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월 24일, 아카데미 시상식이 있었다. 믿음과 공존의 ‘이야기’, <라이프 오브 파이>의 작가 이안은 감독상을 수상하였다. 이견의 여지없이 <라이프 오브 파이>는 매혹적인 영화다. 이 영화는 ‘이야기’의 가능성을 묻고 있을 뿐 아니라, 3D 시각효과의 쓰임을 전환하며 그 ‘이야기’를 이미지와 효과적으로 접목시켜, 영상 서사매체로서 ‘영화’의 가능성을 증명하고 있다. 그래서일까. <라이프 오브 파이>는 지난 1월 1일, 국내에서 개봉한 후, 평단의 전적인 지지와 열광을 획득했다. 나 역시 이 영화가 장인의 솜씨로 세공된 진품이란 사실에 동의한다. 이것은 이야기에 관한 황홀하고 찬연한 ‘우화’다. 그렇기에 이 영화를 ‘이야기’로서 존중하는 영화평을 이미 미디어스 지면을 통해 제출하였던 것이다. (“영화 라이프 오브 파이, ‘이야기’에 관한 이야기”) 하지만, 그러면서도 극장 좌석에서 영화와 대면하는 동안, 스며들 듯 틈입한 일말의 석연찮음에 눅눅한 기분을 느꼈다.

 

지금껏 읽어 본 비평 중에선, 문학평론가 신형철만이 내가 작성한 비평과 일정부분 비근한 결론을 제출하며, 짤막한 단서를 붙이듯 영화에 대해 이견을 남겼다. (시네21, [신형철의 스토리-텔링] “어떤 이야기가 더 마음에 드십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영화에 깔려 있는 저 불굴의 실용주의가 전적으로 올바른 것인가에 대해서는 더 따져봐야겠다는 생각을 했고, 그래서 소설가나 직원들의 선택에 선뜻 동조하지 못하겠다는 생각을 하는 중이다…”) 우리가 이 ‘이야기’의 가치를 논하며, ‘믿음’을 강화하는 동안, 그 후면에서 무언가 몰각되고 있지는 않은가. 미소하고 옅은 의구심을 지우기 힘들었다. 결국, 지금껏 거론되지 않은 또 다른 관점을 관객에게 제공 해야겠다 결심했다. 그것이 느지막이 이 영화를 재론하는 이유다.

<라이프 오브 파이>는 두 가지 판본의 서사를 가진 영화다. 뱅골 호랑이 리차드 파커와 소년 파이의 공존으로 엮인 환상적인 표류의 서사. 그리고 구명보트에 동승한 인간 들 사이, 죽고 죽이는 살육으로 점철된 참혹한 생존의 서사. 영화는 믿을 수 없을 만치 신비한 표류기로 관객을 초대한 후, 서사의 마지막에 이르러 그 진위를 스스로 뒤흔든다. 그리고 리차드 파커가 등장하지 않는 또 다른 판본을 제시하고, 관객에게 묻는다. 이 상처뿐인 이야기와 아름다운 이야기 중, 당신은 어떤 것을 택하겠습니까. 혹은 황폐하고 짓무른 ‘현실’과 애잔하고 감동적인 ‘이야기’ 중 어떤 것을 원하십니까.

영화는 잠정적인 결론을 제시하며 두 개의 열린 결말이 하나로 수렴되도록 덮개를 고정시킨다. 파이의 두 이야기를 모두 전해들은 캐나다인 작가와 보험회사 조사관들은 하나같이 ‘리차드 파커’의 이야기를 택한다. 그리고 그 선택의 대전제는 과거의 복원 불가능성이다. “이미 벌어진 일에 무슨 의미가 필요하죠?”. “두 가지 이야기 중 어떤 걸 택해도 난 인도를 떠나 가족을 잃고 고통 받아요. 그렇다면 둘 중 어떤 이야기가 마음에 드나요?” 만약에, 캐나다인 작가와 보험회사 조사관들이 잔혹한 생존의 판본을 알지 못했더라면, 리차드 파커의 판본을 선택하지 않았을 것이다. 아니, 선택했다 하더라도 결코 그 거짓말 같은 ‘이야기’를 ‘믿지’는 않았을 것이다. ‘이야기’는 그 질료 같은 ‘현실’ 속에서 안출되고, 현실과 마주볼 때 비로소 그 가치와 믿음을 증식한다.

 

하지만. 나는 이 이야기에 관한 또 다른 ‘해석’을 가지고 있다. 내가 제시할 새로운 '해석'의 요는 영화 내 하위서사를 낱낱의 이야기가 아닌, 구조로서 파악하는 것이다. 판타지와 현실, 두 가지 판본 중 어느 하나를 취사 하는 것이 아니라 아울러서 취합하는 것이다.

 

먼저 파이의 고향, 폰디체리에서부터 논지의 물길을 터야 한다. 폰디체리는 오랫동안 프랑스령 식민지였다. 1673년부터 영국과 프랑스 등의 사이에서 통치권이 오가다, 1814년 비엔나 협약에 의해 프랑스에 완전히 종속되고, 1954년 인도에 반환된다. 파이 역시 식민지 폰디체리의 해방과 함께 세상에 태어났다. 파이의 아버지가 운영한 동물원도 폰디체리의 해방과 함께 건립된 것이다. 눈 여겨 봐야 할 것. 영화의 도입부 내내 이 식민지 폰디체리의 지배국, '프랑스'의 이미지들이 선경仙境처럼 낭만적으로 펼쳐진다. ‘인도인’ 마마지의 인생관을 바꾼, 깨끗한 영혼을 얻기 위해선 방문해야 한다는, 프랑스 피신몰리토 수영장의 맑고 청아한 동화 같은 풍경. 수로를 경계로 반으로 나뉜, 폰디체리의 프랑스 지구 역시 아주 화사하게 묘사된다. 폰디체리의 나머지 반. 인도 지구와 거의 노골적으로 대비될 정도로.

파이와 함께 표류한 침춘호의 주방장이 프랑스인이란 점 역시 기억해둬야 한다. (프랑스 배우, 드파르디유가 연기했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영화의 리차드 파커 판본은 곧 주방장이 등장하는 현실의 판본이다. 둘은 서로의 변주지만 동일한 근거에 둥치를 틀고 서로와 대응하고 있다. 아주 간단하고 이해하기 쉽게 설명해보자. 파이는 인간들 간의 살육과 가족의 죽음이란 괴로운 ‘현실’을 감당할 수 없었다. 그래서 혼자만의 표류기에 리차드 파커를 등장시켰다. 그 현실을 '이야기'로 가공하여 그 속에서 거류하며 현재를 버텨나간 것이다.

그렇다면 리차드 파커 판본을 현실의 판본으로 변환해보자. 하이에나는 주방장, 오랑우탄은 파이의 엄마, 얼룩말은 행복한 불교신자 선원이다. 즉, 침춘호가 침몰하면서 하나의 구명보트 (하나의 세계 혹은 공동체)에 프랑스인(제국주의 지배자)과 동양인과 인도인(제3세계 식민지)이 동승한 것이다. 하이에나가 얼룩말(동아시아)을 죽이고, 파이의 엄마(인도)의 목숨을 뺏은 것은, 제국주의 식민시대의 은유라고 볼 수 있다. 주방장을 죽인 후 홀로 표류하게 된 파이의 운명은 곧 해방 이후의 폰디체리, 혹은 제 3세계의 운명이라고 해석 가능하다. 물론, 이것은 도식적인 수준의 대입이지만, 이렇게 해석할 수 있는 유인은 분명하다. 이 영화엔 서로 다른 언어 간 위계가 설정돼 있다. 파이와 가족들은 거의 모든 장면에서 영어로 대화한다. 하지만, 어린 파이가 리차드 파커와 대면하는 장면에서, 파이의 아버지는 동물원 잡부에게 현지의 토속어(아마도 타밀어)로 명령한다. 그리고 침춘호에서 파이의 부모는 프랑스인 주방장과 프랑스어로 언쟁을 벌인다. 마찬가지, 일본은 제국주의 열강이었지만, 불교신자 일본인 선원이 배정받은 유순한 캐릭터와 하이에나-얼룩말의 먹이사슬에 잇대어보면 그를 동아시아 식민지 전반으로 치환할 수 있다.

내가 묻고 싶은 것은 시련과 맞닥뜨린 매 순간, 파이의 선택이 무엇이었냐는 것이다. 리차드 파커 판본을 보자. 파이는 하이에나(프랑스인 주방장)가 구명보트에서 모습을 드러냈을 때도, 얼룩말을 물어 죽일 때도, 오랑우탄(엄마)를 살해할 때도, 아무런 결단을 내리지 못한다. 오로지 보트의 반을 뒤덮은 가림막(파이가 거주하는 자아의 공간)으로 피신해 손을 내저으며 외마디처럼 소리 지를 뿐이다. 안 돼! (NO!) 보트에는 분명히 커다란 노가 있었다. 파이는 그 노를 들고 하이에나와 싸울 수도, 노를 저으며 삶(바다)에 저항 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파이가 한 일 이라곤 하이에나가 나타나자마자 그 노를 엮어 간이 뗏목을 만드는 것이었다. 자신의 고난과 그 타개를 운명의 흐름에 맡기며 투신하는 것.

 

파이는 참상의 엄습을 오로지 방관한 끝에, 결국 자신 안의 충동(리차드 파커)을 이겨내지 못하고 주방장을 잔혹하게 살해해버린다. 그리고 환상의, 아니, 허구의 서사를 작성하여 그 속에서 거류하며 고통과 상처를 매립하는 것이다. 리차드 파커와의 동행 속에서 ‘신’의 존재를 묻고, ‘믿음’을 모색하며 스스로를 지탱하는 것이다. 이런 방향에서 본다면, <라이프 오브 파이>의 주제는 명징하다. 믿음의 가치와 의미는 무엇인가. 혹은 믿음은 무엇을 위해 복무해야 하는가. 우리는 삶의 질곡을 건너며 모질고 냉담한 생의 모서리 여기저기를 스치고 부닥친다. 남루히 헤진 상처와 누더기처럼 덧댄 흉터를, 지울 길 없는 문신처럼 새겨도, 우리의 삶은 돌이킬 수 없는 과거가 아닌, 현재를 위해 존재한다. 그렇게 파이는 삶을 존속시키기 위해 이야기를 믿고, 신을 믿고, 리차드 파커를 애도하며 과거와 상처를 퇴색시킨다. 이야기는 혹은 믿음은 그렇게 존재를 위해 복무해야 한다. 영화의 마지막, 파이의 대사에 이 모든 주제가 간결하게 함축돼 있다. "이미 벌어진 일에 무슨 의미가 필요해요?" 마찬가지, 이것을 '신앙'에 관한 영화의 태도라고 볼 수 있다.

 

나는 이러한 영화의 철학이 신앙과 이야기로부터, 개별의 존재가 참고할 인격적 지침이라면 동의할 수 있다. 하지만, 분명히 기억해야 할 건, 이 ‘이야기’가 비롯된 구조적 배경이다. 파이의 고난은 식민지 해방 이후, 폰디체리의 현실로부터 시작되었다. 파이 아버지의 동물원은 폰디체리의 해방과 함께 건설되고, 해방 이후의 사회가 난관에 봉착하면서 철거된다. 그리하여 파이의 가족은, 새로운 삶을 찾아 ‘콜럼버스의 항해’를 감행한 것이다. 그렇다면, 이런 역사적이고 시대적인 고난 속에서 삶과 미래를 수호하려는 우리들의 결단은 무엇이어야 할까. 파이처럼 모든 시도를 방기하고 주저하다, 돌이킬 수없는 사태가 벌어진 후, '믿음'과 '이야기'에 고통을 맡기고 현재를 정당화 하는 것일까. "이미 벌어진 일"에서 우리는 정말 아무런 의미도 찾아 낼 수 없는 것일까. 어쩌면 그것이야 말로 역사와 과거의 ‘실재’로부터 교훈을 방기하며, ‘이야기’의 가능성을 좁히는 오류는 아닐까.

<라이프 오브 파이>는 일견 배척하는, 서로 다른 것들의 모티프를 진열하며 '공존'을 얘기한다. 충동도 자아도, 영성도 이성도, 이야기도 현실도. 거센 폭우가 몸부림치는 바다 위에서 공존의 숙명을 확인하고, 그 고난의 파도가 물러간 후, 서로 다른 것들의 공간은 하나로 통합된다. (보트의 반을 덮고 있던 가림막이 완전히 벗겨진다.) 하지만, 영화 속에서 그 공존의 이상향은 파이의 잃어버린 낙원, 동물원이다. 동물원이란, 결국 누군가의 '조정'을 필요로 하는 사육의 공간이다. 이것을 완전하고 자유로운 공존이라 얘기할 수 있을까. <라이프 오브 파이>는 결국엔 조난당한 보트위에서 서로가 죽고 죽이며 철저하게 공존에 실패해버린 서사다. 그렇기에 두 가지 판본을 아울러 독해했을 때, <라이프 오브 파이>는 공존을 위한 현실의 시도를 방기한 후, 상상을 통해 작성한 공존의 서사에 안온히 파묻힌 채, 공존의 가치를 설파하는 이상한 영화가 되어버린다. 나는 선망과 동경에 찬 시선으로 재현된 피신몰리토의 이미지가 마음에 걸린다. 오리엔탈리즘의 뉘앙스가 질척하게 배어있는 오프닝의 동물원 시퀀스 역시 마찬가지다. 이것은 과연 누구의 시선으로 바라 본 이야기일까. 우리는 우리를 고통으로 몰고 간 것들과 그렇게 쉽게 공존을 말하고, 숙명처럼 합일을 얘기해도 괜찮은 것일까.

영화의 마지막에서 관객은 선택을 해야 한다. 이 열린 결말의 형식이야 말로, ‘이야기’로서 <라이프 오브 파이>의 매혹을 생성하는 분화구와 같은 것이다. 조난당한 소년과 뱅골 호랑이의 신비로운 표류기. 혹은 살육과 고통이 넘실거리는 절망의 생존기. 어떤 것을 택할 것인지는 관객에게 달려있다. 그리고 여기 <라이프 오브 파이>에 관한 또 다른 '해석'이 있다. 나는 이 아름다운 ‘이야기’의 이면 역시 한번쯤은 들추어 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현재의 삶을 지향하는 믿음과 공존의 우화인가. 과거에 대한 성찰을 방기한 실패한 공존의 환영인가. 선택은 당신에게 달렸다.

 

필자> 일상과 세상의 경계를 모로 걸으며, 조심스레 두리번대고 글을 쓴다. 사회, 문화, 정치의 단층을 채집하여 살펴본 이면의 수런거림들을 블로그(blog.naver.com/yke0123)에 편철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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