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월 5일 베네수엘라의 우고 차베스 프리아스 대통령이 서거하자 지난 이틀간 국내 언론도 이를 상당히 비중 있게 다루었다. 평소 미국이나 일본 외의 외신을 소상히 접하기 힘든 나라에서 베네수엘라라는 머나먼 이국이 이 정도 관심을 받다니, 차베스가 정말 인물은 인물이었던 것 같다.

물론 평소의 정치적 입장에 따라 평가는 크게 엇갈렸다. “신자유주의 극복을 바라는 전 세계 민중에게 영감을 던져준 지도자”라는 찬사가 있는가 하면 “죽을 때까지 집권하려 한(실제 그렇게 된 셈이다) 독재자”라는 힐난도 있었다. ‘진보’라 분류되는 매체에서도 “독재자”라는 표현을 주저 없이 사용했다.

이런 여러 평가들 중에서 필자가 보기에 가장 맥을 잘 짚은 것은 <프레시안>에 게재된 안태환의 글(“차베스, 남미의 ‘김일성’ 아닌 ‘전태일’!”)과 <참세상>에 올라온 원영수의 글(“죽어서도 불편한 차베스”)이었다. 이 두 글은 기본적으로 우고 차베스와 볼리바리안 혁명을 긍정적으로 평가하면서도 그를 둘러싼 여러 쟁점 또한 균형 있게 제시했다. 필자도 대체로 이와 같은 입장에서 차베스를 추념해보고자 한다.

원영수는 해당 글에서 차베스를 “문제를 해결하기보다 문제를 제기하고 갈등을 만드는 문제적 인간”이라 규정했다. 더없이 적절한 표현이다. 차베스는 ‘문제적 인간’이었다. 보통 이런 인간상이 다 그렇듯이 그 역시 일방적으로 존경하거나 무시하고 말 수 없는 복잡한 면모를 보였다.

가령 리비아의 가다피 같은 독재자들과 어울려 다닌 모습은 썩 보기 좋지 않았다. 미국에 반대한다고 해서 덮어놓고 동지이자 맹방으로 여기는 태도는 차베스를 지지하는 사람들 사이에서도 많은 비판을 받았다. 이런 모습은 그에게 따라 붙은 ‘독재자’의 이미지를 강화하곤 했다. 그런 그조차 유독 북한과는 거리를 두었지만 말이다.

차베스, 과연 ‘독재자’인가

하지만 이승만이나 박정희를 ‘독재자’라고 부르는 것과 같은 맥락에서 차베스를 그렇게 규정할 수 있는지에 대해서는 의문이다. 14년간 장기 집권한 게 중요한 근거가 되는데, 그렇게 따지면 ‘독재자’의 범주 안에 들어가야 할 정치 지도자들이 예상 외로 많아진다.

▲ 우고 차베스 (출처 : BBC)

프랭클린 루즈벨트도 차베스처럼 네 번 연이어 대통령에 당선되었고 13년간 권좌에 있었다. 마지막 임기를 시작하자마자 병마로 쓰러진 것 역시 닮았다. 그러나 아무도 그를 ‘독재자’라고 하지는 않는다.

더 극단적인 사례도 있다. 스웨덴 사회민주당의 타게 에를란더는 복지국가의 전성기이던 1940년대-1960년대에 무려 23년간 계속 총리로 있었다. 그러나 역시 그의 ‘독재’를 규탄하는 이야기는 들어본 적이 없다.

냉정히 보면, 이들의 위대한 개혁은 이러한 장기 집권 없이는 불가능한 면이 있었다. 뉴딜이 성공하고 스웨덴 복지국가가 굳건히 뿌리내린 데는 10년, 20년간의 긴 집권 기간이 분명 긍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혹 차베스는 이들의 교훈을 충실히 따랐던 게 아니었을까. 볼리바리안 혁명만 유독 이 교훈을 마다할 이유가 어디 있겠는가.

루즈벨트, 에를란더와 차베스 사이의 공통점만큼이나 주목해야 할 것은 차베스와 이승만, 박정희 사이의 중대한 차이다. 그것은 차베스가 매번 선거를 통해, 그것도 누구라도 ‘공정했다’고 평가하지 않을 수 없는 선거를 통해 집권했다는 점이다. 이 문제에 대해서는 베네수엘라 선거에 참관했던 전 미합중국 대통령, 지미 카터도 보증한 바 있다.

필자는 민주주의냐 독재냐를 가리는 가장 핵심적인 기준은 현 집권 세력에서 야당으로 정권이 교체될 가능성이 실질적으로 보장되어 있는지의 여부라고 본다. 적어도 이 기준에서 보면, 차베스와 그의 정권을 ‘독재’라 이름 붙이는 것은 맞지 않다. 베네수엘라 야권은 대선에서 선거 룰에 따른 집권 가능성을 충분히 보장받아왔기 때문이다.

작년 대선만 떠올려 봐도 그렇다. 이 선거에서 엔리케 카프릴레스를 야권 단일 후보로 내 45%까지 득표한 반차베스 진영이 자신들을 차베스 당선이 예정된 쇼의 들러리 정도로 보았다고는 도저히 믿을 수 없다. 룰은 살아 있었다. 그런데도 만약 차베스를 ‘독재자’라 불러야 한다면, 우린 ‘형식 민주주의를 충실히 따르는 독재자’라는 전혀 새로운 개념을 창안해야만 할 것이다.

볼리바리안 혁명이 ‘돌파’한 것들

‘차베스=독재자’론에 대한 반박은 이쯤 해두자. 우리의 관심은 단순히 그의 사후 명예 회복을 거들어주는 데 있지 않기 때문이다. 이토록 세계인에게 회자되는 그의 정치 행보에, 그리고 그가 앞장서 펼쳐놓은 볼리바리안 혁명에 과연 우리가 영감을 얻을 만한 성취가 존재하는지 확인하는 게 본론이다.

그런 성취는 존재하는가? 필자의 답은 ‘그렇다’이다. 차베스와 볼리바리안 혁명은 라틴아메리카, 아니 전 세계 좌파 정치의 오랜 난제들 몇 가지를 인상적으로 극복했다. 이것은 가령 1970년대 초반 칠레에서 벌어졌던 일과 차베스의 베네수엘라를 대조해보면, 명확히 드러난다.

40여 년 전 칠레에서 어떤 일이 있었던가? 1970년 대통령에 당선된 인민연합(사회당, 공산당 등 좌파 세력들의 연합)의 살바도르 아옌데는 구리 광산 국유화 등 급진적 개혁을 단행했다. 이에 맞서 국내에서는 기득권 세력이 들고 일어났고, 국제적으로는 미국이 파상 공세를 가했다. 당시 막 곳곳에서 군사 정권이 들어서고 있던 남미 상황에서 칠레는 너무 멀리 떨어져 있는 쿠바를 제외하면 고립무원이었다.

1972년에는 자본가 파업까지 일어났고, 보다 못한 노동자, 민중이 직접 전면에 나섰다. 정부를 지지하는 민중들은 공장에서 노동자 자주 경영을 시작하고 지역에서 주민 자치 조직을 만들며 자본가파업에 맞섰고 승리했다. 하지만 정부는 이러한 민중 권력 양상을 더욱 발전시켜 개혁의 원동력으로 만들지 못했다. 이런 상태에서 1973년 9월 11일 미국의 사주를 받은 군부 쿠데타가 일어나 3년간의 개혁 시도는 비극으로 끝나고 말았다.

이후 30여 년간 시장 지상주의가 라틴아메리카를 휩쓸었다. 이 기간 동안 칠레의 패배는 중남미 좌파 전체에게 고통스러운 상흔으로 남았다. 1999년 시작된 베네수엘라의 볼리바리안 혁명은 바로 이 아픈 경험이 증거한 두터운 장벽들을 ‘돌파’하며 역사의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 무엇을 돌파했는가?

▲ 차베스를 지지하는 베네수엘라 시민들

첫째, 차베스 정부는 군부 쿠데타를 이겨냈다. 칠레에서처럼 베네수엘라에서도 2002년 쿠데타가 일어났다. 하지만 칠레 인민연합 정부와 달리 차베스 정부는 무너지지 않았다. 물론 차베스도 쿠데타군에 사로잡혀 총살 일보직전까지 가는 수난을 당하기는 했다. 그러나 어쨌든 그는 살아남았다. 합법정부에 충성하는 진압군이 제때 도착해 그를 구했고 반군을 쉽게 제압했다.

다른 많은 요인들이 있었지만 무엇보다도 차베스 자신이 장교 출신이라는 점이 힘을 발휘했다. 군인 출신이라서 군부 독재자의 좌익판 정도로 항상 따가운 의심의 눈총을 받기도 했지만 군 내에 굳건한 지지 기반을 가진 덕분에 ‘1973년 9월 11일’의 악몽을 성공적으로 떨쳐낼 수 있었던 것이다. 차베스 자신의 말마따나 그의 정부는 “아옌데처럼 평화적이고 민주적”이면서도 “아옌데와는 달리 무장”하고 있었다.

둘째, 볼리바리안 혁명은 대중의 적극 참여를 원동력으로 하는 사회 개혁의 길을 개척했다. 칠레 아옌데 정부는 위기 시기에 정부를 지지하며 등장한 민중 권력 흐름과 안정적이면서 생산적인 연계를 맺는 데 실패했다. 반면 차베스 정부는 대중의 직접 참여를 사회 개혁 수행의 가장 중요한 요소로 보고 이를 국가기구를 통한 제도적 접근과 연결시키려 노력했다. 2002년 군부 쿠데타를 민중의 힘으로 물리치고 나서는 더욱 그랬다. 정부가 나서서 주민 평의회 결성을 장려했고 노동자 자주 경영 시도에 기회를 주었다.

사실 차베스 정부가 실시한 개혁의 주된 내용은 2차 대전 후 서유럽 사회민주주의 정당들이 추진한 바로 그것이었다. 무상의료, 무상교육, 즉 공공 복지 확대였다. 이런 점에서 차베스 정부가 내세운 ‘21세기 사회주의’라는 구호는 차베스 지지 논객들이나 야당이 주장하는 것만큼 야심차거나 불온한 것은 아닐지 모른다.

하지만 분명 중요한 혁신이 있었다. 사회민주주의적 내용의 남반구식 반복이라고 하더라도 이것은 지난 세기 북반구의 경험에 비해 “대중의 창의와 주도”가 훨씬 강조되는 사회민주주의였다. 선거 정치나 공무원의 활동에만 내맡겨진 익숙한 방식은 아니었다. 이것은 북반구의 앞선 나라들이 오히려 주목하고 배워야 할 성과였다.

셋째, 베네수엘라 좌파 정부는 베네수엘라 한 나라를 넘어선 변화의 힘을 만들어내는 데 성공했다. 한 세대 전 칠레 좌파 정부와 달리 이들은 외롭지 않았다. 운도 따랐고 그 운을 살려 내는 참신한 노력도 있었다.

차베스 정부가 쿠데타를 이겨낸 그 해에 브라질에서 노동자당의 룰라가 대통령에 당선되었고 잇달아 수많은 중남미 국가에 좌파 정부가 들어섰다. 1999년 차베스 정부의 등장이 라틴아메리카 전체의 ‘좌파 붐’의 시작이었음이 확인되는 순간이었다.

차베스는 이 절호의 기회를 십분 활용했다. 비록 변혁 노선의 차이는 있지만 브라질의 룰라 정부, 아르헨티나의 좌파 민족주의 성향 키르치너 정부와 적극 협력했다. 이 세 나라가 서로 연대하자 미국에 맞서는 강력한 대항력이 실체를 갖추게 되었다. 멕시코 이남을 통째로 복속시키려던 부시 정부의 ‘미주 자유무역지대’ 구상은 맥없이 무너졌다. 남미 대륙에 관한 한 미국의 개입력은 결정적으로 약화되었다.

이 기반 위에서 차베스 정부는 쿠바, 에콰도르, 볼리비아 등 급진 좌파 노선의 국가들과 ‘미주 볼리바리안 동맹(ALBA)’이라는 초유의 실험에 나섰다. 자본의 이익이 아니라 민중의 필요를 중심에 놓은 초국적 경제 협력과 통합 시도. 이것은 ‘신자유주의 지구화 반대’가 곧 ‘일국적 폐쇄주의’로 이해되던 상상력의 교착 상태에 신선한 파문을 던져주었다. 차베스가 이끌어낸 또 다른 거대한 돌파였다.

▲ 미국은 '악의 축'이고 자신들이 '선의 축'이라고 주장한 우고 차베스(베네수엘라), 피델 카스트로(쿠바), 이보 모랄레스(볼리비아).

세상의 수준을 높인 흔치 않았던 정치가

하지만 차베스 자신이 자주 인용한 칼 마르크스의 경구처럼, “역사는 인간이 만드는 것”이지만 “스스로 선택한 환경이 아니라 이미 존재하는, 주어진, 물려받은 환경 아래서” 만드는 것이다. 지난 역사를 극복하려는 사회 변혁 시도들 역시, 역설적으로, 역사의 업보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 볼리바리안 혁명 역시 마찬가지다.

‘석유’에 대해서는 이미 많이 이야기되었다. 차베스 정부가 베네수엘라의 석유 자원에 크게 의존한 것은 사실이다. 어쩌면 차베스 정부가 아옌데 정부에 비해 성공할 수 있었던 가장 큰 이유는 ‘석유’와 ‘구리’의 차이에 있었던 것일지 모른다. 석유 판매자가 누릴 수 있는 교섭력이 후자에 비해 전자가 보인 강점의 상당 부분을 설명한다.

하지만 볼리바리안 혁명이 언제까지 이것을 마냥 ‘이점’으로 누릴지는 알 수 없다. 석유 의존 경제 구조는 언젠가 필연적으로 더 이상 ‘이점’이 아닌 ‘한계’로 베네수엘라의 미래를 내리누르게 될 것이다. 자원 수출에 의존하는 경제는 반드시 새로운 자립 경제로 전환되어야 한다.

물론 차베스도 이것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시간은 그의 편이 아니었다. 이제는 차베스 없이 베네수엘라 민중이 이 숙제를 풀어나가야 한다.

또 하나 결정적인 역사적 제약은 베네수엘라의 취약한 국가-시민사회 구조다. 차베스 등장 이전에 거대 정당들은 모두 부패해 있었고 노동조합은 철저히 소수 노동자의 경제적 이해만을 좇았다. 새로운 사회를 꿈꾸는 이들이 기댈 만한 조직이라곤 거의 없었다.

그래서 사람에게, 한 사람에게 지나치게 의존하지 않을 수 없었다. 과거에 아르헨티나에서 후안 페론이 그랬고 이집트에서 자말 압델 나세르가 그랬던 것처럼, 베네수엘라에서는 그 사람이 차베스였다.

이 문제에 대해서도 차베스는 충분한 경각심을 갖고 있었던 것 같다. 이를 극복하려던 그의 결정적 시도가 2007년 새 여당 조직 ‘통합사회주의당’의 창당이었다. 다행히 이 시도는 너무 늦지는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차베스가 쓰러졌음에도 불구하고 노동운동가 출신인 니콜라스 마두로 부통령이 비교적 안정적으로 그의 뒤를 잇고 있는 것을 보면 말이다.

아무튼 이제 그는 가고 없다. 많은 논란도 있고 애증도 있지만 그가 있음으로 해서 어쨌거나 세상의 고민과 토론은 그의 등장 전보다 수준이 높아졌다. 신자유주의에 대한 패배 의식에 짓눌려 있던 개혁가들은 화들짝 놀라 깨어나야만 했고 지난 세기의 책들만 붙잡고 있던 혁명가들은 이제 기성 민주주의 틀 안에서 출발하면서도 이를 넘어서는 새로운 전망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하지 않을 수 없게 됐다.

이렇게 세상의 수준을 조금이라도 높여 놓는 사람들은 그렇게 많지 않다. 하물며 정치인은 말이다. 하지만 차베스는 분명 퇴장보다는 등장으로 세상에 더 많이 기여한 흔치않은 정치가였다.

그러니 우리는 지금 이 순간 마땅히 그를 추모하고 경의를 표해야 한다. 그의 친구도 비판가도, 동지도 적도, 모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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