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적한 미국의 교외, 어느 고즈넉하고 자그마한 저택. 스토커 가문의 인디아 스토커. 그녀에겐 지금껏 존재를 알지 못한, 매력적이고 베일에 싸인 삼촌이 있다. Ⅰ. 삼촌은 인디아의 아버지를 몰래 살해한다. Ⅱ. 아버지의 장례식 날, 삼촌은 인디아의 저택을 찾아온다. Ⅲ. 인디아의 주변인들이 하나씩 삼촌의 손에 사라진다. Ⅳ. 인디아는 삼촌에게 복수한다. Ⅴ. 그리고 그녀는 길을 떠난다. 이것이 지난 2월 28일 개봉한 박찬욱 감독의 헐리우드 데뷔작, <스토커>의 스토리이다.

 

부연할 필요도 없다. 이것은 재미없고 평범한 ‘이야기’다. 여기에 아무리 말을 더하고 붙여봤자 오리는 백조로 승천할 수 없다. 고작 Ⅰ을 떼어 Ⅳ 앞에 가져다 놓은 허약한 반전이 이 영화의 유일한 서사적 무기다. 찰리 스토커는 오직 인디아를 위해 만들어진 피조물처럼, 어린 조카의 곁을 서성이며 집착한다. 인디아 역시 불길한 미혹에 사로잡힌 채, 시종 찰리의 그림자를 밟고 서있다. 찰리와 인디아를 지배하는 인력은 논리와 인과의 자장에서 벗어나 있다. 그 원인이 제대로 해명되지 않는 한, <스토커>는 실패한 ‘이야기’일 수밖에 없다.

박찬욱 감독의 선택. 그는 이 이야기를 현실의 가장자리에서 테두리로 옮겨놓으며 알리바이를 준비한다. 잘못된 이야기의 진정한 악덕은, 이야기꾼이 그 부조리를 깨닫지 못하는 데 있다. 그런 점에서 <스토커>는 헐거울지언정, 엉성한 ‘영화’는 아니다. <스토커>는 플롯의 뼈대 위에, 모호한 기표와 부산한 소리들로, 살점을 입히고 혈액을 순환시킨다. <스토커>는 치밀한 서사게임의 향연은 아니다. 이것은 서사의 부조리를 감쇄시키는, 왜곡된 감각적 체험으로의 초대다.

<스토커>를 읽는 정상적인 독법은 성장서사로 해석하는 것이다. 이것은 어려운 문제가 아니다. 찰리 (매튜 구드) - 인디아 (미아 바시코브스카) - 이블린 (니콜 키드먼). 이 관계 꼴을 오이디푸스 트라이앵글에 이식하면, 세 모서리의 아귀가 들어맞는다. 말하자면 찰리 스토커는 인디아의 아버지, 리차드 스토커의 환유물이다. 찰리가 누구의 선글라스와 누구의 혁대를 차고, 사건과 관계에 진입하는지 떠올려 보라. 자신을 덮친 엘든의 목이 찰리에게 꺾이는 순간, 인디아는 무엇을 보며 엑스타시를 느꼈던가. 바로 엘든의 목을 조른 ‘아버지’의 혁대다. 그러므로 찰리는 쾌락인 동시에 금지다. 아버지와의 섹스를 원하는 원초적 욕망(샤워 부스 안에서의 자위)이며, 그 죄책감으로 흐느끼는 양가적 대상이다. 어머니 이블린과의 경쟁이 공식화될 수 있도록, 욕망의 금지가 완화된 형태로 치환된 매개물이다. 한편 찰리는 인디아의 이드(id)요, 초자아(super ego)다. 엘든의 죽음을 수사하기 위해 저택을 찾아온 보안관(법). 이때 카메라는 벽의 기둥과 거울을 이용해, 찰리가 인디아의 진술을 ‘엿듣는’ 동시에 ‘감시’하도록 트릭을 건다. 인디아가 볼 수 없는 어두운 기둥 너머 도사린 것은, 충동과 욕망이다. 그녀의 바른편에서 지켜보며 감시하는 것은, 초자아의 계율이다. 그 추동과 금지의 종합으로 인해, 쾌락을 처벌받지 않는 형태로 거짓 진술하는 것이다.

 

이 성장 서사는 현실인지 환영인지 모를 기묘한 감각 속에 재현된다. <스토커>는 양면의 해석이 가능한 이야기다. 이 이야기는 군데군데 봉합되지 않는 균열로 관객을 멈춰 서게 한다. 그러므로 찰리를 인디아의 상상 속 욕망의 환영으로, 얼마든지 해석할 수 있다. 하지만 그 양면의 서사 어느 쪽으로도, 자기 완결적인 구조화는 발생하지 않는다. 어지럽게 나열되는 교차편집은, 시간과 공간의 감각을 뒤섞고 일그러트린다. 그 교차편집의 구조 안에서, 현실과 환상은 구멍 난 틈새를 통해 대면한다. 현재와 현재, 과거와 현재가 대구를 이루며 제시되고, 막다른 골목 같은 사건의 진상으로 수렴한다. 이 교차의 형식과 사운드의 적극적인 조력에 힘입어, 단선적인 서사는 최소한의 긴장을 빚어낸다. 거미와 파리의 친연성. 열여덟의 인디아와 꼬마 찰리의 위험하고 비틀린 날갯짓. 짝을 이루는 기표들은 악의 혈연을 증명한다. 그리고 두 사람의 알 수 없는 인력에 원인을 부여하는 연출의 방어도구로서 기능한다. 식탁에 귀를 박고 계란 껍질을 굴리는 둔탁한 마찰음. 교차편집의 리듬처럼 박자를 타고 메트로놈이 왕복하는 타격음. 모기떼처럼 웅성거리는 장례식장의 온갖 뒷얘기와 대화소리들. 필름에 꾹꾹 눌러 담긴 소음들이, 인디아의 예민하고 과장된 감각을 공기를 타고 관객에게 전이시킨다.

<스토커>는 인간성에 내재한 악의 현존에 매혹된, 기이한 성장의 서사다. 자신의 동생 조나단을 질투하여 파묻은 찰리는, 아벨을 살해한 카인의 재림이다. 어쩌면 성장이란, 덜 나쁜 짓으로 더 나쁜 짓을 예방할 수밖에 없는, 생의 이면 같은 악을 받아들이며, 한걸음씩 계단을 오르는 자립일지 모른다. 욕망은 금지되었기에 매혹이고, 금지는 욕망을 부른다. 편집과 사운드, 앵글의 초점이 완벽하게 합을 맞춘, 찰리와 인디아의 피아노 협주신은, 금지된 쾌락과 관능의 숨이 멎을 듯한 은유다. 파정을 하듯 연주를 멈춘, 찰리가 사라진 의자의 시트 위엔, 환상의 흔적, 욕망의 자욱 같은 얼룩이 남아있다. 단언컨대, 이 장면은 아름답다. <스토커>는 밸런스가 훌륭한 영화는 아니다. 다만 <스토커>는 자기 서사의 여백을 인지하고, 서사만으로 향유할 수 없는, 영화적 감각의 과포화로 내포와 뉘앙스를 지각하게 만든다. 근래의 ‘한국 감독’들의 작품 중, 드물게 시네마틱한 체험을 선사하는 영화다. 이것은 좋은 ‘이야기’는 아니다. 하지만 분명히 좋은 ‘영화’다. <스토커>를 지지할 이유는 그것으로 충분하다.

 

 

필자> 일상과 세상의 경계를 모로 걸으며, 조심스레 두리번대고 글을 쓴다. 사회, 문화, 정치의 단층을 채집하여 살펴본 이면의 수런거림들을 블로그(blog.naver.com/yke0123)에 편철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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