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YTN 보도 대학생 미팅 '장애인 흉내 자기소개' 비난 캡처

 

내가 ‘병신’이란 말을 입에서 거둔 것은 몇 해 전의 일이다. 그해 겨울은 춥고 모질었다. 세상의 즐거운 일들은 나와 멀리만 있었고, 웃음은 내게 허락되지 않는 타인의 전유물이었다. 나는 사람에 치이고 진로에 허덕였다. 늘 불화와 예민함에 시달렸고, 그래서 대개 혼자였다. 우울함과 무력감의 기약 없는 표류, 더 떨어질 곳도 없는 진창에서 지푸라기라도 움켜잡듯 나는 심리 상담센터를 찾았다. 나에게 웃음이 돌아오기까진 많은 시간이 걸렸다. 웃음과 희망이 썰물처럼 빠져나간 갯벌에서, 나는 껍질 잃은 조개처럼 움츠려 있었다. 그때 내가 알게 된 것은 언어의 무서움이었다.

‘병신’, ‘정신병자’, 우울증이란 마음의 감기는 남모를 자격지심이었다. 지하철 좌석의 같은 편에서. 캠퍼스의 강의실 한편에서. 아니면 사람들과의 대면과 만남에서. 누군가 입버릇처럼 던지는 모멸의 언어는 껍질을 잃고 헐벗은 마음에 생채기를 내었다. 그 침체와 좌절의 시간 동안, 나는 나를 향하지 않은 언어가 둔기가 될 수도 있음을 비로소 깨달았다. 그때부터 나는, ‘병신’이란 말을 입에 담지 않는다.

나는 사람들의 선의를 믿지 않는다. 그건 내가 치기어린 짝퉁 니힐리스트이기 때문이 아니다. 나 자신이 타인에게 보증할 수 없는 것을 타인에게서 찾으려드는 게 불합리하다는 생각에서다.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이 세상이 타락한 악한들의 소굴만은 아니라는 믿음 역시 가지고 있다. 타인의 선량함과 야비함을 판단하는 나의 준거는 나 자신이다. 아마도, 편견의 언어는 악의 없이 누적되고 구조의 압력에 의해 경화된다.

그 스스로가 오랜 기간 투병한 병력을 가지고 있는 윤석희씨는 ‘정신장애인’들의 대모로 불린다.(세계일보, [정신장애인 인권 리포트] 병마와 싸우며 재활강의…"아직 고통 안 끝나") 정신적 장애는 그이의 잘못으로 인한 형벌이 아니다. 어느 날 갑자기 그를 ‘찾아 온’ 마음의 병일 뿐이다. 윤석희씨의 ‘증언’이다. 물론, 이것은 신체적인 장애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신체적이건, 정신적이건 ‘장애’의 곤란을 가중시키는 건 ‘찾아 온’ 것을 ‘잘못’으로 인식하는 편견과 차별이다. 무심코 던지는 말 한마디에 입은 상처는 재활로도 치유되지 않는다. 자각 없는 비하의 언어는, ‘장애’를 가진 이들이 사회로 돌아오는 협로를 막는 돌무더기다.

누군가를 ‘병신’이라며 조롱할 때, 그 말의 진정한 효과는 누구를 향해 작용하는가. 혹은 분노와 미움을 담아 ‘정신병자’란 멸칭을 거론할 때, 그 말은 과연 누구를 모독하고 있는가. 우리는 내가 손가락질하는 그가 정말로 ‘병신’이나 ‘정신병자’가 아니란 걸 알고 있다. 하지만, 신체적, 정신적 ‘장애인’은 ‘병신’과 ‘정신병자’라는 말로 표상되는 실재하는 ‘정체성’이다. 내가 혐오하는 것들의 인격적 결여를 증명하기 위해선 그 비유의 텃밭이 되는 이들의 ‘정체성’이 한없이 비천해져야 한다. “이런 ‘병신’ 같은 인간 같으니.” 내 일상의 적대자를 공격하기 위해, 무고한 이들의 ‘장애’를 동원할 때, 그 장애는 열등한 결핍으로 확정되어 버린다. 내 곁의 ‘병신’을 조롱할 때 나와 연루되지 않은 ‘장애인’을 향한 편견은 공고해진다. 폭력을 감각하는 감수성은 그렇게 둔탁해진다.

인터넷 커뮤니티와 트위터. 아주 간혹 그곳에선 출구 없는 논쟁이 벌어진다. ‘병신’이란 말의 올바름을 두고 문제를 제기하는 이와 그에 반발하는 이의 옥신각신. 실제로 나는 이런 항변을 목격한 적이 있다. “‘병신’이란 말이 장애인 비하어라면, ‘지랄’은 간질 환자들을 욕보이는 말이고, ‘염병’은 장티푸스 환자들을 멸시하는 말이냐.” 갖은 욕설의 어원을 들먹이며, 멸칭의 위키피디아를 저술하는 동안, 어느새 처음의 쟁점은 몰각돼버린다. 남는 건, 논점 없는 감정싸움과 언어의 사용권을 둘러싼 지루한 멱살잡이다. (실제, 간질은 비근한 이유로 뇌전증으로 병명을 바꿨다. ‘염병’은 직접적이고 광범위한 연상 정도에 있어 ‘병신’이란 말과 나란히 놓을 수 없을 것이다.) 이 언쟁이 건설적인 결착을 맺지 못하는 이유는 두 가지다. ‘병신’이란 비하어를 발화하는 이에겐, 장애인을 모독할 의도가 없다. 이것이 첫 번째 이유다. 그리고 정치적 올바름과 언어의 여과를 주장하는 이들이, 대개 권유가 아닌 규탄을 통해 계도하기 때문이다. 이 두 가지는 중요하다. 합의의 방법론에 관한 문제이기 때문이다.

말하였듯, 나는 ‘병신’이란 말을 입에 올리지 않는다. 내가 다른 이들 보다 특별히 윤리적인 인간이라서가 아니다. 그저 ‘그들’의 고통을 ‘나’의 고통으로 공유한 분명한 기억이 있기 때문이다. 만약 그러한 기억이 없었다면, 나 역시 숱한 멸칭의 조어들에 정념을 투사하였을 것이다. 익숙하고 몸에 붙은 말들은 성찰과 자각을 거부한다. 어쩌면, 누구나가 그러할 것이다. 비하적인 함의를 지닌 욕설을 근절해야 할 목적은 편견과 소외를 예방하기 위함이다. 특정한 언어의 미점유 상태를 내세워 타인의 악의를 추정하기 위함이 아니다. 나는 타인의 선의를 믿지 않지만, 악의의 창궐 역시 믿지 않는다. ‘타인’의 아픔은 ‘나’의 아픔이 될 수 없다. 하지만 인간은 나의 ‘아픔’이 아닌 것 역시 똑같은 ‘아픔’임을 상상할 수 있다. 어느 누구도 나와 무관한 타인의 ‘아픔’을 경멸할 목적으로 천하고 속된 말을 달고 살지는 않을 것이다. 나는 그렇게 믿고 있다. 비하어의 현존은 그 말을 사용하는 개인들의 문제라기보다, 산탄총의 파편 같은 가혹하고 날선 언어를 자각하지 못하는 언어적 관습과 사회적 인식의 문제다. 어쩌면 모두의 성찰과 모두의 고민을 요청하는 과제일 것이다.

근래 두어 가지 의미심장한 구설수가 공론장의 수면을 넘실거렸다. 이른바 인문 ‘병신’체 비판과 JM 미팅 논란. 지식인들의 오만한 현학을 대중이 질타하는 것은 이해할 수 있는 일이다. 하지만 하필 그 조롱의 낙인이 ‘병신’을 인식표 삼아 새겨져야 한단 말인가. 인문 ‘병신’체에 대한 혐오가 누적될 때 마다, 더불어 누적되는 것은 ‘우리’와 다른 ‘장애’에 대한 혐오다. 이 글을 읽는 우리들은 이제 그 사실을 알 수 있다. 마찬가지. 타인의 ‘장애’를 흉내 내며 친목을 도모하는 순간, ‘장애’에 대한 편견도 두터워진다는 자명함 역시 알고 있다. 인문 ‘병신’체란 네이밍의 통쾌함에 환호하고, 누군가의 흉내를 내며 즐거워하는 동안, 우리들은 죄의식 없이 타인의 고통을 소비한다.

현실에서 장애인들을 막아서는 담벼락은 언어 자체라기보다는 사회의 구조와 체제일 것이다. 황폐한 언어를 삼가는 것만으로, 세상을 변혁할 수는 없다. 하지만 황폐한 언어는 황폐한 세계의 촉매제다. 고작 모질고 눈 먼 한두 마디 주의하는 것으로, 누군가의 고통이 조금이나마 감쇄될 수 있다면, 왜 우리는 그 고통을 방관해야 하는가. 오늘도 세상에는 너무도 많은 말들이 오가고 사라진다. 그 언어의 명멸 속에서 누군가는 상처입고 누군가는 즐거워한다. 이것은 마음의 상처를 안고서, 그 언어의 회전 속에 잠시나마 부대꼈던 나의 ‘증언’이다. 언어는 냉담하지만 또한 다정한 것이다. ‘애자’. ‘병신’. ‘정신병자’. 이 글이 ‘장애’와 ‘비장애’ 사이 단절의 언어를 몰아내고 가교의 언어를 세울 수 있는 자그마한 약속과 권유의 헌장이 되기를 바라며. 나 자신과의 약속 역시 이렇게 날인해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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