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문학’과 ‘예술’의 종말

이성혁은 “시의 미래”, “미래의 시”를 이야기하면서 동시에 문학의 종언, 예술의 종언 담론을 어느 정도 수용한다. 그러나 이것은 모순이 아니다. 왜냐하면 이브 미쇼, 아서 단토, 가라타니 고진 등이 이야기 하는 문학의 종말, 예술의 종말은 문학작품이나 예술작품이 생산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문학이나 예술이 더 이상 유토피아를 제시하기도 어렵고, 일상적인 것으로부터 분리되는 것으로서 ‘예술성’을 지니기도 어렵게 된 상황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기존의 문학의 기능과 위상이 이러한 것이었다면 이제는 새로운 기능과 위상을 고민해야 한다.

즉, 우리는 어떻게 이러한 “위기와 종말을 어떻게 전화시킬 수 있는가”(p.56)에 대해 고민해보아야 한다. 문학(혹은 시)의 기능변환은 놀랍게도 문학이 삶-정치적이 됨으로써 가능하다. 이러한 "문학"의 죽음과 이를 통한 문학의 기능변환은 아방가르드에 의해 실험된 적이 있다. 아방가르드 문학(혹은 예술)은 삶(일상)과 예술의 거리를 철폐하는 데 주력했다. 아방가르드 예술가들은 삶 속에서, 그리고 예술을 통해서 기존의 권위, 제도, 사회, 문화에 반기를 듦으로써 “예술의 정치”를 수행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므로 이 아방가르드 예술은 삶-정치적이라고 볼 수 있다.

이 아방가르드 예술가들은 “예술 아닌 예술”을 통해서 제도화된 “예술”의 죽음을 능동적으로 행했다. 저자는 문학이 나아갈 길이 “역사적 아방가르드와 같이 문학과 예술의 죽음을 능동적으로 실천하면서 자본주의에 포섭된 삶을 바꾸는”(p.54)데 있다고 주장한다. 이를 통해 문학과 예술은 삶-정치적 기능을 수행하게 된다.

2. 문학과 정치

이러한 삶-정치적인 시(문학)는 이른바 “문학의 자율성”을 심각하게 훼손하지 않을까? 이렇게 물으며 “문학의 자율성”을 주장하는 이들은 “정치가 시를 파괴”(p.110)한다고 주장하곤 하는데, 이성혁에 의하면 오히려 “정치는 시를 성장시킨 양식(糧食)”(같은 쪽)이기도 했다고 한다. 이 말은 우선 시와 정치가 연결된다고 해서 그 시의 수준이 떨어지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뜻한다. 이성혁은 심지어 선전선동시 조차도 훌륭한 시가 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시와 삶-정치의 만남은 오히려 시의 수준을 높여줄 것이다. 또한 “정치는 시를 성장시킨 양식”이라는 말은 시가 근대 이후에 자본주의와의 삶-정치적 대결 속에서 성장하고 성숙해나갔다는 것을 의미한다. 탈근대 시대에 오늘날에도 시는 자본주의와 삶-권력에 대항하는 창조적이고 정치적인 운동이어야 한다.

내가 이렇게 “문학과 정치”의 문제에 관심이 있는 것은 다 이유가 있다. 최근 몇 년 동안 문단에서 가장 격렬한 논의의 중심에 있던 화두가 바로 “문학과 정치”였기 때문이다. 시인 진은영의 랑시에르 독해로부터 시작된 이 논의는 그동안 문단에서 금기시 되어 왔던 ‘정치의 문제’를 마구 건드렸고, 많은 사람들로 하여금 랑시에르를 읽도록 만들었다. 랑시에르에 의하면 한 사회에는 감각의 분배체제가 있는데, 예술작품은 이러한 감각의 분배체제를 변형, 교란시키므로 그 자체로 ‘정치적’의미를 가지게 된다. 이것을 ‘예술의 정치’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성혁은 랑시에르의 이론이 “예술 자체가 정치적이기 때문에 어떤 예술작품도 정치적이라는 예술의 알리바이를 제공하는 이론으로 이용될 가능성”(p.82)이 있다는 점을 지적한다.

또한 랑시에르의 이론에서 행동주의는 부정되고 미학적 실험만이 진정으로 정치적인 것이 되어버린다. 저자에 의하면 랑시에르의 미학에 있어서 이러한 행동과 실천은 중요하게 다루어지지 않는다. 하지만 능동적인 행동과 실천 없이 어떻게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단 말인가? 그래서 저자는 구축적인(제헌적인) 힘과 이러한 힘을 통한 실천을 강조하는 네그리를 참조한다.

결국 저자가 제시하는 것은 행동주의이다. 이러한 네그리적인 행동주의에 의해 사람들은 “제정된 것과 그 권력으로부터 탈주하면서 삶을 ‘정치적인 것’으로 구축”(p.86)하고 이를 통해 “삶과 예술의 분리가 아방가르드적으로 철폐”(같은 쪽)되게 만든다. (왜냐하면 아방가르드는 예술과 삶이 하나여야 한다고, 즉 예술이 행동이어야 한다고 주장했기 때문이다.)

3. 문학제도와 주체성

저자는 놀랍게도 노동시에 아방가르드적 성격이 있다고 주장한다. 왜냐하면 노동시도 아방가르드와 마찬가지로, 기존의 문학제도의 바깥이나 주변부에서 시작되었고, 삶과 시를 분리시키지 않고 시 자체를 행동이 되게 했기 때문이다. 시가 곧 행동이라는 것은 시를 통해 세계를 창조하는 일에 참여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할 뿐만 아니라 시를 쓰면서 시인 자신이 시를 통해 스스로 주체성을 형성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은 대타자의 호명에 의해 구성되는 주체성과는 다른 주체성이다.

“자율적으로 형성되는 주체성은 호명에 응답하여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삶을 스스로 명명하고 구축해나가는 데에서 이루어진다.”(p.156)

현재의 문학제도는 이렇게 “자신의 삶을 스스로 명명하고 구축해나가는” 것을 도와주기는커녕 어떤 숭고한 대타자의 호명을 통해서 예속적인 주체성을 생산해낸다. 그리고 이렇게 문학과 문학제도가 숭고하게 되고 신비화된 것은 이른바 “문학의 자율성”이라는 이데올로기와 무관하지 않다. 시 혹은 문학이 일상적인 삶과 분리되는 것을 “문학의 자율성”이라고 부르는 이들은 이러한 이데올로기를 통해 문학제도와 문학권력을 재생산해낸다.

“이어 유형-무형적인 명령이 내려지고, 그들은 제도의 대타자에 의해 주체화되기 시작한다. 삶을 바꾸려고 문학을 선택했건만, 그들은 일상생활로부터 ‘자율적인’ 또 다른 코드에 삶을 맞추어야 하는 상황에 처하게 되는 것이다.”(p.21)

4. 미래의 시를 향하여

그러므로 이성혁이 요구하는 ‘미래의 시’는 일차적으로 삶과의 분리를 철폐해버리는 시이다. 이것은 새로운 아방가르드의 탄생을 요청한다. 물론 이전의 아방가르드로 돌아가자는 말이 아니다. 오히려 새로운 아방가르드의 탄생은 ‘차이의 반복’이어야 한다. 또한 이성혁이 말하는 ‘미래의 시’는 “어떤 미학적 유파를 지칭”(p.7)하는 것이 아니다. 심지어 ‘미래의 시’는 텍스트로 된 시 작품이 아닐 수도 있다. 이성혁은 흥미롭게도 촛불시위를 일종의 ‘시’로 본다. 시는 “창조적 자발성의 조직”(p.190)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러한 “창조적 자발성의 조직”이 삶-권력과의 대결 속에서 이루어질 때 비로소 그 시는 삶-정치적인 시가 될 것이다.

앞으로 삶에 대한 밀착과 창조적 자발성의 조직화와 더불어서 삶-정치를 이루어 내는 ‘시’와 ‘시적인 것’이 많이 생겨나면 좋겠다. 이제 우리의 삶과 분리된 이른바 "문학"의 종언과 함께 미래로 나아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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