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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pdated 2018.4.26 목 18: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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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철수와 진보정의당이 사민주의 정당 만들어냈으면"‘사민주의자’ 주대환 인터뷰 (하)
김완, 한윤형 기자 | 승인 2013.04.04 00:45

편집자 :1954년생이며 73학번인 주대환은 제법 정치에 관심을 가진 이들에게도 생소한 이름이지만 진보정당 운동에 참여했던 이들에겐 낯익은 이름이다. 그는 1970년대 민청학련 사건(1974년), 긴급조치 9호 위반(1978년), 부마항쟁(79년)으로 세 차례 감옥에 다녀왔다. 그 후엔 고향인 경남 마산과 서울 인천 등지에서 노동운동을 했다. 1980년대 그가 활동한 인천지역민주노동자동맹(인민노련)은 당대의 대표적인 노동운동 조직이었다. 현재 진보정의당 대표인 노회찬 전 의원과 <철학 콘서트>로 베스트셀러 작가가 된 황광우 등이 당시 그의 동료였다.

혁명적 사회주의자였던 그는 소련 붕괴 이후 노선을 바꿔 합법적 진보정당 운동의 길로 들어선다. 그가 대표였던 한국사회주의노동당 관련 조직 사건으로 1992년에 국가보안법으로 또 한번 구속되지만, “이미 혁명을 포기했다”는 그의 선언에 재판부는 이례적으로 관대한 판결로 화답한다. 이 사건은 어떤 운동권들에겐 ‘전향’으로 받아들여졌고, 다른 이들에겐 “남한 사회에서 일군의 좌파들이 혁명노선을 포기했음을 천명한 유일한 공식적인 선언”으로 평가받기도 했다.

합법적 진보정당 운동을 고민하던 그는 한국 사회에는 독일 사민당보다는 영국 노동당의 노선이 더 적합하다고 판단, 민주노총을 기반으로 한 대중적 진보정당을 기획한다. 그렇게 그는 1997년의 ‘국민승리21’과 그 후신인 2000년 민주노동당의 창당에 기여한다. 그후에도 대체로 고향 지역에서 활동하면서 민주노총 초대 위원장이면서 민주노동당 초대대표였던 권영길을 위해 지역구를 닦았다. 권영길 전 의원이 경상남도 창원을에서 재선까지 할 수 있었던 데엔 그의 역할이 크다는 평가가 많다. 2012년 총선에서 권영길 전 의원의 지역구였던 경남 창원을에서 민주당 후보로 출마하기 위해 민주당에 입당했지만 민주당내 경선에서 패배했다.

2004년 민주노동당 정책위의장에 당선되지만 당의 지지율이 하락하는 것을 막지 못했다. 2008년 민주노동당 분당 사태 때 당적을 정리하고, 현재 사회민주주의연대 공동대표다. 한국 사회에서 ‘영국 노동당’ 실험도 실패로 끝났기에 이제 ‘미국 민주당’을 지향해야 한다는 주장으로 후배들에게 또 한번 ‘전향’했다는 비판을 들었다. 평생 운동권으로 산 셈이지만 그는 자신에 대해 “생각하기 외에는 별로 한 일이 없으며 생존을 위해 평생 부모를 속이고 친구에게 구걸했다”고 말한다. 그는 우리 유전자는 쉽게 바뀌지 않기 때문에 정치운동을 위해서는 구석기 시대 사람들의 생활방식에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고 믿는 과학주의자이기도 하다.

활동가로서의 우여곡절을 겪었지만 끝내 한국 사람들이 생각하는 ‘정치인’은 되지 못한 그에게서 최근의 정국에 대한 견해와 진보정당 운동의 소회를 들었다.

   
▲ '위키트리' 소셜방송을 진행하는 주대환 사회민주주의 연대 대표
미디어스(이하 ‘미’): 노선을 바꾸셨지만 진보정당 얘기를 아니할 수는 없겠다. 영국 노동당과 같은 정당을 만들겠다고 노력하신 세월이 십오륙년은 되는 것 아닌가. 민주노동당이라는 이름으로 표현되지만 그것을 넘어서는, 노동조합 기반의 진보정당 운동이란 기획이 흔들흔들한다거나 쇠퇴했다거나 심지어는 소멸했다고 말할 수 있는 상황일 텐데, 지난 15년의 경험을 반성적으로 평가한다면 어떻게 될까. 왜 한국 사회에서 영국 노동당과 같은 정당은 만들어지지 못한 걸까.

주대환 대표(이하 ‘주’): 물론 평소에도 그 경험 전체를 반성적으로 평가해보고 있다. 좀 단정적으로 얘기하는지는 모르겠는데, 지금은 한국에서 영국 노동당과 같은 정당을 만들 수 없었다고 생각하는 편이다. 우리의 잘못도 있지만, 결국에는 객관적 조건이 되지 않았다.

: 과욕이었다?

: 80년대 말까지만 해도, 19세기에 독일 사민당이 사회주의 이념을 선전하면서 노동자들을 조직하여 당을 만들어나간 그런 역사를 한국 사회에서 재현하려고 하였다. 하지만 그 어려움을 깨닫고 나름 과감하게 포기하고 영국 노동당처럼 노동조합에 의지하여 대중적인 진보정당을 만드는 길로 나서게 되었다. 그것이 이른바 신노선이다. 더 이상의 상상력은 발휘하지 못했다. 하지만 그런 판단은 그 당시로서는 어쩔 수 없었을 거 같기도 하다. 나이도 젊었으니까.

진보정당이 노동계급까지 만들어낼 수는 없었다

그런데 결국엔 조건이 달랐다. 영국 사회는 오랜 세월에 걸쳐서 노동자 계급, 노동계급 의식이 형성되어 있었다. 노동당 이전에 노동계급이 있었다. 그저 사회경제적인 계급분화를 말하는 게 아니라 본인이 그 계급의 소속임을 자각하는 자의식을 딱 갖고 있었고 그게 생활양식, 사고방식, 그리고 문화로 드러난다. 말하자면 “너는 부르주아다. 혹은 미들 클래스다. 혹은 귀족이다. 근데 나는 노동계급이다”라고 말한다. “너는 홍차를 마시지만 나는 커피를 마신다”라고 말하는 거다. 영국은 그런 노동계급이 있는 상황에서 노동자 정당을 만들어낸 것이다. 그런데 한국 사회엔 그런 게 없었다.

: 그래서 한국의 진보정당 운동은 대중의 노동계급 의식을 형성하는 것까지 목표로 삼아야 하는 어려운 길에 놓였다.

: 이제와 생각하자면, 그것까지는 할 수 없었다고 보는 거다. 의식이 있고 거기서 당을 만들어가는 것도 만만하지 않은 작업인데 어떻게 의식까지 만들어내며 당을 만들어내겠는가. 그런 일은 있을 수가 없고 그렇게 되는 일이 아니다. 그러니까 일반 국민들 사이에선, 우리가 ‘노동당’이라 내세웠지만, 영국 노동자들에게 ‘노동당’이 받아들여지는 방식으로 받아들여진 게 아니다. 그저 ‘새로운 당’, ‘기존 야권을 흔드는 새로운 당’으로 받아들여졌다. 말하자면 2004년의 안철수, 2004년의 안철수 현상이었던 거지. 그래서 지식인이나 중산층들이 반응을 더 보이고 지지를 더 했고 정치변혁에 대한 기대를 걸었다. 우리는 결국 이 기대를 충족시키지도 못했고 그 한계를 벗어나지도 못했다. 사실상 ‘노동당’ 노선이 아니었던 거다.

: 민주노총이 그렇게 협소하게 갇힐 줄을 당시에 예측하지 못했던 측면도 있지 않나.

: 그렇다. 그래서 민주노동당의 한계는 바로 한국 노동운동의 한계였다. 결국 한국 노동운동이 다른 곳과 좀 달랐던 것 같다. 노동운동이 계급 전체의 이익을 위해서 싸우지를 않았다. 이것도 노동계급 의식이 형성되어 있지 않다는 문제일 수 있겠다. 산별노조 얘기를 많이 하지만 진정 산별노조가 만들어졌나? 자기 작업장, 자기 조합원 얘기 밖에 안한다. 한국 노동운동에 열사도 많고 분신자살도 많았지만 결국 요구를 들여다보면 굉장히 좁은 영역의 요구, 자신의 작업장 문제에 대한 요구였다. 그렇게 87년 이후에 이십여 년 노동운동을 하다 보니까, 오히려 노동운동이 노동부문 내부의 임금격차를 벌이는 데 일조한 것처럼 되어버렸다. 조직화된 노동과 미조직화된 노동 사이의 임금격차가 벌어졌다. 물론 생산성도 올라갔을 거다. 자본 측이 임금인상에 대응해서 투자를 늘리고 기계도 가져왔으니까.

어쨌든 87년 이전에 크지 않았던 대기업과 중소기업의 임금격차가 노동운동 때문에 벌어진 상황이 되어버렸다. 그래서 영세사업장이나 하청사업장의 노동자들은, 민주노총을 적대시하게 되어버렸다. 87년 이후 처음 노동운동이 시작되었을 때는 함께 파업을 옹호하고 투쟁하면 임금이 같이 올라가기도 했다. 옆공장에서 난리를 치고 있으니 사장이 놀래서 “너흰 뭐 불만 없나?”라고 묻는 상황이 되고 처우가 나아졌던 거지. 근데 한 이십년 지나보니까 임금격차가 벌어져서, 민주노총에 속한 대기업 노동조합이 투쟁을 해서 그들의 형편이 나아지면 자기들 하청단가를 깎는 결과로 돌아오니까, 민주노총을 적대시할 수밖에 없는 거다.

하청노동자들은 권영길에게서 고개를 돌렸다

그래서 2004년 총선 때도 이미 권영길 대표 모시고 선거운동하러 돌아다니다보면 저기 하청업체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은 쳐다도 안 봐. 고개를 확 돌려버려. 창원 지역구에도 노동자가 한 5천 명 정도 되는 부품업체 사업장 쯤 되면 권영길에 대해 환영하고 환호하는데, 그 밑에 하청업체 사업장들이 있는데 거기선 고개를 돌려버린다. 우리편 아니다 이거다. 지금 민주노총도 노동자 계급 내에서 고립된 상황 아닌가. 비정규직 철폐 운운 하지만 그건 ‘말봉사’ 정도고, 실제로는 별로 하는 게 없거든. 계급 전체 이익을 대변하지 않는 거다.

그래서 이게 참, 나도 젊은 시절에 노동운동을 했다는 걸, 노동운동 좀 따라다녔다는 걸 자랑스럽게 여겨야 하는데, 자식이나 손주들에게도 그걸 자랑스럽게 얘기할 수 있어야 하는데, “할아버지는 왜 다른 사람들처럼 대학교수나 이런 거도 못하고 살았냐”라고 하면 “난 노동운동했다”고 해야 하는데, 지금 그게 별로 자랑스럽지가 않게 되었다. 시민운동한 사람은 그나마 서울시장도 하고 하는데. 오히려 우리 젊은 시절엔 노동운동하는 사람들의 자부심이 대단하고 시민운동하는 사람들을 우습게 알고 그랬는데 말이다.(웃음)

그래서 나는 사회민주주의를 말할 때, 이걸 통해서 복지정책들을 말하는 것도 좋지만, 기본적으로 노동운동의 정신으로 역할하기를 바란다. 사회민주주의로서 (한국 노동운동이 잃어버린) 따뜻한 마음을 되살렸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한다. 한국의 노동운동이 더불어 같이 살자는 노동운동이랄까, 혼이 있는 노동운동이랄까, 자기보다 못한 노동자들을 위하는 그런 운동이 되어서 존경을 받고 국민지지도 받고 그래야 한다고 생각한다. 국민이 따로 있는 게 아니고 하청노동자들도 다 국민 아닌가. 그들로부터 지지를 받는 노동운동이 되기를 정말로 소망한다. 그래야 진보정당도 될 수 있다.
 

   
▲ 권영길 전 민주노동당 대표가 23일 오후 서울 노원병 출마를 선언한 노회찬 진보정의당 공동대표의 부인 김지선 예비후보 선거지원을 나서 서울 노원구 상계동에서 주민들과 인사를 나누고 있다. 민주노총 초대위원장이며 민주노동당 초대대표였던 권영길 전 의원도 2천년대 중반에 이미 하청노동자들의 외면을 받고 있었다고 주대환 대표는 증언한다. ⓒ뉴스1
: 그런데 또 지금 진보정당의 딜레마가, 그런 하청노동자들은 조직화가 되어 있지 못하니까, 자꾸 조직된 노동자들, 가령 민주노총 조합원들의 지지만 구하고 쳐다보게 되고, 그러다보니 노동조합의 논의에 종속되고 그런 측면이 있지 않은가. 통합진보당이 분당하고 진보정의당으로 갈려나가는 과정에서도 서로 민주노총의 지지를 구하기 위해 난리였다. 물론 진보신당 역시 이에 대해서는 자유롭지 않다.

: 그런 측면이 있다. 그런데 내 경험으로는 과거 민주노동당이 그렇게까지 민주노총에 종속적이지는 않았다. 민주노총에서 돈과 사람을 대기는 했지만 정책이나 이런 부분에서 구속을 많이 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민주노총 입장에서는 진보정당이 좀 잘해줬으면 그걸 통해 노동계급 내에서 협소해진 자신들의 처지를 만회하는, 자신들의 한계를 면피하는 그런 역할을 기대했을 거라는 생각을 한다. 진보정당은 아무래도 범국민적인 활동을 하니까 그걸 통해 민주노총의 이미지도 개선하고, 외연도 넓히고, 그런 일을 하는데 돈과 사람을 지원하는 정도는 아깝지 않다고 여겼던 것 같다. 근데 처음에는 진보정당이 그런 역할분담을 좀 하는가 싶더니 결국엔 민주노총과 비슷한 한계에 걸려 넘어진 것이 아닌가.

: 돌이켜보면 2004년에 10명의 국회의원이 원내에 들어갔고, 그간 이쪽의 역량에선 상상할 수 없었던 숫자의 정책위원들을 끌어들여 진용을 꾸렸다. 한 명만 들어가도 세상이 달라질 수 있다고 외치는 게 민주노동당원의 활동이었는데 한꺼번에 10명이 들어갔다. 지금 생각해보면 우리가 십년 전에 그런 진보정당을 가졌었나 싶을 정도의 규모가 있었고 사회적 환대가 있었다. 그런 시절이 있었고, 그 시절에 당에 계셨다. 여러 가지 조건들이 불리했지만 그 정도 성과를 만들어낸 시절이 있었다. 그런데 여기까지 밀려왔다. 지금은 규모는 물론이고 사회적인 환대나 위세나 영향력도 그 시절과는 비교가 되지 않는다. 소회해봤을 때 이 몇 가지 지점의 실패 때문에 여기까지 밀려왔다고 판단하는 그런 구체적인 지점들이 있을까.

민주노동당, 복지공약으로 성공하고 운동권 정서로 망해

: 글쎄, 사실 나는 그때 ‘여기까지구나’라고 느꼈더랬다. 2004년에 정책위의장 당선되고 민주노동당에서 가진 첫 회의부터 그런 생각이 들었다. 국민들은 우리 실체를 잘 모르고, 기대를 많이 했지. 지지율이 20% 가까이까지 갔다. 근데 내부에서 당시 있었던 13인 최고위원회를 딱 한번 해보니까 ‘여기까지구나’라는 느낌이 오더라. 지역사회에서 활동하다가 정책위의장이 되어서 중앙에 올라와 보니 내가 지지를 호소했던 그 시민들, 우리에게 지지를 보내준 그 시민들이 바라는 바와 당의 격차가 너무 컸다. 달라도 너무 달랐다. 사고 자체가 완전히 운동권인 거지.

: NL이든 PD든 정파논리를 당에서 관철하려 했던 그런 상황을 말씀하시는 것인지.

: 그런 정도가 아니고, ‘내가 진보다’라고 스스로를 규정하는 부분들, 가치관이랄지 생각하는 기준이랄지 판단기준이랄지 이런 부분들이 있는데, 일반 국민들이 만약 그 사람들을 만나서 대화를 해본다면 “얘들은 아니네~”라고 할 정도의 수준이었다. 그래서 국민들이 그때 잘 모르고 환호를 했던 그런 측면이 있는 것 같다. 중앙당의 모든 사람들과 나는 큰 강의 건너편에 서서 소리를 치는 것처럼 대화가 되지 않았다. 입으로는 복지정책을 내세워서 지지를 얻었지만, 몸은 ‘운동권’에서 바꾸지 못했던 것이다.

정책은 그럴듯한 복지정책을 내세워서 지지를 얻었는데, 정작 그후 활동은 전혀 달랐던 거다. 그 당시 민주노동당이 총선 과정에서 내세운 복지정책들을 17대 총선 회기에서 실천했다면 어땠을까. 결과가 달라지지 않았을까. 하지만 당시 민주노동당 활동을 했던 주체들이 그런 일을 할 수 있는 사람들이 아니었다.

: 당시 2004년에 원내 입성하자마자 열린우리당이 내세운 4대개혁입법 정국에 빨려 들어갔던 것으로 기억한다. 특히 국가보안법 문제에 NL들이 ‘올인’하게 되면서 열린우리당과 차별성을 보여주지 못했다는 생각도 드는데.

: 그런 점이 있다. 그래서 열린우리당과 함께 부침을 겪고 결과적으로 국민들에게 함께 심판을 받아버렸다. 열린우리당 지지율이 오를 때 함께 올랐고 떨어질 때 함께 떨어졌다. 국민들에게 참여정부와 함께 ‘민생을 책임지지 못하고 도덕성만 내세우는 무능한 진보’라고 낙인 찍혀버린 것이다.

: 그런 정치적인 혼란이 또 당시 민주노동당이 국회의원과 당직의 겸직분리를 실시하면서 나름 대중적이었던 인사들이 의회로 들어가 당일에 관여를 안 하게 되면서 더 심화되었다는 해석도 있는데.

: 글쎄 그런 건 사소했던 것 같다. 보좌관이나 당료나 지구당 사무국장 모두 마찬가지였던 것 같다. 대중정서와는 너무 거리가 먼, 다른 별에서 온 것 같은 사람들이 들어차 있었다.

: 하지만 당시 민주노동당에서 돌아가신 이재영 전 정책국장 등이 만들어내고 제시했던 상가임대차보호법이나 부유세 같은 것들이 이제 한국 사회에서 민주당 혹은 새누리당에까지 받아들여지는 분위기가 있고, 그 역량이 진보정당에선 소실되다시피 한 상황이 아닌가. 과거 성과를 만들어낸 그런 역량이 어디로 갔는지에 대한 질문이 필요하지 않을까.

'당 만들기'에 대한 관심이 다들 부족했다

: 정리하자면 ‘당 만들기’에 실패한 상황 아닐까. 어제도 이재영 동지 추모사업하는 행사에 가서 옛날 동지들 만나 오랜만에 술마시며 예전 얘기들도 하고 그랬다. 지금 나오는 얘기들도 하고 그랬다. 그런데 나는 노회찬이나 심상정 같은 진보정당에서 대중정치인으로서 성공하고 일종의 상징이 된 인물들조차 개인적인 활동은 잘 했지만 ‘당 만들기’의 문제에는 무능하거나 무심했다고 생각한다. 당을 만들어내기 위해서는 일종의 헌신과 희생이 필요한데, 그들은 기성 정치인 못지않게 이기적이었다. 한국 정치인들은 원래 자영업자들이다. 민주노동당의 정치인들 역시 그런 정치문화를 벗어나지 못했고, 그 결과 정치인은 만들었지만 정당은 만들지 못했다.  

가령 2006년 ‘일심회 사건’(2006년 10월 국가정보원이 적발한 간첩사건. 당시 북한의 지령을 받은 장민호가 주동자로, 최기영 민노당 전 사무부총장과 이정훈 전 민노당 중앙위원 등도 이 사건으로 북한에 정보를 제공한 간첩 혐의가 확정됨. 훗날 민주노동당은 2008년 2월 3일 임시 당 대회에서 이 사건에 연루됐던 당원 2명에 대한 제명안을 부결시켰다. 이에 따라 대선 참패를 수습하기 위한 PD계열 심상정 비상대책위의 혁신안 통과가 NL계열 대의원의 반발로 좌절되면서 심상정ㆍ노회찬 전 의원 등이 민노당을 탈당하여 진보신당을 결성한다)을 돌이켜보자. 대법원 판결까지 갈 것도 없이 드러난 정황만으로도 상황은 뻔했다. 그런데 국회의원 중에 한마디 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 진보정의당 심상정 의원이 지난 2월 18일 서울 여의도역 주변에서 열린 '노회찬은 무죄다' 선전전에서 노회찬 전 의원의 무죄를 주장하고 있다. 주대환은 노회찬 전 의원이나 심상정 의원 등도 민주노동당 시절 '당 만들기'에 열심이지는 않았다고 회고한다. ⓒ뉴스1

그때 마침 내가 정책위의장을 그만두고 마산에 있었다. 그래서 내가 마산에서 평당원 서명을 조직했다. 서명의 요지는 ‘사태를 인정하고 대국민사과를 하자’라는 거였다. 마산에서 당원 서른 세명을 조직해서 서명을 했다. 그러자 광주에서도 성남에서도 서른 세명씩 서명을 하더라. 나는 그렇게 주욱 울산, 천안 등 돌아다니면서 서른 세군데 지구당에서 서른 세명씩 서명을 받으면, 밑으로부터 당원들의 힘으로 당이 바뀌어나갈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했다.

: 서른 세명씩 맞춘 건 독립선언을 염두에 둔 것인가.

: 그렇다. 그러니까 조선노동당으로부터의 민주노동당의 독립선언 같은 모양이다. 어찌 하다보니까 마산에서 서른세 명이 서명을 했다길래, “마침 잘 됐다”고 하며 종료시켰다. 광주와 성남에도 전화해서 서른세 명씩 맞춰달라고 했다. 당시 광주나 성남에서 서명한 당원들은 거의 다 노동자들이었다. 노동자들에게 서명지를 가져가면 호응이 좋았다. 그래서 다들 한 거다. 그래서 천안, 대구, 울산 등으로 이어서 하려고 했고 반응이 좋았는데, 어느 순간 다들 못하겠다고 하더라. 당시 PD정파들이 이 ‘밑으로부터의 서명운동’을 진압을 해버렸다.

서명한 사람들 중에는 평범한 노동자 당원들이 많았다. 당시 일심회 사건이 매일 TV에 나오는데 죽겠다는 거다. 자랑스럽게 당을 홍보하던 사람들의 자긍심이 훼손당했는데, 당의 정체성을 확인하고 당을 살리자는 호소를 PD정파와 대중정치인이란 사람들이 북돋아주지는 못할망정 저지했다. 이게 도대체 뭔가 싶었다.

분당도 사민주의 정당도 한 템포 먼저 했어야

그래놓고 2008년에 버스 지나놓고 손 흔드는 격이 된 거지. 국민들이 보기엔 2006년에는 당내에서 아무 다른 목소리도 없이 지나갔는데, 쟤들 다 똑같은 놈들인가 보다 했을 거 아닌가. 훗날(2008년을 의미) 조승수와 노회찬과 심상정이 일심회 사건 비판하면서 따로 당을 나왔는데 한 템포 늦은 것이었다.

지금 상황도 그렇다. 이제야 진보정의당 내부에서 평당원들이 사민주의에 대해 말하고 있고 당명을 사민당으로 바꾸자는 조류도 있는 것으로 안다. 2008년에 진보신당 만들 때 그래야 한다고 내가 말하지 않았나. 2008년 총선에서 진보신당이 2.9% 밖에 못 얻고 원내 진출에 실패했는데, 그 당시 사민주의 선언하고 사민당이라 표방했으면 나는 3% 넘었을 거라고 본다.

그렇지만 진보정의당 내부에서 그런 얘기가 나오는 것은 뒤늦었지만 다행이라 생각한다. 특히 밑으로부터 평당원들이 일으키는 사상혁명이라는 점에서 긍정적으로 보고 기대가 크다. 그 사상혁명이 철학의 혁신, 대한민국(사)관의 혁신으로까지 이어지기를 바란다. 혹시 2030세대의 지도자인 안철수가 좀더 사회경제적 문제에 천착을 하여 사회민주주의를 받아들인다면 함께 할 수도 있다고 본다. 그러면 2030세대의 정서와 관점에 맞는 ‘선진국형 진보’의 길로 나아가는 거다. 식민지 종속국의 진보에게 숙명적으로 주어졌던 ‘민족주의’ DNA가 박혀 있는 ‘후진국형 진보’를 이제는 극복하고, 새로운 세대의 감수성으로 야권 주류인 486세대의 이데올로기를 넘어서는 것이다.

이런 수준의 화학적 결합을 이루어내지 못한다면 민주당 외부에서 존립하기가 어렵다. 유진 뎁스의 미국 사회당이 한때는 당원이 10만명에 직업 정치인만 1천명이었다. 그런데 흔적도 없지 사라졌다. 정체성은 명확히 해야 하지만 그 정체성을 실현해내는 현실적인 방편에 대해서도 끊임없이 고민해야 한다.

: 그런데 지금은 오히려 진보정의당과 안철수가 정면으로 부딪히는 안타까운 상황이다. (웃음) 진보정당에 관심을 가지거나 당원이었는데, 최근의 상황에 상심한 후배들이 많다. 그런 이들을 위해 마지막 한 말씀을 부탁드린다.

'2004년의 기억'을 떠나보내자

: 우리가 이제는 ‘2004년의 성공의 기억 또는 환상’을 떨쳐내야 한다고 생각한다. 돌이켜보면 당시 다들 그것에 모두 안주했다. 마치 유비 일당이 촉한을 얻고 잠깐 단꿈에 취한 상황과 비슷했다. 나는 그때도 이게 오래가지 못할 거라고 거듭 주장했다. 위나라의 인구와 생산력이 우리보다 압도적이고 오나라도 몇 배 큰데 여기서 중원으로 나아가서 결판을 내지 못하면 안 되는 상황과 같았다. 어차피 제3당의 존재는 불안하다. 오래 가지 못한다. 소선거구제 하에서 ‘뒤베르제의 법칙’은 중력의 법칙과 같다. 당지지율은 바람 같은 것이다. 소선거구제가 제도인 나라에서 지역구를 2석 밖에 못 얻은 정당이 10석을 얻었다고 기뻐하고 안주하는 것이 말이 되는가.

아마 제갈공명이 반대를 무릅쓰고 중원으로 출병하면서 출사표를 쓴 심정이 그와 같았을 텐데, 나는 제갈공명처럼 힘도 가지지 못 했으니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젊은 세대들은 이제 그 경험을 넘어서야 한다고 생각한다. 여전히 2004년을 그리워하며 “2004년을 다시 한 번”이란 식으로 생각해서는 그걸 넘을 수가 없다. 성공할 수 있는, 가능한 다른 길을 찾아야 한다. 가끔 당시 정말로 똑똑했던 그 젊은 친구들이 여전히 2004년의 경험에 묶여 있는 것을 보면 참 안타깝다는 생각을 한다.

: 좋은 말씀에 감사드린다.


주대환-이명희 부부 미니 인터뷰

‘인터뷰’는 스마트폰의 음성녹음 기능을 해제한 후에도 이어졌다. 애초 인터뷰 후 술자리를 가지자고 약조한 자리였다. 주대환 대표는 “오랜만에 젊은 친구들과 만나자”며 인터뷰 끝날 즈음에 아내 이명희 여사를 불러낸 상황이었다. 그가 저술한 책의 저자 소개 어딘가에 “한동안 전업주부로 살기도 했다”는 구절이 있었음을 떠올려 이여사에게 “주대표가 정말로 가사노동을 열심히 하시느냐”고 여쭈어 보았다.

이명희 여사(이하 ‘이’): 잘 하죠. 우린 각자 자기 몫만 하거든요. 남의 몫은 거들떠보지도 않아요. 가사노동에 관한 한 우린 서로 거들어준다는 개념이 없어요.

: 젊었을 때부터 그랬나요?

: 원래 결혼 조건에 그게 있었어요. 가사노동 반분하자라고.

: 아내에게 결혼하자고 프로포즈를 했더니 첫 마디가 ‘가사노동은 어떻게 할 거냐’라고 되묻더라구요. 솔직하게 말하면 ‘가사노동’이란 말을 몰랐습니다. 그래서 창비에서 나온 <여성운동의 이론과 실제>라는 책을 읽고 공부를 하고서, 바로 ‘반반씩 하자’고 답했죠. (웃음)

: 그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는 중에 부마항쟁으로 다시 감옥에 들어갔어요. 그래서 담담하게, 인연이 아니었나 보다 하고 있는데 10.26 때문에 석방되었어요. 김재규가 이어준 인연인 셈이죠.

: 80년 서울의 봄의 그 좋은 분위기가 아니었다면 결혼하지 못했을 거예요. 어른들이 걱정은 하면서도 뭐 이젠 세상이 바뀌니까 감옥 다녀온 청년도 잘 될 수 있지 않을까 했던 거지. 진보적 경제학자인 이병천 강원대 교수가 처남이 됩니다. 아내의 작은 오빠죠. 사실 잘 알지는 못하는 사이였는데 대단히 잘 아는 후배인 것처럼 어른들에게 잘 말해주고 많이 도와주셨어요. 그래서 무사히 결혼하게 되었죠.

주대환 대표가 잠깐 자리를 떴을 때 이여사에게 이것저것을 더 물어보았다.

: 사실 저이가 반만 기억하고 있는 게 있어요. 가사노동 문제만 물었던 게 아니에요. 당시 나는 공장에 들어가야 한다는 생각이 강했거든요. 결혼해도 공장에 간다고 할 때 보내주겠냐고 물었어요. 물론 그렇게 하겠다 했죠. 큰애 낳고 한동안 키우다가 나중에 아이는 부모님께 맡겨놓고 서울로 올라와서 실제로 공장에 들어갔어요. 구로공단의 나우정밀이란 회사였죠. 1987년에 노조를 만들었고 나중엔 문화부장을 했어요. 다른 사람 이름으로 1년 다녔고, 그게 탄로가 나서 해고될 뻔했는데 노조가 강하니까 회사에서 물러서서 본명으로 다시 몇 년 다녔죠. 마지막엔 남영동에 끌려갔었어요. 조직사건과 어떻게 엮으려고 했던 모양인데, 아무리 해봐도 안 엮이니까 그냥 풀어줬어요. 저는 다시 나우정밀로 돌아가려고 했는데, 그동안 남편이 퇴사 절차를 모두 밟아놓은 거예요. 당시에 엄청 싸웠죠. 근데 남편은 당시에 지하조직인 인민노련을 했기 때문에, 혹시 거기까지 수사가 들어오면 안 된다는 생각으로 그렇게 한 거죠. 이해는 해요.

두 사람은 두 아들을 낳았고 지금까지도 함께 살고 있다.

김완, 한윤형 기자  mediaus@mediau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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