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시간대가 끊어졌습니다.

산업화 아버지들과 민주화 삼촌들이 주인이던 '당신들의 대한민국'은 사라졌습니다.

원래 '세대론'에 의지하여 뭔가를 설명하는 방식 후지다고 생각했는데, 따라하면서 배운다고 이번 촛불집회를 얘기하는 방식들에 볼멘소리를 하다 보니 자꾸 나도 모르는 사이 정형화된 법칙들에 갇히게 됩니다. 동생들 말대로 하면 스멀스멀 '꼰대'가 되는 거겠죠.

정보화된 한 개인(안단테라는 동생입니다)의 '청원'에서 시작된 '우리들의 대한민국'은 100만 불빛의 황홀한 스펙터클로 유쾌하게 시작했습니다. 맞습니다. 이제 ‘시작’일 뿐입니다. 제가 ‘시작’임을 강조하는 것은 6월 10일은 100만이라는 규모라는 ‘정치’가 아니라 시작이라는 '상징'으로 기억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하나의 시간대가 끊어지고 전혀 다른 시간대가 시작됐습니다.

▲ 10일 저녁 세종로 네거리에서부터 시청 앞 태평로, 남대문 넘어까지 50만 시민이 함께 촛불을 들었다. ⓒ서정은
이런 상황을 두고 '정보화 사회의 본격 도래' 같은 설명이 많습니다. 사실 그 표현은 엄숙한 교과서의 설명과 만연한 체험 사이의 괴리 때문이었는지 한 달 전까지만 해도 별다른 감흥 없이 고루하게 읽히던 문맥이었습니다. 그리고 중요한 것은 ‘정보화 사회’가 도래했다는 누구나 아는 사실이 아니라 왜 갑자기 새로워졌는지 인데, 아직 그렇게 속 시원한 분석은 나오지 않고 있습니다. 십수 년간 대세이면서도 항상 열등한 것이었던 '디지털'이 어떻게 갑자기 모든 굴곡을 끊어낼 수 있었는지, '아날로그'의 파워를 당연시여기며, 비상식의 지배를 우월한 것으로 이해하던 굴종의 태도는 어디에서부터 비약할 수 있었는지 여전히 궁금합니다.

어찌되었건, 중요한 점은 체제와 질서가 완전히 달라졌다는 것입니다. 이 시간 사회를 운영하는 가장 강력하고 체제이자 일상적인 질서는 정보'화'입니다. 정보‘화’는 조직‘화’보다 민주적이고 의식‘화’보다 상식적이고 위계‘화’보다는 평화적이란 점에서 독보적인 체제와 질서로 오랫동안 자리매김할 수 있을 듯 합니다.

이렇듯 지난 한 달여간 '디지털'은 행동하는 상식의 위력을 유감없이 선보이며, '아날로그'의 낙후성을 몰상식으로 만들었습니다. 압도적으로 이별해 버렸습니다. 산업화 시대의 신화였던 이명박은 쥐로 박제되었고, 87년 6월 항쟁을 주도했던 정치세력 마저 거리에 발을 붙이지 못하게 했습니다.

'디지털'의 열정을 치기 혹은 괴담으로 몰아붙이던 조중동은 광고주들을 향한 익명의 전화 벨소리에 생사여탈권을 빼앗긴 채, 게릴라들이 던지는 쓰레기에 오늘도 대문이 묻히지는 않을까를 걱정하는 처량한 신세가 됐습니다.

저의 선생님이었던 운동권 선배들 역시 겨우 귀퉁이에 겨우 자리를 잡았을 뿐입니다. "물류를 멈춰 세상을 바꾸자!"는 치명적인 슬로건으로 우리를 이끌었던 화물연대의 파업은 멈춰 선 물류와 결의에 찬 팔둑의 움직임이 아닌 네트워크의 유기적 질주와 지지를 클릭하는 손가락 여부에 명운이 걸려있습니다. 대운하 삽질을 중단시키고, 민영화 흐름을 돌려 세우고, KBS를 향한 표적 감사를 순식간에 포위해 버린 장면에서 새로운 경이를 느낀 이가 저만은 아닐 겁니다.

2. '당신들의 대한민국'의 풍경

급소를 강타당한 조중동은 희미해져가는 의식으로 다리가 풀려가지만, 분함과 비감으로 쓰러지지 못하고 있을 뿐입니다. 미래 세대 자체를 적으로 만들어 버린 그들은 어느 순간 도저히 이길 수 없으리라는 공포에 모든 것이 잠식당하면 마지막 사자후를 토하고 ‘걍 아웃’ 될 겁니다.

지상파들은 몸집이 둔해서인지 시간대의 변화 자체를 따라가지 못하고 있습니다. 마음씨 좋은 아저씨처럼 9시 땡 치면 '여러분 안녕하십니까?'라고 안부를 묻는 익숙함으로 버티고 있을 뿐입니다. 그 보다는 사정이 훨씬 나은 한겨레, 경향 역시 이제 겨우 '당신들의 대한민국'이 망한 이유에 대해서 꾸역꾸역 말하고 있을 뿐이라는 점에서 위태로워 보이긴 매한가지 입니다.

평소 입버릇처럼 언젠가 분명히 시간대가 끊어질 거라 말해왔던 숱한 선생님들 역시 타이밍을 몰랐는지 헤매고 있기는 마찬가지입니다. 어느 블로거의 말처럼 지식인은 원래 대중의 스펙터클 앞에 한 없이 매혹당하는 약한 존재일 뿐인가 봅니다. 아직은 6월 10일의 스펙터클을 추켜세우는 성의 없는 강의로 대충 품위를 유지하고 있지만 얼마나 끝까지 품위를 지킬 수 있을지는 모르겠습니다.

3. '우리들의 대한민국'을 향한 질문

오늘로써 역사에 기록될 하루로부터 사흘이 지났습니다. 지난 사흘은 축제에 관한 무용담을 말하는 재미로 시간 가는 줄 몰랐습니다. 그러나 조금씩 초조해지는 기색들이 역력합니다. 축제에 관한 무용담에서 제일 인기 있는 레퍼토리가 끊어져버린 시간대에 대한 현기증과 막막함이란 점은 광범위한 초조함의 반영입니다.

▲ 10일 저녁 세종로 네거리에서부터 시청 앞 태평로, 남대문 넘어까지 50만 시민이 함께 촛불을 들었다. ⓒ서정은
그렇습니다. 누구랄 것도 없이 이후를 궁금해 하고 있습니다. 갑자기 제 친구의 이야기가 떠오릅니다. 수백만의 인파가 참여하는 축제에서 집에 어떻게 돌아갈까 걱정을 하는 사람들은 한국사람 뿐이라고. 왜, 가족끼리 오랜만에 야구장에 가도 7회 넘어가면 차 빼야한다고 아빠나 삼촌이 미리 나가지 않습니까.

부끄러울 건 없습니다. 사실 그것은 새로이 창궐한 '우리들의 대한민국'을 지지하지만, '당신들의 대한민국'에서 삶의 대부분을 살았던 우리 모두가 한 달여를 넘게 참아왔던 질문입니다. 참을 수 없이 궁금했지만 혹시 어설퍼 보일까, 혹은 '꼰대'라고 손가락질 당할까 묻지 못했던 것 뿐 입니다.

개인적으로는 특히, 386 삼촌들의 궁금증이 폭발적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인지 몇 개의 입장들이 끊어진 시간대에서 꾸역꾸역 방향을 찾아 살아왔습니다. 제 식대로 말하자면, '당신들의 대한민국'에서 '우리들의 대한민국'으로 여행하는 히치하이커(hitchhiker)를 위한 안내서'입니다. 목마른 사람이 우물을 판다고, 대부분의 저자는 역시 386 삼촌들이었습니다.

<안내서들>

1) 20일까지 무조건 재협상, 이후 정권 퇴진 불사하겠다는 입장 (광우병국민대책회의)

2) 박근혜 정부를 포함한 이명박 이후를 논의하는 진보진영 협의체를 구성하자는 입장
(자세한 내용은 참세상 '68혁명, 아니 6월 항쟁의 교훈', 이진경 참조 http://www.newscham.net/news/view.php?board=news&nid=48284)
3) 부르주아민주주의의 위기를 드러내는 정치가 출현했지만 새로울 것은 없는 상황이어서 결론을 유예해야 한다는 입장
(대략적인 내용은 이택광 블로그 '포스트 6.10'참조 http://wallflower.egloos.com)

4) 무엇이던 광장의 토론으로 결정해야 한다는 입장 (자세한 내용은 민중의소리 '[긴급 좌담]촛불 시위의 의미와 전망' 박래군 발언 참조, http://www.vop.co.kr/A00000210356.html)

5) 헌법 제1조의 제헌이 필요하다는 입장 (자세한 내용은 참세상 '6.10 아침에', 유영주 참조 http://media.jinbo.net/news/view.php?board=news&id=43401&page=1&category1=37)

6) 헌법 1조 제헌에 앞서 현실적이고 명랑하게 주민소환제를 실시하자는 입장 (자세한 내용은 우석훈 블로그 '한나라당과 지방자치 문제에 대하여' 참조 http://retired.tistory.com/?page=4)

4. 불가능한 것을 요구 하지 말고, 가능한 것을 가능케 하라!

자, 어떠십니까? '안내서'를 확인하니 마음이 좀 안정되십니까? 시동을 걸어 볼까요, 그러나 안타깝게도 저는 그다지 마음에 드는 게 없습니다.

1)번과 2)번은 상황을 처리하는 너무나 전형적인 운동권의 관료적 방식입니다. 대게의 성명서들이 저런 방식으로 결론 맺어집니다. ‘어쩌구 저쩌구 ..... 좌시하지 않겠으면 연대를 통해 궐기 하겠다!’ 결국, 일단 아무 것도 하지 않겠음의 수사적 표현입니다. 1)번은 대표성 과잉의 나르시즘에 빠져 아무런 실효성이 없는 레토릭으로 운동할 수밖에 없는 연대의 한계를 고스란히 보여줍니다. 2)번은 반보 앞에서 코멘트만 남발하다 끝나기 딱 좋은 친목계 제안입니다. 3)번은 시니컬한 지적 우위가 카타르시스처럼 느껴지지만, 결국 광장의 역동성을 활자화하는 수련입니다. 4)번은 직접 민주주의 실천적 방식이란 점에서 존중하지만, 너무 원론의 입장이어서 골목길에서 시비가 붙었는데 싸움은 소림사에 가서 하자는 이야기처럼 들립니다. 5)번은 적극 공감하지만 거시적이고 정치적인 기획을 향한 직선의 안내서여서 삭막합니다. 중간 과정, 즉 생활의 정치를 배제한 느낌이 듭니다. 6)번은 논쟁 가능한 유쾌한 상상이지만 현실성의 문제에 취약해보입니다. 사실 남이 쓴 글, 특히 그 중에서도 유명한 선배들을 타박하는 것이 제일 쉬운 일입니다. 염치만 불문한다면 말이죠.

이쯤에서 저의 제안을 말씀드리겠습니다. 제 안내서의 제목은 <꿈꾸지 말고 이대로 살자!>입니다. 요약하자면, "불가능한 것을 요구 하지 말고, 가능한 것을 가능케 하자!"는 겁니다. 앞서 나온 안내서들은 모두 6월 10일이 분기점이었다는 것을 근거로 새로운 판을 제안하고 있지만 아쉽게도 그 접근 회로는 모두 6월 10일 이전의 방식입니다. 차이는 있지만 정리하자면, 소고기에서 시작해서 민주주의로 왔으니 이제는 청와대를 과녁으로 하는 '정치'로 '운동'으로 전환, 조직하자는 제안입니다.

그러나 이는 규모의 ‘정치’에 압도당하여 시작하는 ‘상징’의 상상력을 발휘하지 못한 판단입니다. 기성의 '운동'이 고루하고, '정치'의 권위를 인정 할 수 없어서 '촛불'을 들고 놀러 나왔는데, 이제는 다시 '운동'을 조직하고 '정치'로 가자고 안내하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것이야 말로 흩어지는 지름길입니다.

내일을 꿈꾸지 말고 지금 이대로 광장에 남아야 합니다. 마치, 내일은 없는 것처럼 계속 싸워야 합니다. 추가협상 따위의 거짓말로 상황만 모면해보려는 모리배적 수법에 ‘집단 지성’이 승리한다는 경험을 공동체에 남겨야 합니다. 남아서 컨테이너 벽이 막아서는 민주주의를 어떻게 할 것인지 계속 토론하고, 유희로 넘어서야 합니다. 그걸 '비폭력'이라고 믿으며 막아서고 있는 예비군들의 폭력과 상처 다 터트리고 새살 날 때까지 논쟁해야만 보호와 통제의 군사주의 문화를 넘어 설 수 있습니다. 그것이야 말로 거리에 울려 퍼지고 있는 ‘대한민국은 민주 공화국이다’를 아래로부터 재구성하는 방식입니다. 제도적 장치와 수단을 통해 정치와 법을 바꾸는 것은 그 이후의 문제입니다.

광장은 아직도 열기가 뜨겁고 구호가 번져가고 있습니다. 소고기에서 곧장 민주주의로 이어지는 것이 아니라 민주주의로 가는 길을 막아서고 있는 걸림돌들을 인식하고 제거하자고 요구하고 있습니다.

그 중에서도 "쓰레기 조중동! 한 놈만 패자 조선일보!"의 구호가 제일 쩌렁쩌렁합니다. 행동하는 상식의 위력 앞에 조선일보가 실체적 위기에 빠졌다는 징후가 여러 곳에서 포착되고 있습니다. 진보진영 협의체이던, 헌법 1조 개헌이던 꿈꾸지 말고 일단은 여기에 다 붙어줘야 합니다. 조선일보 두고 진보진영 협의체 해봐야 그 밥에 그 나물 좌파 빨갱이 프레임에서 벗어나기 힘들고, 조선일보 두고 헌법 1조 개헌하자는 것은 어림 반 푼어치입니다. "거리에선 쓰레기 조중동! 아고라에선 한 놈만 패자 조선일보!" 놀이가 한참 절정인데 왜 자꾸 다른 얘기하며 물 흐리는 미꾸라지처럼 구는지 모르겠습니다. 고약한 버릇입니다. 사회의 근본을 바꾸자는 ‘안티 조선’ 10년의 성과가 눈앞에 있습니다. 실제로 너무 중요하고 또 이길 수 있는 싸움이 있고 그를 향한 열기가 있는데, 그것이 결국 여기로 갈 수 밖에 없다는 예단으로 다른 것을 시작하자는 구체성없는 제안은 납득할 수 없는 어리석음입니다.

광장에서 가능한 가능케 하는 싸움을 해야 합니다. 한반도 대운하, 공기업 민영화, 교육 자율화 조치와 계속 싸워야 합니다. 정치적 전망을 찾는 것은 하나도 중요하지 않습니다.

불가능한 정치적 전망을 요구하다가 68년도에는 드골이 재선되고, 6월 항쟁의 결과는 제도 정치권으로 수렴되어 노태우가 당선되지 않았습니까? 같은 역사 반복하지 말고, 일단 가능한 것을 가능케 하면 됩니다. 100만을 모으자는 구호를 ‘정치’화 해 내는 것으로 시작된 '우리들의 대한민국'이 상징하는 바는 바로 그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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