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젊은 비평가들에게 전달되는 청탁서에는 보이지 않는 제약들로 빽빽하다. 청탁서는 부탁의 형식을 취하고 있지만 실은 무언가를 요구하는 청구서의 형태로 도착하기 마련이다. 영수증만큼이나 간결하고 은행 잔고에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않을 법한 박한 고료 사이엔 보이지 않는 무수한 바리케이트가 설치되어 있다. ‘제도’의 성문 안으로 들어가는 한정된 출입증을 얻기 위해선 보이지 않는 바리케이트를 그럴듯하게 넘어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매계절 부지런히 청탁 원고를 써도 글-쓰기와 삶-살기 사이를 가로막고 있는 바리케이트를 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다만 폐쇄적이고 근친적인 제도의 바리케이트에 자꾸만 걸려 넘어질 뿐이다. 청탁 원고를 쓴다는 것은 패배의 전적을 늘려가는 것과 다르지 않다. ‘성실하게 청탁 원고를 쓴다는 것’과 ‘패배를 무감각하게 만드는 것’이 등을 맞대고 있다.

그러니 청탁 원고의 핵심은 ‘청탁서’를 ‘결투장’으로 변주할 수 있는가에 달려 있다고 해도 좋다. 청탁서가 요구하고 강요하는 미션을 그럴듯하게 풀어내는 관성에 몸을 맡기는 것이 아니라 일견 상식적으로 보이는 ‘자신의 호흡으로 글을 쓴다는 것’(박진영 식으로 말해 ‘공기반, 소리반’), 이것은 ‘제도의 청구’를 거절하고 다른 파선(波線)을 만든다는 의미를 가진다. 상식을 관성적으로 받아들이지 않고 의문시함으로써 기꺼이 위험한 것으로 변주할 수 있는 자리가 바로 ‘비평’이 시작되는 지점일 것이다. 청탁서를 결투장으로 변주 하는 필자들은 꾸준히 있어왔다. 그러나 그들의 결투는 우리들의 결투가 되지 못하고 그들만의 결투로 귀결되기 일쑤였다. 제도와 싸웠고 그 싸움의 이력으로 교수가 된 후엔 더 이상 ‘비평’을 쓰지 않은 이들의 (잊혀진) 이름들을 나는 여럿 기억하고 있다. 제도의 청탁을 자신만의 결투로 이력화하지 않고 초대장으로 변주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일까? 내가 임태훈의 <우애의 미디올로지>를 읽으며 감지했던 시간의 결은 청탁서라는 씨앗을 결투장이라는 줄기로 키워 초대장이라는 열매를 맺게 한 결이었다. 변주하고 변용하기 위해 골몰한 흔적이었다.

청탁서를 초대장으로 변용하는 것은 그저 의지나 의도만으로 되는 것이 아니다. 기꺼이 몸을 끄-을-고(김영민) 제도 밖으로 나가 ‘너’에게로 다가서려는 노동, 바로 ‘접속의 능력’이 그 변용을 가능케 한다. 이 저작에서 임태훈이 시종일관 강조하는 ‘우애’는 ‘접속하는 능력’의 다른 표현일 것이다. 임태훈이 강조하는 ‘우애’를 나는 다음과 같은 삶의 조건 위에서 읽었다. 오늘날 한국 사회의 구성원들은 ‘버텨내는 것’과 ‘견디는 것’의 전략과 전술을 익히기에 여념이 없다. 자기계발 열풍은 얼핏 ‘성공신화’에 대한 갈망처럼 보이지만 실은 ‘지지 않는 것’을 목표로 한다(‘부러우면 지는 거다’라는 철지난 유행어의 출처 또한 이러한 문맥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그러니 우리가 빈곤과 싸우며 슬픔과 불안을 견뎌내는 것은 낙오(추방)되지 않기 위한 노력, 지지 않기 위한 노력으로 수렴되어 버린다. ‘지지 않는 것’이라는 기이한 생존의 전략이 ‘승리’의 감각을 대체해버린 것이다. ‘외로움’이 단지 개인이 극복해야할 정념의 문제가 아니라 정치의 조건(권명아)이라고 할 때 ‘고립’과의 싸움은 ‘지지 않는 것’이 아닌 만나는 것, 연대하는 것, 접속하는 것을 향해야 한다.

‘따로 또 같이’ 걷고 있는 이들이 모여 함께 걸으며 더 많은 사람들이 걸을 수 있는 의욕의 장소를 만들어내는 공리가 바로 임태훈이 말하는 ‘우애’다. 오직 더 많은 만남, 다양한 만남이 필요할 뿐이다. 새로운 ‘만남의 실험’만이 ‘고립’으로 귀결되는 자본제적 체계에 ‘자립’의 길을 뚫어낼 수 있는 동력일 것이다. 그 실험을 통해 우리는 ‘당신’이 ‘나’의 잠재력이라는 ‘공통의 몫/값’을 공평하게 나눠가지게 된다. 그러니 비평가들에게도 중요한 것은 ‘잘 쓰는 것’이 아니라 ‘잘 사는 것’이다. 잘 쓴다고 잘 살 수는 없는 법. 그러나 잘 살면 잘 쓸 수 있다. 자신의 삶의 호흡으로 쓴다면 말이다. 내가 임태훈의 저작에서 가장 선명하게 전달 받은 메시지는 그가 무엇보다 ‘잘 사는 것’에 큰 비중을 두고 있다는 것이었다. 임태훈에게 ‘잘 산다는 것’은 당연히 ‘웰빙’ 따위는 아니었고 ‘잘 만나는 것’, ‘잘 접속하는 것’이었다. 그 만남과 접속을 가능하게 하는 매개를 발명해내고자 하는 저자의 고투는 도발이나 재기 따위로 갈음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문학이냐 영화냐’라는 햄릿식의 과장된 고민이 아니라 접속사를 개발하는 전술서, 내게 <우애의 미디올로지>는 그런 전술, 전략 교본으로 읽혔다. 그래서 나는 이 책을 읽으며 자꾸만 누군가를 만나고 싶었고 골방 문을 박차고 거리로 뛰어나가고 싶은 충동에 사로잡히기도 했다.

2.
지금과는 다른 세계를 요청하는 것, 다시 말해 ‘다른 삶’이자 ‘다양한 삶’을 선택할 수 있는 권리에 대한 요구는 ‘공통적인 것’을 회복하고 ‘우리’라는 잠재적 능력을 발명하는 것이다. 자본제적 체계가 공고히 하는 사적 소유를 신화화 하는 시스템을 기각하는 운동이 필요하다. 예컨대 저작권(copyright)을 공유권(copyleft)으로 바꾸는 것, 사적 소유가 아닌 공통적인 것(the common)을 발명하는 것, 이것이 앞서 언급했던 (나의) 청탁서를 (우리의) 초대권으로 변용하는 능력이며 저자가 ‘미디올로지(mediology)’를 굳이 번역하지 않고 반투명한 상태로 내버려둔 까닭일 것이다. 그러니 임태훈의 <우애의 미디올로지>를 온당하게 읽는 방식은 개념적 의미를 깊게 파고들어 검증하는 것이 아니라 그가 공유한 수많은 개념들을 응용하고 변용하는 것일 테다. 임태훈식으로 말해 이 책을 또 다른 매개로 삼는 것, 이 책을 주어나 목적어가 아닌 접속사로 변용하는 것, 나는 그것을 ‘리믹스(remix)’라 부르고 싶다. 리믹스란 “이 노래에서 조금 훔치고, 저 노래에서 조금 훔치고, 심심하면 스크래치 한번 해주고, 뒤섞고 섞고, 베끼는”(김중혁, <비닐광 시대>) 얄팍한 재치나 재기가 아닌 “겁에 질린 몸뚱이”(11쪽)를 해방하는 접속의 능력을 개발하고 발명함으로써 ‘신체를 구하는 일’이다.

“누구라도 쉽게 접속할 수 있고 자유롭게 익히고 가르쳐 더 낫게 갱신시킬 수 있는 공공자산public domain으로서의 기술을 중요시하는 미디올로지”(10쪽)가 위기에 빠졌다는 저자의 상황 판단은 만남과 접속할 수 있는 조건이 통제된다는 것을 가리키며 그것은 곧 신체 능력의 말살로 이어진다. 이 책의 서문에서 접하게 되는 ‘전선’이란 바로 접속하는 신체의 능력이 말살당하는 상황을 가리키는 것이다. 만남이 통제되고 차단되어 있는 절멸의 조건 위에서 우리가 첫번째로 대면하는 것은 ‘대기’다(1장). ‘대지’가 아니라 ‘대기’라는 점을 주목하자. 대지는 자본에 잠식되었고 침윤되었다. 자본으로 뒤덮힌 대지는 무한히 열려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 열림은 자본의 지도이자 비전(vision)일 뿐이다. ‘세계화’란 만병통치약의 정체는 자본의 자가증식(중독)을 촉구하는 신약일 것이다. 아니 자가증식하는 바이러스이며 스스로 주인임을 자처하며 삶의 전 영역을 독점하는 암과도 같은 것이다. ‘만남’ 또한 자본의 지도 위에서만 이루어진다. 무수히 만나지만 만나지 못한다. 자본이라는 ‘매칭 메니저’ 없이는 그 어떤 만남도 가능하지 않다.

그렇다면 ‘대기’는 어떨까? 질서가 없는 대기에서 모든 것이 뒤섞인다. 무어라 명명할 수 없는 그런 만남들이, 어긋남이 교차하는 곳이 대기다. 이 명명할 수 없는 만남을 ‘우애’라 부르(변주하)기로 하자. 대기 위에서 맺었던 우애가 대지로 내려와 다른 만남과 접속의 방식들을 생성해낼 수 있을까? 아니 대지(ground)의 붕괴란 곧 근본이 무너졌다는 것을 가리키는 것이니 누가 누구인지 알 수 없는 상태라고 해도 좋겠다. 법과 질서 그리고 동일성이 와해 된 상황은 긍정적인 공동성과 부정적인 폭력이 동시에 출현하는 조건이 된다(사사키 아타루). 재난의 기표를 이행하고 접속하는 정동(affect)의 양식으로 변주하는 능력을 보라(“3.11은 재앙의 숫자이면서, 시대정신의 개안을 위한 공공 주파수다”, 32쪽). ‘미디올로지’란 ‘법’과 ‘근거(대지)’가 붕괴된 조건 위에서 출현하는 공동체의 조형 능력을 가리킨다. 그러니 이때 ‘우리’란 누구인가? 누가 누구인지 알 수 없는 상태, 바로 근본이 무너진 상태에서만 가능한 공동체가 아닐까. <우애의 미디올로지>는 비상상태 속에서 조형되는 ‘근본(원본) 없는 공동체’에 관한 책이다.

3.
그가 시종일관 ‘중요한 것은 주어가 아니라 접속사’임을 강조하는 것 또한 이 책이 ‘근본 없는 공동체’를 조형하는 전략/전술서의 의미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문제는 접속력이다. 임태훈이 강조하는 접속력이라는 어휘에서 내가 가쁘게 읽어낸 내용은 다음과 같다. 나와 당신이 피뢰침이라는 것, 그리고 곧 번개가 내려칠 것이라는 것, 우리는 만나서 다른 것이 되리라는 것. ‘우애의 미디올로지’란 청탁서를 초청장으로 변주하는 능력이자 재난 속에서 우애를 발명하는 능력이다. 다시 묻자. 우애란 무엇인가? 그것은 “정과 사랑을 강조하는 식상한 동어반복이 아니라, 서로를 향해 언제까지라도 ‘그리고’라 물을 수 있는 변화의 과정이다.”(279쪽) 그리고 변주하자. 우애란 “숨겨진 몸을 찾는 놀이”이자 우리들의 삶을 제약하는 조건 속에서 접속사를 발굴하고 공유함으로써 “뜻밖의 친구”(65쪽)들을 만나는 운동이다. 스테로이드를 통해 부풀려 놓은 성과주체의 근육/몸이 아닌 접속과 공명을 공리로 하여 다른 사람들과 세계를 공유함으로써 조형되는 ‘집합적 신체’.

그러니 ‘우애’의 요체는 ‘반복’이 아니라 ‘변주’라 하겠다. 새로운 우애를, 새로운 접속의 방식을 발명하는 것을 ‘잡다한 우애’를 조형하는 운동이라 바꿔 말하고 싶다. 절망과 재난의 리듬에 온몸이 감염되어 있는 지금, 임태훈의 <우애의 미디올로지>는 그 속박의 리듬을 뚫고 삶 속으로, 개개인의 호흡 속으로 들어와 우애의 리듬이라는 파선을 긋고 있다. 독점과 독식, 획일화 그리고 재난적 위협이라는 조건 위를 흐르는 잡다한 우애가 만들어내는 예측할 수 없는 에너지 플로우를 따라갈 때 다양성과 잠재성, 그리고 특이성이 어울리는 생태계와 조우할 수 있을 것인가. 나의 대답은 다음과 같다. 어서 이 책을 자르고 리믹스해서 다시 써라. 찢고 분해해서 이 책의 다음 버전으로 당신의 책으로 만들어라!1)

1) 마지막 문장은 저작권에 관한 전복적인 다큐멘터리 영화, 브렛 게일러의 <찢어라: 리믹스 선언 RiP: A Remix Manifesto>, 2009의 마지막 대목을 변주한 것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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