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안하다, 불안하다, 불안하다! 위기를 모면하기 위해 사실이 아닌 거짓을 말하는 순간, 위기는 해소되지 않고 불안감은 더욱 증폭된다. 임시방편의 미봉책도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거짓을 말하는 사람의 불안감을 지워주지 못한다. 사람 사는 세상의 상식이 이러하기에 대다수의 평범한 사람들은 정직하게 살기 위해 노력한다. 도덕적이고 윤리적인 흠결이 있거나 상식에서 벗어난 행동을 한다면 아무리 능력이 뛰어난 인물이라도 사회적 지탄의 대상이 되는 것이다. 그것이 두렵기 때문에 끊임없이 거짓을 말하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였을까? '진실'을 말하지 않는 정부와 소통하기 위해 한 달 넘게 꺼질 줄 모르는 '촛불 정국'에서 '여대생이 닮고 싶은 여성 1위' 자리를 몇 년째 지키고 있는 유명 아나운서의 비밀과 거짓을 다룬 KBS 2TV 미니시리즈 <태양의 여자>(김인영 극본, 배경수 연출)가 예사롭지 않게 보인다.

평범한 사람들에게 용기를 북돋워주는 프로그램 진행자로 능력을 인정받는 아나운서 '신도영(김지수 분)'은 부모가 사업에 실패하면서 고아원에 맡겨졌다가 교수 부부의 집안으로 입양되어 성장한 여성이다. 결혼 10년이 지나도록 아이가 없어 고아원에서 입양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교수 부부는 딸을 출산하게 되고 이후 신도영은 언제 자신이 내몰릴지 모르는 불안감에 휩싸인다.

▲ KBS 미니시리즈 <태양의 여자> ⓒKBS
그리고 결국은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5살짜리 동생 '신지영(이하나 분)'을 서울역에 버리고 혼자 집으로 돌아와 동생이 누려야 할 행복을 독차지한다. 지극 정성으로 좋아했던 언니에 의해 버림받고 고아원에서 '윤사월'로 어렵게 성장한 '신지영'은 생동감 넘치고 낙천적인 성격으로 자신의 삶을 개척한다.

엄마와 아빠 그리고 언니와 함께 즐거운 시간을 보냈던 기억을 어렴풋이 가지고 있는 윤사월은 언젠가 반드시 가족을 만날 수 있으리란 믿음을 가지고 있다. 타고난 패션 감각과 비상한 기억력으로 백화점 명품관 VIP 코너의 퍼스널 쇼퍼(Personal Shopper)로 취직한 윤사월이 신도영을 만나면서 서서히 드러나는 유년 시절의 기억, 그리고 고아원에서 함께 자란 홍콩의 태권도 사범 '차동우(정겨운 분)'와 고아원 후원자였던 의사의 아들 '김준세(한재석 분)'를 다시 만나면서 윤사월은 작열하는 태양 같은 운명에 직면하게 된다.

한편 입양한 딸 때문에 친 딸을 잃어버렸다고 생각하는 어머니 '최정희(정애리 분)'는 지영이를 찾기 위해 동분서주하면서도 도영이를 향한 의심의 시선을 거두지 않는다. 최고의 인기를 구가하는 성공한 아나운서라는 화려한 삶 이면에 동생을 버린 비밀과 죄의식에 사로잡혀 불안해하는 신도영의 이중성은 언제 발각될지 모르는 아슬아슬한 긴장감을 유발시킨다. 출장지 홍콩에서 만난 태권도 사범 '차동우(정겨운 분)'가 신도영의 얼굴에 감도는 불안감을 포착하고 건네는 "내일을 위해 오늘을 죽이며 사는 것 같아요! 그럼 내일은 행복할까요?"라고 말은 드라마 <태양의 여자>의 주제를 잘 보여준다.

누군가 알고 있는 비밀을 갖고 사는 사람의 삶은 불안한 긴장의 연속일 수밖에 없다. 비밀을 숨기기 위해 거짓말을 하거나 또 다른 비밀을 만들어야 하기 때문이다. 거짓말과 비밀은 주변 사람들과의 소통을 방해하고 인간관계를 황폐하게 만든다. 성공한 아나운서 신도영이 '행복'을 느끼며 눈물을 흘리는 이유는 바로 자신의 행복이 비밀과 거짓말로 이루어진 것임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비록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았다 하더라도 자신의 행복을 지키기 위해 동생의 인생을 망가뜨리는 것은 결코 용서받지 못할 일이다. <태양의 여자>는 이렇게 두 여자의 엇갈린 운명을 통해 욕망의 말로와 용서의 진정성을 이야기하고 있는 드라마이다.

▲ ⓒKBS
<태양의 여자>는 비밀과 거짓으로 점철된 인생은 아무리 성공한 인생이라 해도 결코 행복할 수 없음을 잘 보여주기 위해 두 가지의 이중적인 극적 장치를 사용한다. 첫째는 등장인물의 이중성이다. 신도영은 천사와 악마가 공존하는 이중성을, 윤사월은 신지영이 아니라 윤사월로 살다가 다시 신지영으로 돌아오는 이중성을 가지고 있다.

둘째는 구조적인 이중성이다. 신도영이 진행하는 <원더우먼 쇼>는 실의에 빠져 있는 사람들을 격려하고 용기를 북돋워주는 '리얼 다큐' 프로그램이다. 아무리 '리얼리티'를 강조한다하더라도 '촬영'과 '편집' 과정에서 어느 정도 윤색될 수밖에 없는 것이 텔레비전 프로그램이다.

그런데 대부분의 평범한 시청자들은 '리얼 다큐' 프로그램의 리얼리티를 그대로 받아들이는 경향이 강하다. <원더우먼 쇼>는 텔레비전 프로그램의 특성을 통해 비밀과 거짓말로 이뤄진 신도영의 인생을 암시하는 극적 장치로 <태양의 여자>의 구조적인 이중성을 잘 보여준다.

등장인물과 구조 외에도 '입양'과 '출산', '과거'와 '현재'와 같은 소재들도 비록 여타의 드라마에서 반복적으로 사용되어 진부한 측면이 있긴 하지만 진정한 행복의 의미 모색이라는 주제를 구현하기 위해 효과적으로 사용되면서 드라마의 완성도를 높여주고 있다.

그리고 개인적인 능력과 상관없이 비밀과 거짓말로 점철된 인생의 불안감에 사로잡힌 신도영이라는 등장인물의 이중성을 절묘하게 표현하는 배우 김지수의 연기력도 볼만하다. 다만 차별화되지 않은 유년 시절의 비슷한 장면들이 반복적으로 사용되거나 과거와 현재가 지나치게 교차하는 장면 구성은 극적 긴장감을 떨어뜨리는 원인이 될 수 있다.

또한 김준세와 차동우와 같은 남성 등장인물들을 신도영과 윤사월의 극적 상황을 보여주기 위해 기능적으로 사용하는 것도 재고할 필요가 있다. 그리고 윤사월의 톡톡 튀는, 하지만 정형화된 성격은 진실이 밝혀진 이후의 반전을 이끌어내기 위한 설정으로 보여 매력적으로 보이지 않는다. 반전의 강박에서 벗어날 필요가 있다.

<태양의 여자>의 주인공 신도영은 순간의 위기를 모면하기 위한 비밀과 거짓말이 어떻게 파국을 맞이하는지 잘 보여주는 등장인물이다. 누구에게나 비밀이 있으며, 때로는 악의 없이 거짓말을 하기도 한다. 그것이 삶이다. 하지만 도덕적이고 윤리적으로, 그리고 다른 사람의 희생을 강요하면서 획득한 성공은 결코 행복할 수 없다.

"이제 와서 모든 걸 고백하기엔 너무 많은 시간이 흘렀어!"라는 신도영의 독백은 자기 자신을 합리화하기 위한 것에 불과하다. "늦었다고 생각할 때가 가장 빠른 것"이라는 말처럼 결정적 순간에 자기 반성의 기회를 놓치는 어리석음을 범해서는 곤란하지 않을까?

비밀과 거짓말, 그리고 불안감은 동급이다. 만약 지금 이 순간 불안감을 느낀다면, 그것은 분명 정직하지 못하다는 반증일 것이다. 비밀과 거짓말의 신뢰 상실이 만들어낸 '촛불 정국'에서 정통 멜로드라마를 표방한 <태양의 여자>가 예사롭지 않게 보인다면 지나친 억측일까?

윤석진 교수는 2000년 여름 한양대에서 <1960년대 멜로드라마 연구-연극·방송극·영화를 중심으로>로 문학박사 학위를 취득하고 2004년 가을 <시사저널>에 '캔디렐라 따라 웃고 웃는다'를 발표하면서 드라마평론 활동을 시작했다. <김삼순과 장준혁의 드라마공방전> <한국 멜로드라마의 근대적 상상력> <한국 대중서사, 그 끊임없는 유혹> 등의 저서와 <디지털 시대, 스토리텔러로서의 TV드라마 시론> <극작가 한운사의 방송극 연구> 등 다수의 논문이 있다. 현재 충남대 국문과에서 드라마 관련 전공 과목을 강의하면서 한국 드라마의 영상미학적 특징에 대해 연구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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