였다. “이거만 막으면 이겨”라고 말하면서. 몇 년만에 한국에 돌아온 구대성의 공이 익숙한 타자는 없었지만 짬밥이 있는 이종범은 안타를 쳐서 타점을 올렸다. 하지만 경기는 뒤집어지지 않았다. 나는 다시 말했다. “이겼다. 이 뒤로는 대성이 공 칠 타자가 없어...” 그리고 한화는 기아를 이겼다.
준플레이오프 기아전 2승 1패, 플레이오프 현대전 3승 1패로 한국시리즈에 진출한 한화는 삼성과 맞붙었다. 당시에 이미 막강 불펜을 구축하던 삼성이었다. 구대성 대 오승환, 혹은 구대성 대 삼성불펜의 대결로 압축할 수 있는 경기들이었다. 경기 하나하나는 박진감이 넘쳤으나 한화는 1승1무4패로 패배했다. 1999년 우승을 견인했던 용병타자 중견수 제이 데이비스가 이해를 마지막으로 한화를 떠났다.
독수리의 몰락은 하루아침에 이루어지지 않았다. 송진우, 정민철(2009년 은퇴). 구대성(2010년 은퇴) 등 ‘레전드’들이 많고 기존 선수들만으로도 김인식 감독 체제에서 포스트시즌에 나가던 한화 이글스는 2천년대 중반 신인 선수를 조금만 뽑아 쓰는 ‘짠돌이’ 운영을 했다. 그리고 이 몇 년의 '근검절약'이 몇 년 후 팀의 '뎁스'에 심각한 악영향을 미쳤다.
전반기까지 3위를 하다 ‘올림픽 브레이크’ 이후 5할 승률의 5위로 밀려 포스트시즌 진출에 실패한 2008년 이후 전력은 꾸준히 이탈하기만 했다. 프런트는 일본에서 돌아오는 3루수 이범호를 잡지 못했고 2군 구장도 다른 팀보다 몇 년 늦게 지어졌다.
한국 프로야구가 과거처럼 몇몇 잘하는 선수들을 혹사해서 성적을 낼 수 없을 만큼 발전했는데도 한화는 2010년. 2011년까지도 ‘90년대 야구팀 운영’에 머물러 있었다. 베이징 올림픽 금메달 이후 일어난 야구붐에 자극받아 뒤늦게 투자를 늘렸지만 약해진 전력을 만회하기는 역부족이었다. 2011년 시즌, SNS의 야구붐을 견디지 못한 나는 아예 시즌경기까지 챙겨보기 시작했고 '야왕 한대화'의 열풍 속에 때때로 즐거운 시간을 보내기도 했지만 객관적인 전력이 너무 처진다는 사실을 발견하며 우울함도 깊어만 갔다.
이글스의 역사는 우승 횟수(1회)가 다소 초라할 뿐 그래도 포스트시즌의 단골손님이었고 삼성 기아 현대(해체) 정도를 제외한 타팀에게는 그다지 꿀릴 게 없다고 여긴 시절이 있었다. 하지만 2008년 이후 야구에 관심을 가지게 된 많은 야구팬들은 한화를 과거 쌍방울이나 태평양보다도 더한 ‘약팀의 대명사’로 여기기 시작했다. 2008년까지 통산 5할 승률을 지키던 이글스는 현재 통산 –100승 정도를 찍게 되었다. LG나 롯데는 –200이 아니냐고 자위를 해보지만 지금 추세를 보면 몇 년 안에 뒤집힐 것만 같다.
▲ 2012시즌 한화 이글스는 메이저리그 동양인 최다승에 빛나는 박찬호까지 합류했음에도 시즌 내내 꼴지를 벗어나지 못했다. 박찬호 선수는 2013시즌이 시작하기 전 은퇴를 선언했다. ⓒ뉴스1
그야말로 ‘한국 프로야구의 대표적인 약팀’으로 역사 속에 자리매김할 날이 얼마 남지 않은 것이다. 한화 이글스는 2천년대 초반 '엘롯기'로 묶여 놀림받았던 LG나 롯데나 기아와는 달리 팬수도 많지 않고 지역 특성상 크게 난리를 치지도 않아 부담없은 놀림감이 된다. 최훈 카툰에서 이 팀이 독수리가 아니라 닭 비스무레하게 묘사된 것도 어언 몇 년이다.
‘빙그레 이글스 전성기’ 때 OB나 LG가 대전에 오면서 이 팀을 한번 이겨보려고 단체로 삼계탕을 시식했다는 전승에 비한다면 아찔한 격차다. 만약에 이팀이 9구단 체제 최초의 9위를 차지하기 시작한다면, 2008년부터 해서 ‘588-6899’라는 롯데와 LG 암흑기를 능가하는 거대한 비밀번호를 찍을지 모른다는 우려까지 나온다.
지난 시즌 종료 후 ‘빙그레 이글스 전성기’를 박살내던 김응용 감독 등 ‘해태 레전드’ 코치진들이 합류했지만 올 시즌 초만 보면 사정은 더 나빠졌다. 물론 류현진이 200억이 넘는 이적료를 남겨주고 떠났음에도 신임감독에게 FA 하나 쥐어주지 못한 구단과 프런트의 잘못이 더 크다. 하지만 현장을 오래 떠나 있던 그들은 한화를 ‘90년대 야구’에서 탈피시켰다기보다는 ‘90년대 야구’의 또다른 유산으로 이끌고 있는 것 같다. 장성호와 송신영을 쉽게 내준 것에서 보이듯 이팀이 얼마나 뎁스가 얇은지에 대한 고려도 부족했다.
감독과 코치진은 이제야 팀상황을 받아들이고 대처하는 듯 하지만 개막 후 11연패의 좌절은 짙다. 올시즌 ‘8위 경쟁’을 해야 하는 ‘1군리그 첫해’ NC 다이노스의 경우 한경기 한경기의 승리가 내일의 문을 여는 역사의 한걸음이지만 ‘1군리그 28년 개근’ 한화 이글스에겐 한경기 한경기의 패배가 수렁으로 향하는 치욕의 가시밭길이다.
▲ 최근의 한화 이글스는 복날의 삼계탕처럼 다른 팀들을 위한 훌륭한 보양식이 되었다. ⓒ뉴스1
상식적으로 볼 때 한화가 올시즌 NC 다이노스에게도 밀려 9위를 한다는 건 말도 안 되는 일이라 여겼지만 ‘분위기’는 그렇게 흘러가고 있다. 연패가 문제가 아니라 전력이나 경기내용의 질을 봐도 그렇다. 코치진의 구상은 클린업이 부상없이 한 시즌을 치르고 외국인 용병투수들이 허접한 내야수비에도 '멘붕'없이 시즌을 치르며 투수와 야수 유망주가 여기저기서 터져 나와야 간신히 성립할 터인데, 이미 강동우와 박정진과 고동진 등의 부상이탈을 메꿔줄 자원이 없는 상황이다.
그래서 불펜 필승조도 없고 쓸 만한 대타도 없으며 김태완이 그 모자란 수비력으로 계속 우익수를 봐야 하는 것이 현재의 무기력한 경기력의 배경이다. 시즌 중 '현금 트레이드'라도 해야 할 판국이지만 모그룹의 회장이 정당한 법집행을 받느라 부재한 시국이다. 재벌그룹이 운영하는 야구단에서 총수가 사라졌다는 건 적극적인 의사결정이 힘들다는 의미다. '약팀의 대명사 한화 이글스'의 안개가 언제 걷힐지 예측하기도 힘든 이유다.
▲ 2012년 9월 20일자 한국일보에 실린 기자의 칼럼. 류현진 한 명을 붙들어서 해결될 팀의 문제가 아니라 보았기에 신임 김응용 감독의 발언에 위기를 느껴 그를 놓아줄 것을 팀에 건의하는 글이었다. 하지만 류현진 덕분에 200억 이상의 이적료를 남긴 그 팀이 그해 이적시장에서 FA 한 명을 잡지 못할 줄은 꿈에도 몰랐다. 류현진의 포스팅 금액이 뜬 날 기자는 눈물을 흘렸지만 다행히도 그는 메이저리그에서도 잘 해낼 태세다.
도심에서 살이 찐 비둘기가 날지 못하고 뒤뚱뒤뚱 걸어다니는 모습을 볼 때 우리는 ‘닭둘기’라고 놀린다. 현재 한화 이글스의 상황은 타이거즈 코치진을 수혈해와 ‘타이글스’라 부르기도 했지만 객관적인 측면에서 보면 ‘닭수리’에 가깝다. 상위 7개팀과는 다른 리그를 살고 있으며 NC와 경쟁해야 하는 입장이다. 2천년대 중반 이후 상하위팀들이 갈리는 양상이 있지만 그중에서도 조금 심하게 쳐져 있는 것이 현재의 한화다.
결국 이팀을 수렁에서 건져내려면 냉철한 현실인식부터 해야 하지 않을까 싶다. 이글스의 과거 영광도 코치진의 과거 영광도 잊어버리고 이팀이 NC와 탈꼴지를 다투는 최약체임을 겸허하게 인정해야 한다는 것이다.
시즌 처음부터 끝까지 주욱 꼴지를 했던 작년 시즌에도 승률 4할은 넘었는데 “한화가 승률 3할 못 넘으면” 운운하는 기사를 봐야 하는 현실을 받아들여야 한다. NC 선수들처럼 연패는 어쩔 수 없는 역량으로 받아들이고 승리 하나하나에 환희하고 집중하지 않으면 정말로 9위를 하는 사태가 일어날 수도 있다. 발걸음이 가벼운 NC와는 달리 자신을 짓누르는 과거를 잊어버리고 일단은 지면에 땅을 붙이고 걷는 것에 집중할 때이다.
그래야 나중에는 다시 비상할 날이 오리라는 희망이라도 가질 수 있지 않겠는가. 독수리가 지난 시즌과는 달리 한 번쯤은 순위표에서 '환승'하는 모습을 보여주기를 소망한다.
▲ 칼을 움켜쥐고 날아가는 독수리 사진이 화제다. 영국 데일리메일은 네덜란드 사진작가 한 보미스터가 스웨덴 베스베르보톈에서 독수리가 칼을 쥐고 날아가는 희귀한 장면을 포착했다고 2012년 5월 10일(현지시간) 보도했다. ⓒ뉴스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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