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지슬>에는 역사가 있고 일상이 있다. <지슬>에는 비극이 있고 웃음이 있다. <지슬>은 사람의 이야기인 동시에 영령들의 이야기이다. 영화 <지슬>을 보는 것은 익숙한 것과 낯선 것, ‘그 들’의 역사와 ‘우리’의 역사가 엉기고 실리는 아이러니를 감각하는 일이다. 영화는 과거와 현재의 첩경의 어디쯤, 아니면 현재와 병존하는 현재 너머의 차원에서 재생되는 현행의 서사를 상연한다. <지슬>을 이해하기 위해선 형식과 맵시에 눈길을 두어야 한다. 나는 상영시간 내내 인력과 척력의 틈바구니에서 귀기어린 기척에 부대꼈다.

 

영화는 분명한 제의의 형식을 노정하고 있다. 1948년의 어느 겨울. 4.3의 제주를 유린하던 ‘초토화 작전’의 가파른 복판이다. 신위-신묘-음복-소지. <지슬>은 총 4개의 챕터로 위령제를 무대 위에 올린다. 이는 역사의 ‘재현’이라기보다, 영령의 ‘초혼’처럼 느껴진다. 혼백에 각인 된 채, 암굴 속에서 영겁의 공전을 거듭하는 기억의 재생. 이것은 과거의 이야기가 아니다. 제주의 동굴과 암석의 움푹진 틈새, 음산한 헛간과 너덜한 창호지 문 너머. 그 어두운 안 편에선, 귀신과 귀신이 승천하지 못하고 죽고 죽이고 있다. 천장과 벽으로 막힌 공간 저 편에 카메라가 거할 때면, 종종 먹먹하게 들끓는 소음을 감지 할 수 있다. 영화는 ‘사람’의 시야가 닿지 않는 상공에서, 제주 해안의 파도 모양으로 접힌 적운을 내려 보며 시작한다. 이 오프닝은 이승과 구천 어디 쯤 이탈된 차원의 인장처럼 느껴진다.

흑백의 필터를 입은 화면은 몽혼한 정서의 농도를 더한다. 흑백의 화면이 서사의 역사성을 표지한다 받아들일 수도 있다. 그러하되, 재현의 시대성과 실재성은 배경과 인물의 특색을 명징하게 노출하는 총 천연의 색감에 의해 부각 될 터이다. <지슬>에서 흑백의 이미지는 실재성을 탈각하고 있다. <지슬>은 명과 암, 흑과 백을 적극적으로 이미지화 한다. 시작과 끝을 수미 상관하는 연막의 살포. 극의 주된 공간적 배경인 동굴의 암연. 이 둘은 공히 귀기와 몽환을 분무하는 장치다. 중반 이후의 시퀀스. 카메라가 동굴 (흑) 속으로 하강 할 때, 도란도란 모여 앉은 주민들에게 조명 (백)이 부여된다. 웅성거리는 호롱불처럼 이미지화 된 광경은 현재의 다른 차원을 떠도는 혼불을 연상시킨다.

필름을 장악한 롱테이크는 사건과 관객, 인물과 관객의 거리감을 통제한다. <지슬>의 앵글에는 ‘적당한’ 거리가 없다. 간혹 인물의 얼굴을 따고 들어가거나, 대개는 떨어져서 상황을 관조한다. 롱테이크는 주민들의 담소를 중계하기 위해 멀찍한 좌표를 설정한다. 여기엔 두 가지의 효과가 있다. 앵글의 거리감은 이입을 자제시킨다. 그저 바라보게 만든다. 반대의 효과. 영화는 군집한 주민들에게 각각의 숏을 할당하지 않는다. 관객은 단일한 프레임 안에서 진행되는 각각의 발화를 스스로 따라 붙어야 한다. 숏의 이행에 의지하지 않는 자발적인 행위와 참여. 관객은 담화에 배석하고 개별의 인물을 관찰하게 된다. 비극은 거대담론으로 전화하지 않는다. 개별성과 일상성에 천착하는 효과가 발생한다.

배석의 롱테이크는 살육의 현장에서도 작동한다. 극의 중반. 김상사의 부대는 마을을 습격해 학살을 자행한다. 카메라는 이 때, 차원에 걸쳐있다. 이 신은 시점숏으로 구성돼 있다. 누구의 시점숏인가. 배석의 시점숏이라 말하고 싶다. 군인들 모두는 시점숏의 주체가 아닌 대상으로 설정돼 있다. 느린 템포로 카메라가 이동하며, 학살의 장면 장면을 참담히 눈에 담는다. 식칼을 쑤셔 넣던 고중사는 카메라의 접근을 의식하며 고개를 돌린다. 명백한 시점의 현현. 만행의 가해와 피해, 어느 편에도 속하지 않거나, 양 편 모두에 포함 된 인력과 척력의 경계에서, 제의의 참여를 향한 통로가 개방된다.

<지슬>은 낯설음과 아이러니로 묶여진 영화다. 김상사는 멀쩡한 얼굴로 어느새 혼미한 광기에 찌들어 관객을 혼란시킨다. 이 단절은 별다른 예고 없이 이뤄진다. 익숙한 것이 낯선 이물감으로 돌변 할 때, 섬뜩한 기괴함이 엄습한다. 순덕의 죽음을 확인한 만철이 눈물을 뿌리며 달려가는 장면. 물정 모르는 상표가 말다리를 자랑하며 백치처럼 뜀박질 해 따라간다. 순덕의 젖무덤 같은 제주의 대지 위에서, 비극과 일상이 교차하며 그려내는 웃지도 울지도 못할 아이러니의 풍경. 지슬(감자)는 비극적 일상성을 표징하는 민초들의 주식이다.

4.3의 제주는 시대가 지역에게 부과한, 허리가 부러질 듯 무거운 질량의 비극이다. 그 몇 년 간 희생된 인명의 수가 기만명이었다. 사람과 대지가 한 몸으로 각인한 아픔은 틀림없이 통상의 감각을 초과할 터이다. 귀신의 기억이 사람에게 전이되는 감촉 역시 온전할 수도 반듯할 수도 없다. 귀기와 아이러니의 재현이 역사를 사유하는 최선의 방식인지는 판단 할 수 없다. 영령을 위로하는 제의에 걸 맞는 재현이란 점은 분명하다.

귀신들의 살육과 아픔은 여전히 반복되고 있다. 영화의 시작과 끝을 잇는 폐쇄와 연막의 모티프. (김상사가 민가의 문을 열 때 자욱하게 번지는 연기, 최종 소탕이 개시되는 동굴을 메우는 고추 태운 연기) 죽음과 죽임이 회귀하는 저 안에선, 매캐한 고통에 휩싸여 귀신들이 울고 있다. 영화의 종반 동굴 장면. 카메라는 공간과 물리의 법칙을 이탈한다. 흑백화면의 음영을 재봉선 삼아, 주민들의 숏을 나열하며 수평의 롱테이크를 직조한다. 두런두런 거리는 일상과 수난은 그렇게 계속 재연되고 있다.

제의의 논리는 살귀들 역시 위령의 대상에 포함시킨다. 죽이는 자가 먼저 승천해야 죽는 자가 영면할 수 있다. 죽이는 자가 제물로서 사라져야, 죽임의 회전이 종료된다. 죽였던 자 역시 업화에 휩쓸려 발버둥 치고 있다. 칠흑 같은 역사의 너머에서, 제주祭主를 부르는 호명이 절박하게 구천을 맴돈다. 정길아. 정길아. 이 역사를 목격하고 남겨진 자. 위령제의 제주는 나와 당신, 우리들 모두이다. 아직도 끝나지 않은 세월. 지슬. 이제 그만 죽이세요.

 

필자> 일상과 세상의 경계를 모로 걸으며, 조심스레 두리번대고 글을 쓴다. 사회, 문화, 정치의 단층을 채집하여 살펴본 이면의 수런거림들을 블로그(blog.naver.com/yke0123)에 편철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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