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명박 정부의 언론장악 시도에 심각한 위기를 느낀 누리꾼과 시민들이 자발적으로 KBS를 지키겠다며 촛불을 밝히고 있다. 이들의 구호는 '이명박과 최시중은 물러나라', 그리고 'KBS와 정연주 사장 우리가 지킨다' 등으로 집약된다. KBS 뉴스와 프로그램이 모두 흡족해서가 아니다. 정연주 KBS 사장을 무조건 지지하고 감싸는 '친정'도 '정빠'도 물론 아니다.

그렇다면 무엇이 그들을 KBS 본관 앞으로 모이게 했을까? 여전히 우리 사회에서 막강한 영향력을 지닌 공영방송을 정권의 통제가 아니라 국민의 힘으로, 독립된 '언론자유'를 지켜주는 것이 시급하다는 '확신'과 '의지'가 바로 '배후'이자 '동력'이다. 시민들의 자발적인 촛불 민심에 KBS 내부 구성원들과 언론운동진영 활동가들은 그 열정에 놀라고 고마운 한편으로 자신들의 몫을 다 하지 못한 부끄러움에 고개를 숙이고 있다.

▲ 다음 아고라 누리꾼과 시민들이 서울 여의도 KBS 본관 주위를 둘러싸는 촛불 인간띠 잇기를 진행하고 있다. 앉아있는 시민들 뒤로 '정연주 퇴진' 구호가 담긴 KBS 노조의 만장이 세워져 있다. ⓒKBS

공영방송 수호 촛불이 KBS 주변을 밝히고 있는 요즘, 그러나 KBS 노조로서는 알던 모르던 가장 치욕스러운 순간을 보내고 있다. KBS 노조를 향한 시민들의 평가는 '어용노조'라는 말로 축약되기에 이르렀다. KBS 노조는 "정 사장 퇴진 부분만 빼면 방송장악 음모 저지, 공공성 수호와 관련해 시민사회와 입장이 전혀 다를게 없다"며 손사래를 치기 바쁘지만 정작 노조의 행보는 이를 뒤집을 만한 진정성을 보여주지 못하고 있다. 방송민주화 역사의 큰 주축이었던 KBS 노조가 2008년 제2의 '6.10 촛불'이 전국을 뒤덮은 '거리 정치'의 시기에 어쩌다 이 지경까지 이르렀을까.

"KBS 노조, 부부싸움 하느라 '방송장악 음모' 몰아내지 못해"

전국언론노조 위원장 출신이자 MBC 사장을 지낸 최문순 통합민주당 의원은 KBS 노조의 행보를 비판하면서 '부부싸움을 하느라 강도를 몰아내지 못하는 형국'이라고 빗댔다. 정연주 사장 퇴진에 매몰된 KBS 노조가 공영방송을 장악하려는 정권의 음모, 그리고 이에 저항하는 국민들의 촛불 민심을 정확히 읽어내지도, 대처하지도 못하고 있다는 비판이다.

전국언론노조 KBS본부(본부장 박승규)는 출범부터 정연주 사장과의 대립각을 존재 기반으로 삼았다. 정 사장이 편파방송과 코드인사를 하고 있다고 주장하며 내부 보수적인 세력을 결집시켰고, 국부제를 폐지하고 도입한 '팀제'에 불만을 지닌 직종과 직급의 입장을 등에 업었다.

거칠게 표현해 개혁보다는 안정을 추구하는 내부 세력의 압도적인 지지를 얻어 출발한 박승규 집행부는 따라서 기존 노조가 걸어왔던 개혁적인 노선과도 일정 부분 결별했다. 급기야 전국언론노조의 회계부정 사태를 계기로 심각한 갈등 관계를 빚으며 언론노조는 물론 시민사회단체와도 연결 고리를 상실한 채 고립 상태로 빠져들었다. 이런 상황으로 접어든 근본적인 바탕에는 '반정'(반 정연주) 구호 속에 스스로를 가둬버린 채 내부 직능단체를 비롯한 KBS 안팎의 요구와 의견을 귀담아 듣지 않은 고립된 운동 방식의 한계가 자리잡고 있다는 평가가 나온다.

"전방위적 언론장악 시도…정 사장 퇴진 이후 독립적 사장 선임 쟁취할 수 있나?"

정연주 사장에 대한 내부 구성원들의 평가는 접어두더라도, 정권이 바뀌고 방송장악 음모가 전방위적으로 진행되는 시기에 정 사장의 임기 문제는 현 정부와 한나라당, 관변언론, 그리고 그들의 추종세력을 빼곤 이제 그 누구도 부인하지 않는 공영방송 독립의 상징이 돼 버렸다. 촛불을 밝힌 거리의 시민들도 정 사장에 대한 호불호는 우선 순위가 아니라고 잘라 말한다. 그들은 YTN과 아리랑TV 사례를 인용하며 정 사장 퇴진 이후 KBS가 독립적인 사장 선임을 과연 쟁취할 수 있느냐고 오히려 반문한다. KBS 내부 구성원들에게, 언론운동 진영에게 던지는 뼈아픈 질문이다.

▲ 지난 4월 22일 비대위 출범식에서 '정연주 사장 퇴진' '공영방송 장악 음모 저지' 구호를 외치고 있는 전국언론노조 KBS본부 박승규 본부장(맨 앞 오른쪽) ⓒ서정은

평소 공영방송 문제에 관심이 없었다는 시민들까지도 현재 언론을 둘러싼 심상치 않은 움직임, 정치적 함수와 변수를 정확히 읽어내고 있지만 박승규 집행부는 오로지 '정연주 퇴진'이라는 한 길만 고집하고 있다. 민심을 외면하고 소통에 실패한 대통령, 그를 배출한 정당과 닮은 꼴이라는 비판은 '어용노조'라는 비아냥으로 이어지고 있다.

최근 박승규 집행부는 언론노조와의 관계 정상화 과정에서 공영방송 장악 저지 투쟁에 힘을 쏟고 외부 시민단체와의 연대 강화를 위해 노력하겠다고 밝혔다. 일각에선 KBS 노조의 '궤도 수정'에 어느 정도 기대를 걸기도 했으나 모든 사안의 모든 결론을 정 사장 퇴진으로만 귀결시키는 행보에는 어떤 변화도 감지되지 않는다.

박승규 집행부는 지난 10일 김홍 부사장의 갑작스런 사의 표명과 관련해 성명을 냈다. 하지만 정 사장을 퇴진시키려는 정권의 시나리오가 아니겠냐는 우려와 의혹에 대해서는 침묵한 채 모든 것을 정연주 사장의 책임으로 돌리는데 급급했다.

촛불민심, 정 사장 퇴진 매몰된 KBS 노조에 "뉴라이트 노조, 어용노조" 비난

공영방송 KBS 지키기 차원에서 정 사장 임기 보장이 필요하다고 말하는 촛불민심에 대해서도 불편한 심기를 드러냈다. 박승규 집행부는 "국민들의 자발적인 공영방송 지키기 움직임을 폄하할 의도는 전혀 없다"면서도 "정연주를 둘러싼 일부 사내 정치 세력들이 편향된 정보를 제공해 순수한 촛불의 의미를 오도하려 한다면 이는 결코 가볍게 봐 넘길 수 없다"고 KBS PD협회 등 내부에 화살을 돌렸다. '정 사장 퇴진 반대'를 외치는 촛불 민심에 '배후론'을 제기하는 듯한 이런 방식은 이미 '조중동'의 그것과 많이 닮아 있다.

그렇기 때문에 시민들의 눈에는 KBS 노조의 성명과 구호가 조중동 내지 한나라당의 그것과 다르지 않고 뉴라이트 세력과도 차별성을 발견할 수 없다. 결국 '한나라당 노조' '뉴라이트 노조', '어용노조'라는 시민들의 비난은 '배후'에 의해 오도된 것이 아니라 스스로 자초했다는 비판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실제로 KBS 이사회의 일부 친한나라당 성향 이사들이 KBS <뉴스9> 리포트를 문제삼아 보도본부장 문책을 안건으로 다루려고 나섰다가 '정치적 월권행위' '부당한 보도간섭'이라는 비판을 샀던 사건에서도 박승규 집행부는 침묵했다. KBS 기자협회 소속 기자들이 지난 17일 "KBS 이사회가 한나라당 이사회냐"면서 부당한 보도간섭을 항의하는 피켓 시위를 벌이고 한국기자협회와 언론연대 등이 일제히 비판 성명을 내는 등 문제의 심각성이 컸음에도 정작 노조는 아무런 대응도 하지 않았다.

박승규 집행부가 이사회의 행태에 대해 어떤 입장도 내지 않은 것은 어찌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왜냐하면 KBS 노조는 이미 친한나라당 성향의 이사들이 문제삼은 논리와 똑같은 내용으로 자사 뉴스를 비판하는 성명을 냈기 때문이다.

KBS를 둘러싼 정치적 상황이 달라졌고, '촛불 민심'도 KBS 노조를 비판하는 지경에 이르렀지만 박승규 집행부는 언제까지 기존 주장만 되풀이하는 답답한 행보를 이어가려는 것일까. 정연주 사장은 낙하산 사장이다, 정 사장 자녀 2명이 병역 면제를 받은 것은 도덕적 결함이다, 재임 5년간 적자로 경영능력 부재하다, 전체 조합원 80%가 사장 퇴진을 원한다고 강변하지만 불행하게도 노조가 제시한 사유는 국민들을 설득하는데 역부족으로 보인다. KBS 노조가 다음 아고라 자유토론 게시판에 정 사장 퇴진을 요구하는 이유를 구구절절 올렸지만 누리꾼들의 반응은 냉담하다.

KBS를 정조준한 정권의 장악 시도가 전방위적으로 진행되는 상황에서 노조가 밝힌 정 사장 퇴진 사유는 국민들의 눈에도 그저 한가한 '집안싸움'으로 비칠 뿐이다. 감사원 특별감사, 정 사장 검찰 소환 등 국가기관을 동원한 '표적 수사' 움직임이 본격화한 시점에 명분도 근거도 빈약한 정 사장 퇴진을 고집하는 KBS 노조는 내부는 물론 '촛불 민심'에서도 완전히 고립되는 처지에 내몰렸다.

▲ 지난 16일 저녁 7시부터 300여명의 다음 아고라 누리꾼과 시민들이 서울 여의도 KBS 본관 앞에서 '굳세어라 KBS, 민주시민이 지킨다' 등의 구호가 적힌 현수막과 손팻말을 들고 이명박 정부의 언론정책을 비판했다. ⓒ서정은

최근 KBS 기자협회는 기자들을 상대로 설문조사를 실시했다. 박승규 위원장이 기자 출신이라는 점에서 노조를 향해 일관된 목소리를 내기 어려웠던 기자협회는 기자들의 총의를 모아보자는 취지에서 정 사장 퇴진에 대한 의견을 들었다.

17일 공개된 설문 결과를 보면 '공영방송 사수 투쟁이 중요한 시기이므로 정 사장 퇴진 촉구는 적절치 않다'는 응답이 53.9%를 차지했고 '정연주 사장과 독립성 유지는 관련없거나 걸림돌이니 사퇴 촉구는 적절하다'는 의견은 37.8%로 나왔다. KBS 기자 478명 가운데 434명이 응답한 결과다.

KBS 기자들 54% "공영방송 사수투쟁 중요한 시기, 정 사장 퇴진 촉구 적절치 않다"

압도적인 지지는 아니었으나 기자들 사이에서 박승규 집행부의 정 사장 퇴진 투쟁을 반대하는 의견이 절반을 넘어섰다는 것은 현 국면에서 시사하는 바가 적지 않다. "권력의 방송 장악 시도, 권력의 KBS 장악 시도부터 무산시키는데 투쟁의 초점을 모아야 한다"며 "노조의 궤도 수정이 필요하다"는 절절한 호소 글이 내부 게시판에 계속 올라오고 있는 것도 이와 무관치 않다.

이처럼 '정연주 사장 퇴진'에 80%의 표심을 몰아줬던 KBS 조합원들이 '변화'에 대처하지 못하는 노조의 행보에 점차 불만과 우려를 쏟아내고 있다. KBS 본관 앞으로 옮겨진 촛불 민심을 꺼뜨리지 않고 계속 이어가려는 고민도 깊어지고 있다.

"작금 사장 퇴진 이슈를 두고 현 상황의 분위기(?)를 반영하지 못하는 여론조사나 데이터에 묶여 있는 조합 집행부의 난처함이 십분 이해가네요. 그러나 대규모 적자로 대표되는 경영실패에 대한 책임과 그간 KBS의 편파방송(약간은? 진보적 성향의 방송)에 대한 평가가 이제는 좀 구분되어야 한다고 봅니다. 노조의 사장퇴진 운동을 바라보는 시민사회의 반응은 경영실패에 대한 책임을 지고 사장이 퇴진해야 한다는 주장보다 진보적 방송언론으로의 방향전환 중에 있는 KBS의 변화에 반대하는 '이상한 노조'에 무게가 실리고 있음을 주목해야 합니다. 이것이 오해라는 것을 밝혀야하는 시점인 것 같습니다. 미묘한 시점에 제가 잠시 생각한 것은, 적어도 경영실패에 대한 책임으로서의 퇴진운동은 시기적으로 뒤로 미루는 것이 어떨까? 하는 것입니다."

한 조합원이 얼마 전 사내게시판에 올린 글이다. 스스로 고립을 자초하는 KBS 노조가 진심으로 낙하산 사장을 막아내고 공영방송을 지켜내고 싶다면 지금 당장 무엇을 해야하는지를 묻고 있다. "상황은 변했고 시간은 얼마 남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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