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년 전 6월 당시는 민중항쟁이라 불렀다. 1987년 6월 당시 야당을 출입하고 있던 기자는 야당 지도부가 결합한 ‘6·10 민주혁명’의 전 과정을 취재하기 위해 당사보다 거리에서 보낸 시간이 훨씬 많았다. 6월만 되면 감회가 새롭다. 어찌 기자 뿐이겠는가!

6월 10일, 16일, 29일.

6월 10일이 21년 전 민주혁명 당시의 모든 상황을 상징하는 날이 되었지만, 기자에게는 6월 16일도 잊혀지지 않는다. 6월 10일이 민주혁명의 씨를 뿌린 날이라면, 6월16일은 대통령 직선제 도입을 골자로 하는 노태우의 6·29선언으로 이어지는 징검다리이자 전환점이 됐던 날이다.

▲ 서울신문 6월10일자 4면.
1987년 6월 16일 전두환 대통령은 부산 지역에 위수령을 발동하려고 모든 준비를 끝내놓고 있었다. 군인들은 완전군장을 한 채 명령만 떨어지길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나 당시에는 정치권에서 그런 소문만 무성할 뿐 위수령 발동 계획이 공개되거나 자세하게 알려진 상태는 아니었다.

그러나 위수령 계획은 발동 일보 직전에 철회되었음이 나중에 밝혀졌다. 이유는 성난 민심이 무서웠기 때문이다.

6월 16일을 전후한 시기는 서울에서 불붙은 민중봉기가 부산 마산 등지에서 가장 격렬하게 벌어지고 있을 때였다. 당시 서울지역 시위가 다소 소강상태였다면 부산 지역은 날이 갈수록 시위가 격렬해지고 있었다.

자연히 전두환 대통령의 참모들이나 각종 정보기관은 부산 지역 상황에 촉각이 곤두설 수 밖에 없었다. 당시 부산 지역을 직접 살펴본 전두환의 참모들이나 정보기관의 보고는 '단순히 학생들이 주동이 된 시위가 아니라 모든 시민이 참여하는 민란이기 때문에 군대를 통한 진압이 자칫 더 큰 (광주사태를 능가하는) 불상사를 불러올 지 모른다’는 점을 전두환에게 보고했다고 한다.

6월 10일은 ‘체육관 선거’에 대비한 민정당이 노태우 당시 대표를 대통령 후보로 뽑은 날이기도 하다. 오랫동안 온갖 굴욕을 견디며 낮은 자세를 견지한 끝에 육사 11기 동기인 전두환으로부터 대통령 후보 자리를 얻는데 성공한 노태우였지만, 그를 맞은 것은 축하의 팡파르가 아니라 국민들의 냉소와 거리의 최루탄 냄새였다. 당시에는 대의원단이 뽑는 대통령 간접선거를 ‘체육관 선거’라 불렀다.

그토록 고대하던 집권당의 대통령 후보가 되었지만 날로 확산되는 민중봉기 앞에 사태의 심각성을 깨달은 노태우 대표는 당 총재를 겸하고 있던 전두환 대통령과 전세를 일거에 역전시킬 ‘초강수’에 대한 ‘극비 협의’를 마치고 발표할 날만 계산하고 있었다. 이 무렵을 1987년 6월 27일경으로 기억한다.

기자는 이날 부산(남·해운대구) 출신 국회의원으로 민정당 총재 비서실장을 맡고 있던 류흥수를 만나 점심을 먹었다. 지금은 조선일보에서 일하고 있는 모 선배 기자와 함께 한 자리였다.

화제와 질문은 자연스레 정부와 여당이 어떻게 난국을 수습할 것인가에 모아졌다. 류흥수 민정당 총재 비서실장은 부산 출신으로 1962년 서울법대를 졸업하고 바로 고시 행정과(현 행정고시)에 합격한 뒤 부산시경국장과 서울경찰국장을 거쳐 경찰 총수인 치안본부장과 충남지사를 거친 인물이다.

그의 요지는 이랬다.

▲ 지난 10일 저녁 세종로 네거리에서부터 시청 앞 태평로, 남대문 넘어까지 50만 시민이 함께 촛불을 들었다. ⓒ서정은
자신이 6월 16일 위수령을 발동하기로 되어 있다는 사실을 알고 그 전에 자신의 선거구이자 고향이기도 한 부산을 직접 방문해 시위 현장을 자세히 둘러보았다고 한다. 그런데 사태가 단순하지 않고 매우 심각하다는 것을 직접 확인하고 서울로 올라 온 뒤 전두환 대통령에게 상황을 있는 그대로 보고했다고 한다.

그리고 자신은 어떻게 대처했으면 좋겠느냐고 묻는 전두환 대통령에게 “대통령 직선제를 받아들이는 수밖에 없을 것 같다”고 대답했다고 한다. 이 말을 들은 전두환은 “(국민이 받아들이라고 요구하면) 직선제를 받아들여야지!”라고 이야기했다는 것이다.

당시 민정당 총재 비서실장은 전두환 대통령이 주재하는 청와대 수석비서관회의의 당연직 참석 멤버였다. 기자는 류흥수를 통해 전해들은 전두환 대통령의 입장과 당시 집권당 안팎의 분위기 등을 종합적으로 분석한 뒤 전두환이 대통령 직선제를 받아들일 것이라는 결론을 내리고 6월27일 오후 회사(코리아타임스)에 돌아와 정치부장에게 '전두환 대통령이 대통령 직선제를 수용하기로 결정했다'는 1면 머리기사를 쓰겠다고 얘기했다. 그러나 아쉽게도 부장은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리고 바로 다음날인 일요일 저녁 집에서 민정당으로부터 전화를 받았다. 내일(월요일) 아침 9시 정각에 당사에서 노태우 대표 기자회견이 있다는 것이었다. 전화를 받는 순간 ‘아차!’ 싶었다. 일요일자 신문에 직선제 수용 기사 작성을 고집하지 않은 것이 후회막급이었다.

당시는 조간신문들이 지금처럼 토요일에 휴무하고 일요일에 출근해 다음날인 월요일자 신문을 발행할 때가 아니었다. 월요일자 조간신문이 없을 때였다. 어떤 신문과 언론사도 6월29일 아침의 노태우 대표의 ‘6·29선언’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설사 알았더라도 당시 전두환 정권의 ‘살벌한’ 분위기 속에서 이를 보도하지 못했을 지도 모른다.

아무튼 전두환과 노태우는 ‘짜고 치는 고스톱’이긴 하지만 79년 12·12 쿠데타 식으로 극도의 보안을 유지한 채, 6·29 선언이라는 깜짝쇼를 바탕으로 그 해 12월 열린 대통령 선거에서 후보단일화의 여망을 져버린 김영삼 김대중 등 두 김씨를 누르고 집권을 5년 연장할 수 있었던 것이다.

21년이 지난 2008년 6월 16일 현재 촛불문화제로 불리는 새로운 정치혁명을 바라보는 이명박 대통령과 여권의 모습은 어떤가?

각종 보도를 종합해 볼 때 이명박 대통령은 아직도 사태의 본질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 같다. 이해한다고 하면서도 국민이 진정으로 무엇을 원하는지 또 촛불을 든 국민들이 얼마나 무서운지 잘 모르는 것 같다.

40일째 계속되는 촛불시위, 촛불혁명을 보고 있으면, 우리 국민은 무섭다! 촛불시위 촛불혁명은 21년 전 민중봉기 보다 훨씬 무섭다. 이명박 대통령은 조금 내 주고 적당히 넘어가려다 모든 것을 내주는 상황이 올 수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이명박 대통령은 이회창 자유선진당 총재를 만날 것이 아니라, 당시 성난 민심과 성난 국민들이 얼마나 무서운지 철저하게 경험한 전두환, 노태우 두 전직 대통령을 찾아가 조언을 구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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